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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위응물 유거, 추야기구이십이원외(韋應物 幽居, 秋夜寄丘二十二員外)

우리가 현재 삶을 영위하는 거주지마다 주소가 있다. 주소에는 동내이름 즉 지명이 있는데 지명을 어원적(語源的), 역사적(歷史的), 지리학적(地理學的)으로 분류하는 학문을 지명학(地名學)이라고 한다. 지명학은 그 지명의 언어가 쓰였던 기간, 역사, 인구분산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정보도 알려주며 내가 태어난 고향이나 현재 살고 있는 지명의 유래와 변천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인천시 영종도(永宗島) 운서동(雲西洞)에 터전을 마련한 지 10여 일이 지났다. 영종도는 2001년도에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세계 3위의 국제공항으로 명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우리나라를 찾는 관문으로 자랑과 긍지를 갖기에 충분하다.
영종동(永宗洞)의 지명의 유래는 인천항 서쪽 해상에 위치한 곳으로 인천국제공항이 있고 백운산(白雲山)이 소재한다. 동의 지명은 영종도에서 유래하는데, 영종도의 본래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그 뜻은 '자줏빛 제비섬'이라는 의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에는 "자연도는 인천도호부 서쪽 27리 되는 곳에 있으며 주위가 55리이고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경원정(慶源亭) 맞은편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이름'이라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경원정은 구읍 선착장 주변에 있던 객사(客舍)를 뜻한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영종'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자연도 앞에 있던 조그마한 섬으로 표시되어 있다. 1653년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있던 진(鎭)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때 만세교(萬歲橋)라는 다리를 건설하고 자연도와 연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종진(永宗鎭)이 설치된 영종도가 자연도라는 지명을 대신하는 대표 지명이 되었다.
 
영종(永宗)을 한문을 해석하면 ‘긴 마루’의 뜻으로 비행기가 이, 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滑走路)가 영종인 것이다. 활주로는 비행기가 발명된 후 생긴 단어지만 이전에는 영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전남 고흥(高興)은 ‘높이 흥 한다’의 뜻이지만 높은 곳(우주)에서 흥할 수 있는 터전이 고흥인 것이다. 영종과 고흥의 지명을 정한 선조들이 미래를 내다보며 지었을 까 하는 묘한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의미를 찾아가는 것 또한 지명학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위응물(韋應物, 737, ~ 804)의 한시 2수는 알아보고자 한다. 유거(幽居) 시는 40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한적한 삶을 살고자 하는 심정을 읊었으며,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 한수를 자서해 보았다. 위응물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함께 도위(陶韋)라고 불릴 만큼 쌍벽을 이루었기에 연이어 그의 시계(詩界)를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유거(幽居 : 한적히 살며)

貴賤雖異等(귀천수이등) 귀하고 천한 것 모두 다르지만
出門皆有營(출문개유영) 문밖에 나서면 제각기 일이 있어
獨無外物牽(독무외물견) 홀로 명리에 끌리지 않아
遂此幽居情(수차유거정) 끝내 한가히 사는 정 따르리
微雨夜來過(미우야래과) 밤새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不知春草生(불지춘초생) 봄 풀은 얼마나 자랐는지 알지못하네
靑山忽已曙(청산홀이서) 청산엔 아침 햇볕 비꼈는데
鳥雀繞舍鳴(조작요사명) 새들은 집을 감싸고 울어 대누나
時與道人偶(시여도인우) 때로는 도사와 만나기도 하고
或隨樵者行(혹수초자행) 때로는 나무꾼 따라가고
自當安蹇劣(자당안건열) 이렇게 사는 것이 즐거운 것을
誰爲薄世榮(수위박세영) 뉘라서 세상영화 엷다 하리.   
 
추야기구이십이원외(秋夜寄丘二十二員外 : 가을밤 친구 구(丘)와  22단원에게)

懷君屬秋夜(회군속추야) 가을도 밤이라 그리운 그대
散步詠凉天(산보영양천) 거닐면서 먼 산을 바라보네 읊어본다네
山空松子落(산공송자락) 텅 빈산엔 솔씨 하나 둘 떨어지고
幽人應未眠(유인응미면) 이 밤을 그댄들 잠을 이룰까?
 
위응물(韋應物, 737, ~ 804)은 당나라 경조(京兆) 만년(萬年) 사람으로 위대가(韋待價)의 증손이다. 젊어서 임협(任俠 : 약자를 돕고 강자를 물리치는 정의감이 있음)을 좋아했고, 처음에 삼위랑(三衛郞)으로 현종(玄宗)을 섬겼는데, 나중에 뜻을 고쳐 독서에 전념해 숙종(肅宗) 때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대종(代宗) 영태(永泰) 중에 낙양승(洛陽丞)과 경조부공조(京兆府功曹)를 지냈다.
덕종(德宗) 건중(建中) 2년(781)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에 오르고 얼마 뒤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옮겼으며, 좌사낭중(左司郎中)이 되었다. 정원(貞元) 초에 다시 외직으로 나가 소주자사(蘇州刺史)가 되어 세칭 ‘위소주(韋蘇州)’로 불린다. 나중에 사직하고 소주 영정사(永定寺)에 머물면서 재계(齋戒)하고 인사(人事)를 멀리했다.
시를 잘 지었는데, 전원산림(田園山林)의 고요한 정취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고황(顧況), 유장경(劉長卿) 등과 수창(酬唱 :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했다. 당나라 자연파 시인의 대표자로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왕맹위류(王孟韋柳)’로 병칭 되었다. 또 도연명(陶淵明)과 함께 ‘도위(陶韋)’로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