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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대둔산 등정(大芚山 登頂)

어린이날 이른 새벽에 사전 계획되어 있던 산행을 위하여 숙소를 나섰다. 신록이 우거지고 날씨도 청명하여 모처럼 기분 좋은 산행을 하게 되었는데 목적지는 대둔산(大芚山)이다. 휴일이라 많은 인파가 몰기는 시간을 피해 7시경 출발해 가파른 돌계단을 밟으며 오르는 길은 험난하고 힘들었지만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과 솔솔 불어오는 5월의 솔바람 피곤함을 잊게 한다.
10 여전 전에 오른 적이 있지만 오늘은 대둔산을 섭렵(涉獵) 하고자 마천대(摩天臺) 정상을 중심으로 좌측 허둥바위, 우측 낙조대(落照臺)에서 다시 마천대로 즉 마천대를 중심으로 좌, 우측을 왕복한 코스였다. 대둔산(大芚山)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이며 하나의 산을 두고 전북과 충남에서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대둔산은 한국 8경의 하나로 산림과 수석의 아름다움과 최고봉인 마천대(摩天臺)를 중심으로 여러 노암(露岩)이 기암단애(奇岩斷崖)를 이루며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각기 위용(威容)을 자랑하며 늘어섰다. 높이는 878m이며, 대둔산은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며 천여 개의 암봉(巖峰)이 6㎞에 걸쳐 이어져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대둔(大芚, 屯)이라는 명칭은 ‘인적이 드문 벽산(碧山) 두메산골의 험준하고 큰 산봉우리’를 의미한다.
또한 대둔산은 동학군(東學軍) 최후 항전지로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의 동학전쟁(東學戰爭) 때 우금치(牛禁峙)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대둔산에서 일본군과 마지막 항전을 벌이다 대둔산의 바위 벼랑에서 모두 몸을 던져 자결했는데, 삼선계단에 가기 직전에 '대둔산 동학군 최후 항전지(抗戰地)' 표지가 있으며, 5월의 아름다운 대둔산 풍광과 전봉준이 남긴 시 두 수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대둔산, 특히 가을 단풍이 가장 곱게 물들 10월 말~11월 초에 다시 한번 찾아오리라.

 

주차장 입구에서 바라본 대둔산 전경
산행코스는 주차장 ~ 케이블가 ~ 마천대 ~ 허둥바위 ~ 마천대 ~ 낙조대 ~ 마천대 ~ 주차장(약 5.5Km, 4시간 소요)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 산 중턱에서 바라본 풍경
삼선계단과 개척탑이 보이는 마천대 정상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는 풍경
구름다리
구름다리에서 정상을 바라본 풍경
삼선계단
마천대 정상 개척탑(조형물이 주변과 조화롭지 못해 아쉽다)
산봉우리 마다 뛰어난 자태의 소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허둥바위 반환점)
좌측 능선끝자락에 낙조대가 있다.
능선에서 곱게 핀 철쭉
빼어난 장군봉의 위용
낙조대를 반환점으로 다시 마천대 정상 개척탑이 보인다.
마천대 하산길에서 바라본 서쪽 능선
하산길 녹두자군 전봉준이 마지막 항거한 동학농민 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알려진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마지막 항쟁지가 대둔산이다.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좌(明佐). 초명(初名)은 전철로(全鐵爐). 별명은 전영준(全永準).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창군 죽림리 당촌이 유력하다.
아버지는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전창혁(全彰爀)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貪虐)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 형제의 조카)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한재(旱災: 극심한 가뭄으로 생긴 재앙)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改修)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 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 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 직책)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 역시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와 농민의 호응으로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차입(外兵借入)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 요청으로 청국군이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들어왔다.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 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抗日救國)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南接)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 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 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한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참조)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마지막 항쟁지 대둔산에서 민중봉기에 실패 후 41세에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남긴 운명유시(殞命 遺詩: 목숨이 끊어지기 전 남긴 시)와 13세에 지었다는 백구시(白鷗詩)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전봉준은 어려서 배운 방술(方術 : 方士가 행하는 신선의 술법)과 훈장 생활로 한학에 대한 기반은 다져졌기에 죽음을 앞두고 거침없이 유시를 남겼으리라. 백구시는 힘든 세상살이를 갈매기에 빗대어 읊은 시로 13세에 지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수준을 담고 있어 추측컨데 후대인이 가미하거나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운명(殞命 :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하더니
運去英雄不自謨(운거영웅부자모)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 사랑 정의 위한 길에 허물이 없었건만
愛國丹心誰有知(애국단심수유지) 나라를 위하는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백구(白鷗 : 흰 갈매기)

自在沙鄕得意遊(자재사향득의유) 하얀 모래밭에 홀로 한가로우니
雪翔瘦脚獨淸秋(설상수각독청추) 흰 나래 가는 다리 가을빛이 완연 하구나
蕭蕭寒雨來時夢(소소한우래시몽) 찬 비 쓸쓸할 제 꿈속에 젖어들고
往往漁人去後邱(왕왕어인거후구) 고기잡이 돌아가면 언덕에 오르네

許多水石非生面(허다수석비생면) 허다한 수석은 낯설지 않건마는
閱幾風霜已白頭(열기풍상이백두) 험한 풍상에 머리 벌써 세었구나
飮啄雖煩無過分(음탁수번무과분) 쉴 새 없이 쪼고 마셔도 분수를 아니
江湖魚族莫深愁(강호어족막심수) 강호의 물고기들이여 너무 근심치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