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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뇌연 남유용 억유자, 간록주, 집오백옥암정..(雷淵 南有容 憶幼子, 看漉酒, 集吳伯玉巖亭..)

어제는 줄기차게 하루 종일 장맛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맑게 개였다. 장마는 6월 하순에서 7월 하순의 여름에 걸쳐서 동아시아에서 습한 공기가 전선을 형성하며 남북으로 오르내리면서 많은 비를 내리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로는 구우(久雨)라고도 하며, 중국이나 일본은 매우(梅雨)라고 부른다.

장마의 어원(語源)은 1500년대 중반에 나온 '길다'라는 의미의 한자어인 '장(長)'과 비를 의미하는 '마ㅎ'를 합성한 '댱마ㅎ'를 장마 어원으로 추정한다. 1700년대 후반에는 '쟝마'로 표기하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지금 '장마'로 쓰고 있다.

 

약 30개월의 세종시 공동주택건설 감리업무를 마치고 7월 1일 자로 새로운 현장에 배치되어 2년 넘게 정보통신 감리를 수행하게 되었다. 현장과 인접한 곳에 숙소를 얻었는데 바로 뒤에 해발 255m의 백운산(白雲山)이 있어 새벽에 무작정 등산로를 찾아 정상에 올라 보았다. 멀리 인천대교는 물론 인천국제공항 활주로, 무의도(舞衣島), 장봉도(長峯島)와 희미하게 강화도(江華島)까지 시계(視界)가 확보되어 잠시 머무는 정상에서의 상쾌함은 즐겁게 하루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며, 이곳에 머무는 동안 새벽에 빠짐없이 정상에 올라가 보리라 다짐해 본다.

 

이번에 함께 살펴볼 대제학(大提學) 뇌연 남유용(雷淵 南有容) 선생은 인물됨이 질박(質樸)하면서도 바른말을 잘하고 청백(淸白)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기에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실린 시를 통하여 그의 걸출한 면모를 느껴보고자 한다.

 

억유자(憶幼子 : 어린 아들을 생각하며)

積雨連旬苦不開(적우연순고부개) 장맛비 열흘을 이어 개지 않는데

遅遅幼子信書來(지지유자신서래) 애가 보낸 편지는 느리게 오는구나.

遙知水濶柴門外(요지수활시문외) 멀리서도 사립 밖에 물이 넘칠 줄 알지만

日嚲長竿上釣臺(일차장간상조대) 해가 길어 장대 메고 낚시터에 오르리.

 

 이 시는 그가 26살 되던 해에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8살 장자 영록(寧祿)을 생각하고 이 시를 지었을 것이다. 긴 장마 기간 동안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스며있다. 그 애는 영특했으나 9살에 죽었는데 그를 잊지 못해 행장을 지어 추모할 만큼 사랑했다고 한다.

 

간록주(看漉酒 : 술 거르는 것을 보고)

勸婦漉酒兒承盎(권부록주아승앙) 아내는 술 거르고 아이는 동이에 받으라 하고

我坐搘頤聞酒香(아좌지이문주향) 나는 턱 괴고 앉아 술 냄새를 맡네.

斗米前年得三甁(두미전년득삼병) 작년에는 한 말 술로 세병을 걸렀는데

今年酒好少十觴(금년주호소십상) 올해는 술맛이 좋아 열 잔이 적다네.

我言酒好徑得醉(아언주호경득취) 술이 좋아 일찍 취하기만 한다면

雖失十觴亦相當(수실십상역상당) 열 잔 잃더라도 그게 그거 아닌가.

不須斟酌踈酒氣(부수짐작소주기) 술기운이 적다고 머뭇거리지 말 것이니

且將一甁與我甞(차장일병여아상) 우선 내게 한 병 주어 맛보게 하시오.

 

 이 시는 1728년(영조 4) 초에 지은 시로 아내 유씨가 술 거르는 것을 보면서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심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가정의 일상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과삼전도유작(過三田渡有作 : 삼전도를 지나면서..)

石生不願堅以穹(석생불원견이궁) 돌로 생기려면 크고 단단하기 바라지 말고

試看三田渡口碑(시간삼전도구비) 시험 삼아 삼전도 어귀의 비석을 보라.

人生不願才且文(인생불원재차문) 사람으로 나려면 재주와 글을 바라지 말고

試讀三田碑上辭(시독삼전비상사) 시험 삼아 삼전도의 비문을 읽어보라.

三田日夜流沄沄(삼전일야류운운) 삼전도 강물은 밤낮으로 소용돌이쳐 흐르는데

下流直接東江涘(하류직접동강사) 하류는 동강 가에 바로 대었다.

他年若過東江去(타년약과동강거) 만일 다른 해에 이 동강을 지난다면

莫以吾牛飮江水(막이오우음강수) 우리 소에 그 강물을 먹이지 않으리라.

 

이 시는 1731(영조 7) 연말에 지은 칠언율시로 그해 6월에 아내 유씨의 상처(喪妻)로 슬픔을 겪으며, 한양과 용인을 오갈 때 삼전도의 비석을 보고 청나라에 항복했던 치욕에 대한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집오백옥암정이의숙홍양지재황대경경원구(集吳伯玉巖亭李宜叔洪養之梓黃大卿景源俱 : 오원의 종암 정자에 이천보 홍자 황경원과 모여)

春陰歇遊騎(춘음헐유기) 봄이 음침해 말 타고 놀기를 쉬니

滿地柳條靑(만지유조청) 땅에 가득한 버들은 가지가 푸르다.

