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을 떠나 불빛이 없는 청명한 밤하늘을 바라보면 촘촘하게 무수히 떠있는 별을 보게 된다. 앞서 소개한 <삼라만상과 태허>에서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시간개념상 현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視覺)은 빛을 통해 주위 환경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능력으로 모든 형상은 빛의 속도(30만Km/초)로 시각(視覺)을 인지하게 된다. 책을 읽더라도 엄연히 눈과 책과의 거리가 존재한다. 보다 세밀히 해석한다면 현재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인지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지금 태양을 바라보는 것도 약 8분19초 전의 모습이며, 달을 보는 것 또한 1.3초 전의 모습이다. 만약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의 고등한 외계인이 지금 지구를 관찰한다면 250만년 전의 지구모습일 것이며, 제임스웹 망원경으로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지구와 유사한 행성을 찾았다 하더라도 250만년 전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현재와 동일한 시간 개념을 적용한다면 그 행성을 사라졌거나 엄청난 진화의 과정을 거쳤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티븐 호킹 박사가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지구에 인류가 사는 것을 알리지 않는 쪽이 유리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고 고등한 외계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리라.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느냐
잔(盞) 잡아 권(勸)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백호 임제의 <청초 우거진 골에> 시조는 유명한 기녀였던 황진이가 인생 사십에 병에 걸려 쓸쓸한 산기슭에 묻히느니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하여 송도(松都) 대로변에 묻혔는데, 황진이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는 그녀가 살았을 때 고대했던 만남을 바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기예(氣藝)가 일찍 저버림을 탄식하였고, 황진이의 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다. 이후 조정에서 사대부가 기생에게 술을 올리고 그를 기리는 시를 지은 것을 문제 삼아 탄핵해 파직에 이르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 전 38세의 나이로 풍류를 즐기며 호협(豪俠)한 삶을 살다 간 백호 임제(白湖 林悌)가 남긴 시 몇 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계(詠溪 : 개울을 노래하다)
溪響夜來多(계향야래다) 개울소리가 밤이 되니 더 밝아져
蕭蕭枕邊到(소소침변도) 쓸쓸한 울림이 베갯머리에 이른다
幽人和睡聞(유인화수문) 유인이 잠결에 화답하여
夢作千山雨(몽작천산우) 온 산에 비 내리는 꿈을 꾼다네
도고당강 역경오년중 구유촉물유감(到高塘江 憶庚午年中 舊遊觸物有感 : 고단강에 이르러 경오년 옛날에 유람하던 일을 생각하니 감회가 있어)
黃昏立馬對空洲(황혼입마대공주) 저녁놀에 말을 멈추고 텅 빈 물가와 마주하니
楓葉蘆花憶舊遊(풍엽로화억구유) 단풍잎 갈대꽃이 옛날 놀던 일 생각나게 하네
氷合一江天地閉(빙합일강천지폐) 강물은 하나로 얼어붙어 온 천지가 막혔는데
沙頭閑却濟川舟(사다한각제천주) 모래톱에 선 강 나룻배는 도리어 한가롭네
입중흥동(入中興洞 : 중흥동으로 들어가며)
心靜境俱寂(심정경구적) 고요한 곳이라 마음도 적막해지는데
石危天與齊(석위천여제) 바위는 위태롭게 하늘과 나란히 섰네
雲橫高峀外(운횡고수외) 구름은 높은 봉우리 밖에 비껴 있고
日落大江西(일락대강서) 지는 해는 큰 강 서쪽으로 떨어진다.
萬壑葉謝樹(만학엽사수) 온 골짜기 잎은 나무에서 시들고
一笻人渡溪(일공인도계) 지팡이 든 사람은 개울을 건넌다.
巖間長瑤草(암간장요초) 바위 사이에는 아름다운 풀이 길게 자라니
莫是遠公棲(막시원공서) 이곳이 바로 *원공의 거처 아리런가
*원공(遠公. 334 ~ 416)은 안문(雁門) 누번(樓煩) 사람으로 속세의 성은 가(賈)이고, 법명은 혜원(慧遠)이다. 동진(東晉)의 정토종(淨土宗) 고승(高僧)이다. 그는 저명한 고승(高僧) 도안(道安)의 후계자로 정토법문(淨土法門)을 크게 진작시켜서 ‘정토종초조(淨土宗初祖)’로 일컬어졌다. 관료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13세에 외숙 영호씨(令狐氏)를 따라 허창(許昌)과 낙양(洛陽) 일대에서 대량의 유가(儒家), 도가(道家) 서적을 섭렵했다.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거주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를 ‘원공(遠公)’으로 일컬었다.
증계묵(贈戒默 : 계묵스님께 드리다)
靑山不語古猶今(천산불어고유금) 청산은 오히려 예나 지금이나 말이 없고
體得禪僧戒默心(체득선승계묵심) 선사는 몸소 깨달아 고요한 마음을 경계하네
茶罷香殘坐寂寂(다파향잔좌적적) 차를 마신고 남은 향기 속에 고요히 앉았으니
一林微雨聽幽禽(일임미유청유금) 온 숲에 가랑비 내리고 그윽한 새소리 들려온다.
증잠사(贈潛師 : 도잠스님게 드리다)
我則不如君(아즉불여군) 이 몸은 스님만 못하다고 하니
君則不如雲(군즉불여운) 스님은 구름만 못하다고 하시네
無心自出峀(무심자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서 나오건만
僧俗兩紛紛(승속양분분) 스님과 속인은 둘 다 바쁘기만 하다네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 ~ 1587)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 풍강(楓江) · 소치(嘯癡) · 벽산(碧山) · 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조부는 승지를 지낸 임붕(林鵬), 부친은 평안도병마절도사 임진(林晋)이며, 우의정 허목(許穆)이 외손자이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 : 1497. 2.17.∼1579 6 19. 은 조선 중기의 학자·시인·문신으로. 본관은 창녕,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이다.)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 :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하는 집)와 주사(酒肆 : 큰 규모의 술집)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는데 『중용(中庸)』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23세에 모친을 여의었으며, 이에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 ·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시(謁聖試) 을과 1위로 급제한 뒤 흥양현감 · 서도병마사 · 북도병마사 ·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당시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는 것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명산을 유람하였다. 사람들은 임제를 두고 기인이라 하였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8세로 운명하기 전 아들에게 "(四海諸國未有能稱帝者獨載邦終古不能 生於若此 陋邦 其死何足借命 勿哭 :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不偏不黨)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문장이 호탕하고, 시와 글씨 · 거문고 · 가곡에 두루 뛰어나 풍류시인으로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을 남겼으며,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는데 임제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초서에 능하였다. 호방한 필치로 막힘이 없이 써내려 간 풍모를 통해 구속을 싫어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기개와 곧은 정신이 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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