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박인량 주중야음(朴寅亮 舟中夜吟)

박인량(朴寅亮. ? ~ 1096년) 고려 초.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천(代天). 고려 개국공신인 박수경(朴守卿)의 현손(玄孫)이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일찍이 거란이 압록강 동쪽 지역에 야심을 가지고 강을 건너와서 동안(東岸)에다 보주(保州: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를 설치하여 고려에서 여러 차례 반환을 요청해도 듣지 않다가, 1075년(문종 29) 박인량이 지은 진정표(陳情表)가 요주(遼主)를 감동시켜 철거하게 되었다.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1080년에는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호부상 서유홍(柳洪)과 함께 송나라에서 약재를 보내준 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갔는데, 저장(浙江)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방물(方物)을 잃은 죄로 귀국한 뒤 죄를 받을 뻔하기도 하였다.
박인량이 저술한 천독(天牘)·표(表)·장(狀)·시 등은 동행하였던 김근(金覲)의 시문과 함께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이름으로 송에서 간행되어 중국에까지 그 문명(文名)을 날리었다. 1089년(선종 6)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오르고, 이어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저술로는 고금록(古今錄) 10권과 수이전(殊異傳)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세 아들 박경인(朴景仁)·박경백(朴景伯)·박경산(朴景山)이 모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써 고려 전기 명문가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처럼 시문에 뛰어난 박인량에 대하여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시로 이름을 떨쳤던 것은 이 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我東人之以詩鳴於中國(아동인지이시명어중국), 自三君子始(자삼군자시)."라고 하여, 최치원(崔致遠)·박인범(朴仁範)·박인량(朴寅亮)을 동렬(同列)에 두었으며, 송나라 사신으로 사주(泗洲)의 구산사에 들러다(使宋過泗洲龜山寺)의 시는 우리나라 바둑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어 차제에 올려보고자 한다. 지금은 사라진 그의 저술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램을 해보며, 그가 중국 사신으로 가서 동정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배에서 지은 시를 이종문의 한시산책 내용과 함께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동정호(洞庭湖)는 중국 후난성 북부에 있는 중국 제2의 담수호(淡水湖)이다.

주중야음(舟中夜吟 : 배에서 밤에 읊다)

故國三韓遠(고국삼한원) 고국인 삼한 땅은 멀기만 하고
秋風客意多(추풍객의다) 가을바람 나그네 생각도 많다
孤舟一夜夢(고주일야몽) 외로운 배 하룻밤 꿈을 꾸는데
月落洞庭波(월락동정파) 동정호 물결 속에 달이 빠지네

[한 통의 외교문서로 요 임금 감동시킨 박인량]
1071년(문종 25년) 3월이었다. 고려의 사신단을 태운 배 한 척이 격심한 풍랑에 시달린 끝에 가까스로 중국[宋]에 가닿았다. 사신단의 문필을 담당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이 배를 타고 서해 바다를 건너갔던 박인량(朴寅亮)! 그는 중국에서 지은 참으로 걸출한 시문들로 황제를 포함한 중국의 지식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박인량의 활약은 고려와 중국과의 문화 교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이 고려를 중국에 못지않은 문화국으로 인정하고, '소중화'(小中華'작은 중국)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부터였다.
더욱더 주목되는 것은 그 무렵부터 송나라 황제가 고려에 보내는 외교 문서 작성에 아주 각별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외교 문서를 보낼 때마다 문장력이 빼어난 신하들을 가려서 글을 짓게 했고, 지은 글들 가운데서 가장 잘된 것을 골라서 보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낼 때도 서장관의 문장력을 시험한 뒤에야 비로소 보냈다. 심지어 고려에 답하는 외교문서가 빼어나지 못하다는 이유로 담당관이 파면당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까딱 잘못하면 고려로부터 개망신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조치들인데, 이 모두가 '박인량 효과'와 무관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1075년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났을 때다. 박인량은 단 한 통의 외교문서로 요나라 임금을 감동시켜 아주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이 사건은 문장이 국가적 위기를 타개한 상징적 사례로 후대에 두고두고 칭송되었다. 1079년에 부사(副使)가 되어 두 번째로 중국 땅을 밟았을 때, 박인량은 이미 처음 갈 때의 촌뜨기 박인량이 아니었다. 그의 시가 노래로 불리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중국에 퍼져 있었고, 중국인들도 그에게 아주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그가 지은 시문들을 중심으로 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는 문집을 간행해 주었던 것은 바로 그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할 때 박인량은 최치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최치원 이상으로 문학적 명성을 국제적으로 떨친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아직도 우리에게 낯선 이름일까? 행적 자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그의 저서들이 죄다 사라졌고, 남아 있는 작품들도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는 온전한 것으로는 달랑 3수가 남아 전하는 박인량의 한시 가운데 하나다. 보다시피 화자는 광활한 동정호에 달이 첨벙 빠질 때, 일엽편주 속에서 개미 새끼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머나먼 바다 건너 고국 땅을 꿈꾸고 있다. 나그네의 우수를 이토록 짧은 작품에다 대우주적 차원의 거대 구도로 서늘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솥에 있는 국을 다 먹어봐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 듯이, 박인량의 시가 도달한 수준을 이 한 편으로도 알겠다 싶다. (매일신문 2016-10-29. 이종문의 한시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