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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왕유 동만대설억호거사가(王維 冬晩對雪憶胡居士家)

이틀 후면 대설이다. 서울의 첫눈은 살짝 흩날리는 정도로 지나갔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었으면 첫눈을 아직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펑펑 쏟아지는 눈 내리는 광경을 접 한지 오래되었다.

 

펄펄 눈이 옵니다 바람 타고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 송이 하얀 솜을

자꾸 자꾸 뿌려줍니다. 자꾸 자꾸 뿌려줍니다.

 

옛 동요 눈의 가사처럼 올해가 가기 전에 내리는 눈이 서설(瑞雪)로 다가오기를 기대하면서 왕유(王維)의 설시(雪詩) 중 최고로 평가받는 시 한 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 제목에 등장하는 호 거사(胡 居士)는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매우 청빈하여 왕유(王維)가 도와주는 각별한 사이였다. 왕유는 청빈한 은자(隱者) 호거사를 원안(袁安)에 비유했다.

원안은 동한(東漢)의 대신(大臣)이었으며 자는 소공(邵公)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때에 눈이 많이 내려 굶주리게 되었는데, 원안은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잠을 잤다. 이따금 저잣거리를 시찰하던 현령(縣令)이 눈을 치우지 않은 집을 발견하고는 굶어 죽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치우고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은 원안의 집이었다. 현령은 원안에게 왜 밖으로 나가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이에 원안은 큰 눈으로 사람들이 곤경에 처했으니 밖에 나가면 폐를 끼치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감복한 현령은 원안을 효렴(孝廉 : 중국 전한 때에 치르던 관리 임용 과목. 또는 그 과(科)에 뽑힌 사람으로 무제(武帝)가 군국에서 매년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사람과 청렴한 사람을 각각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한 데서 비롯됨)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섬세하고 우아한 감흥이 다가오는 이 시는 왕유가 노년에 설경을 바라보며 지은 시로 삶의 함축적인 요소를 담고 있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명시와 함께 지난 겨울 서울 대모산에서 찍은 설경풍경을 올려보았다.

 

동만대설억호거사가(冬晩對雪憶胡居士家 : 겨울밤 눈을 대하고 호 거사의 집을 추억하며)

寒更傳曉箭(*한경전 *효전) 추운 밤 경점(更點) 소리는 새벽을 알리고

清鏡覽衰顏(청경람쇠안) 맑은 거울에 늙은 얼굴 들여다보네

隔牖風驚竹(격유풍경죽) 들창 너머로 바람 부니 대나무 놀라고

開門雪滿山(개문설만산) 문을 여니 온 산에 눈이 가득하네

灑空深巷靜(쇄공심항정) 눈발이 날리니 깊은 골목 조용하고

積素廣庭閑(적소광정한) 눈 쌓인 넓은 뜰이 한가롭네

借問袁安舍(차문원안사) 원안(袁安)의 집에 안부를 물으니

翛然尚閉關(소연상폐관) 유유자적하게 아직 문을 닫고 있다네

 

*한경(寒更 : 추운 밤의 경점(更點). 경점(更點)은 하룻밤을 5경(更)으로 나누고 1경을 5점(點)으로 나누었으며 경(更)에는 북(鼓)을 치고 점(點)에는 징이나 종을 쳐서 알리던 것을 말한다)

*효전(曉箭 : 새벽을 알리는 물시계의 바늘. 전(箭)은 고대 물시계의 누호(漏壶)에 있는 눈금을 알리는 화살 표시를 말한다)

 

대모산 설경(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