山色隨移杖(산색수이장) 산 빛깔은 옮기는 지팡이에 따르고

池心照倚亭(지심조기정) 못 복판에는 의지한 정자가 비치네.

淸雲意俱遠(청운의구원) 맑은 구름에는 그 뜻이 함께 멀고

幽鳥酒初醒(유조주초성) 그윽한 새소리에 술이 막 깬다.

曠眺村墟晩(광조촌허만) 멀리 바라보면 마을은 저녁인데

人烟生窈冥(인연생요명) 저녁 짓는 연기가 어둠 속에서 인다.

 

이 시는 1732년에 오원(吳瑗,1700∼1740)의 종암 별장에 여러 친구들이 모여서 지은 시로 뇌연집(雷淵集)에 보면 이들이 모여서 정릉 골짜기에서 놀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는 사실적인 봄날의 풍경과 자신의 음울(陰鬱)한 기분을 드러냈다.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 1698 ~ 1773)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덕재(德哉), 호는 뇌연(雷淵) · 소화(小華) · 소화산인(小華山人)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서울 출신으로 증조부는 대제학 남용익(南龍翼), 조부는 대사헌 남정중(南正重), 부친은 동지돈녕부사 남한기(南漢紀), 모친은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아들은 재상을 지낸 남공철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21년에 진사가 되고, 강릉참봉 · 세자익위사시직 · 형조좌랑 · 영춘현감을 지낸 뒤 174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그 해에 정언(正言 : 고려와 조선시대 봉박(封駁)과 간쟁을 담당한 관직)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간관(諫官 : 왕에 대한 간쟁(諫諍)·봉박을 담당한 관원을 일컫는 말)이 왕의 뜻에만 순응하여 시비를 다투지 않고 요행만 바란다고 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왕에게도 직언하는 것을 서슴지 않아 해남에 유배가 기도 하는 등 강직한 성품을 보였다.

 

1743년부터 홍문관에서 부교리 · 부수찬 · 응교 · 교리 등과 세자시강원의 문학 · 필선 · 보덕 등의 직과 사간 · 장령 · 서학 · 동학 · 중학 등의 교수를 거쳤다. 1747년 응교(應敎)로 있을 때에는 군덕10조(君德十條)를 진언했는데 군주의 성실을 특히 강조했다. 1748년 통정(通政)으로 승계한 뒤부터 승지 · 판결사 · 형조참의를 역임했다.

 

1752년 가선(嘉善)으로 승계한 뒤 대사성 · 예조참판 · 예문관제학 · 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754년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뒤에 정조가 된 세손을 세 살 때부터 무릎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는 뒤에 그 은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고, 사후에 직접 치제문(致祭文 : 죽은 이의 덕이나 산천, 서원과 연고가 있는 이를 기리는 글)을 지어 내렸으며, 문집인 『뇌연집(雷淵集)』을 간행할 때도 직접 「어제서뇌연자고(御製敍雷淵子稿)」를 지었다.

 

1755년 『천의리편(闡義理編)』의 찬집당상을 겸직하고, 비변사제조 · 예문관제학 · 병조참판 · 세자좌부빈객 · 대사헌 · 대사성을 거쳤다. 호조참판을 거친 뒤 양관(兩館)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했다. 1765년에는 지중추부사와 형조판서가 되었다. 1767년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72년 『명사정강(明史正綱)』을 편찬했으나, 서법이 존주지의(尊周之義)에 심히 어긋난다고 하여 영조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는 곧 역사관이 성리학적 역사인식 방법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로 말미암아 장차 조선사기(朝鮮史記)를 편찬할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인물됨이 질박하면서도 바른말을 잘하고 청백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영조실록에 실려 있는 졸기에 "형 남유상(南有常)과 더불어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사람됨이 평온하고 순실(純實)하여 세상일에 담담하였다."라는 평이 있다. 문장과 글씨를 잘 썼는데, 형 남유상(南有常)으로부터 배웠다고 자술(自述)한 바 있다. 특히 고체(古體)를 잘 다룬 것으로 알려졌는데, 고금각체를 자유롭게 다뤘고 모두 수준을 유지하였다.

 

필적 가운데 금석문으로는 예서로 된 단양의 <우화교비(羽化橋碑)>, 안성의 <오정주묘갈(吳鼎周墓碣)>, <해백윤세수비(海伯尹世綏碑)>, 경기도 고양의 <정형복묘표(鄭亨復墓表)>, 경주의 <오원묘갈(吳瑗墓碣)> 등이 있다. 이 중 <우화교비>를 통해 전서 및 예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또 《근묵(槿墨)》 등에 간찰이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명사정강』, 『천의리편』, 『명서찬요정강(明書纂要正綱)』, 『백운재실기(白雲齋實紀)』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뇌연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영종도 백운산)

백운산(255m)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완만한 경사로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백운산 정상
백운산 봉수대는 1872년 제작된 영종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백운산 전망대에 오르면 영종도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좌측 인천대교와 희미하게 보이는 공항활주로, 공항신도시, 삼목항, 강화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