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운봉 성수 오도송(雲峰性粹 悟道頌)

우리나라 불교역사를 보면 근대 고승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6.25 전쟁의 격동의 시대를 겪으며 그 어려웠던 시기에 확고한 신념, 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도의 길로 접어든 많은 이들 중에 훌륭한 선사들이 나타나 현재 불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성수스님 또한 간절한 참구와 철저한 용맹정진으로 화두를 타파하고 오도의 경지를 이룬 선승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오도송을 자서해 보았다.  

 

운봉 성수(雲峰性粹 1889~1946)선사는 근대 고승으로 법명은 성수(雲峰)이며, 법호가 운봉(雲峰)이다. 1889년 12월7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정(鄭)씨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어린 나이에 향교에 들어가 학문을 익힘에 그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13세 살에 부친을 따라 은해사(銀海寺)로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발심을 하여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김일하(金一荷) 스님께 의지해 출가를 하였으며 15세에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다음 강원에 입학을 하여 강백(講伯) 회응(晦應) 스님에게서 교법을 배워 경율론 삼장(經律論三藏)을 두루 섭렵하였다.

스님의 세수 스물셋 되시던 해에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 가서 만하(萬下) 스님께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후 진리(眞理)의 본체(本體)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함을 절감하다가 스물다섯에 본사를 떠나서 청화산 원적사에 가서 석교 스님께 율을 배우고 참선(參禪)을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성수스님은 전국의 명산제찰(名山諸刹)을 두루 행각 하며 선지식을 참예(參詣)하고 공부에 혼신을 기울였다.

그렇게 참선정진에 전력하시기를 10여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 일념이 현전(現前)되는 경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수스님의 세수 35세되던 1923년 심기일전하기 위해 부처님 전에 대발원(大發願)을 세워 100일 기도를 한 후, 사생결단의 각오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정진에 들어갔다.

밤낮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대분심(大憤心)이었던 터라 자연히 화두 한 생각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섣달 보름이 되어 우연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문 밖에 나서는데, 그 순간 홀연히 마음 광명이 열리면서 가슴에 막혀 있던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깊이 참구해오던 화두공안(話頭公案)이 새벽녘 문 밖 차가운 공기 속에서 활연히 타파되었던 것이다.

 

이에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出門驀然寒鐵骨(출문맥연한철골) 문 밖에 나왔다가 갑작스러이 차가운 기운이 뼛속에 사무치자

豁然消却胸滯物(활연소각흉체물) 가슴속에 오랫동안 걸렸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자취가 없네

霜風月夜客散後(상풍월야객산후) 서릿발 날리는 달 밝은 밤에 나그네들 헤어져 떠나간 뒤에

彩樓獨在空山水(채루독재공산수) 오색단청 누각에 홀로 있으니 산과 물이 모두 다 공하도다.

 

이로부터 모든 공안을 밝혔음에 고인의 속임수를 벗어나서 임운등등(任運騰騰 : 무심하게 움직임에 맡기다) 걸림 없게 되었으니 깨친 바를 점검 받고자 당시 남방제일(南方第一)의 선지식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혜월(慧月) 선사를 참예(參詣 : 높은 분께 나아가서 뵘) 하니 여러 가지 물음에 모두 막힘 없이 대답하였다. 

세수 56세, 법랍 44세로 열반에 든 운봉 성수는 경허(鏡虛) - 혜월(慧月) - 성수(性粹) - 향곡(香谷) - 진제(眞際)로 굳건하게 전법(傳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