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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오음 윤두수 시 몇 수(梧陰 尹斗壽 詩 몇 首)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는 조선 중기 대표적 문신이다. 강직한 성품 때문에 몇 번 정치적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임진(壬辰), 정유(丁酉) 양란(兩亂) 당시 등용되어 국가를 보전하는 크게 힘쓴 인물로 해평윤씨(海平尹氏)의 자랑이기도 한 오음에 대하여 계곡집(谿谷集)권 9에는 풍모가 당당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성품이 대범하고 솔직하였으며,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고 하였으며,

윤두수신도비명(尹斗壽神道碑銘)에는 그는 성품이 소탈하여 평생 옷 입는 것을 자기 분수에 맞게 입었을 뿐이고, 사치와 검소에 대하여 별로 개의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좋은 경치를 만나면, 술 한 병을 꺼내어 산이나 들에서 나는 나물을 뜯어서 안주로 삼아 그 자리에서 한 잔을 하면서 자연의 풍광을 즉석에서 즐겼다. 타고난 국량(局量)이 큰 데다가 재주와 언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나라의 어려운 때를 만나면 훌륭한 계책으로 나라의 위기를 구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한가로이 있을 때에는 말하고 웃는 것이 평화로워서 어린아이들도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었으나,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목소리가 우렁차고 기운이 넘쳤으며 얼굴빛이 장엄하여 어느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 18에는 처음에 그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시관(試官 : 고려·조선시대 시행되었던 각종 과거에서 책임을 맡았던 관원)이었던 정승 이준경(李浚慶)이 칭찬하기를, “앞날에 반드시 정승이 될 그릇이다.” 하였고, 동방(同榜 : 같은 회차에 과거(科擧)에 함께 급제한 사람)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도 항상 윤두수를 “대인(大人)의 기상을 타고났다”라고 칭송하였다.

 

국가 혼란기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하며 뛰어난 판단력과 예지로 국난극복에 앞장선 오음선생이 남긴 시 몇 수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남긴 경자이월 왕방노장유작(庚子二月 往訪蘆莊有作)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감흥이 절로 일어나는 명시임에 틀림없다.

 

유삼각산(遊三角山 : 삼각산을 유람하며)

山向雲中露角牙(산향운중로각아) 산은 구름 속에 솟은 봉우리를 드러내고

雲從山外漫橫斜(운종산외만횡사) 구름은 산 밖에서, 유유히 비껴있도다

僧來定自槽巖下(승래정자조암하) 스님이 오니 조암 아래에서 자리 잡고

試問春殘有幾花(시문춘잔유기화) 늦은 봄, 꽃은 얼마나 남아있는 가를 묻노라

東風十里野花香(동풍십리야화향) 십리 봄바람에 들꽃은 향기로운데

信馬閑行已夕陽(신마한행이석양) 말 가는 대로 한가히 걸으니 이미 석양이라

自是愛山心獨至(자시애산심독지) 이때부터 산이 좋아 마음이 홀로 이르러

却忘林逕一條長(각망림경일조장) 한 줄기 기나긴 , 숲 길도 잊어버렸네

 

우제(偶題 : 우연히 짓다)

小閣無塵霽景明(소각무진제경명) 작은 집에 먼지 하나 없고 날씨는 개고 밝아

簾波不動惠風輕(렴파부동혜풍경) 화창한 바람 불어도, 주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네

滿地綠如舖錦(만지녹태여포금) 땅에 가득한 푸른 이끼, 비단을 펼쳐놓은 듯

丁香花下午鷄鳴(정향화하오계명) 정향나무 꽃 아래서 정오의 닭이 운다

 

경자이월 왕방노장유작(庚子二月 往訪蘆莊有作 : 경자년(1600, 선조 33) 2월에 노동(蘆洞 : 지금의 노원구 중계동)의 별장을 방문하고 짓다)

 

其一.

洞府盤回一逕微(동부반회일경미) 동부에는 구불구불한 길 하나 희미하고

薜蘿長擬掛絺衣(벽라장의괘치의) 길게 늘어진 칡덩굴은 *치의를 걸어 놓은 듯하네

山花似勸山人酒(산화사권산인주) 산꽃이 마치 산인의 술을 권하는 듯하니

盡日前溪却忘歸(진일전계각망귀) 종일토록 앞 내에서 돌아가길 잊었네

*치의(絺衣 : 가는 갈포(葛布)로 만든 얇은 여름옷으로, 은자가 입는 옷)

 

其二.

東城十里世紛微(동성십리세분미) 성 동쪽 십 리 밖은 세상의 번잡 적지만

匹馬猶兼短後衣(필마유겸단후의) 필마에 아직도 *단후의를 걸쳤네

白石淸川聞此語(백석청천문차어) 흰 돌 깔린 맑은 내에서 이런 말을 듣나니

山花未落我當歸(산화미락아당귀) 산 꽃이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할 거라나

*단후의(短後衣 : 상의(上衣) 뒤쪽의 옷자락을 짧게 누빈 옷으로,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무인(武人)들의 옷)

 

*해산정(海山亭)

三日湖中泛小舟(삼일호중범소주) 삼일포 호수에 작은 배 띄우니

一區形勝水雲幽(일구형승수운유) 한 구역의 경치 뛰어나고 물과 구름 그윽하다

晝來曾憶舊遊處(주래증억구유처) 낮에 지난날 놀던 곳을 생각하니

三十六峰無盡秋(삼십육봉무진추) 서른여섯 봉우리에 끝없는 가을이 짙었구나

 

증승(贈僧 : 스님에게)

關外羈懷不自裁(관외기회불자재) 변방의 나그네 시름을 어쩌지 못하여

一春詩興賴官梅(일춘시흥뢰관매) 한 봄의 시흥을 관아의 매화에 부치네

日長公館文書靜(일장공관문서정) 해가 긴 관청에는 문서 만질 일 없는데

時有高僧數往來(시유고승삭왕래) 마침 고승이 있어 자주 오가네

 

*해산정(海山亭 : 강원도 고성 삼일포(三日浦) 구역에 있는 정자로 삼일포의 남쪽 동구암과 서구암 사이에 있다. 정자에 오르면 푸른 동해바다와 주변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볼 수 있다 하여 해산정이라고 불렀다. 기록에 의하면 옛날 고성군 구읍 일대에 명승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없었으므로 1567년에 오산 차천로의 선조인 고성군수 차식이 룡산의 남쪽 등성이에 터를 잡고 세웠다고 한다.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10경(關東十景)의 하나로 일러왔으나 후에 황폐화된 것을 군수 허계가 1630년대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오늘은 터만 남아있다.)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 1533 ~ 1601)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이다. 윤계정(尹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림(尹希琳)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尹忭)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형이다.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검열(檢閱)·정자(正字)·저작(著作)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권신(權臣) 이량(李樑)이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朴素立)·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 되었다.

그러나 그 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계문(啓文: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양식의 글)으로 무죄임이 밝혀져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 : 파면되었던 사람을 다시 채용함)되었다.

그 뒤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인·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좌, 아우 윤근수와 함께 파직되었다.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해 재령군수 최립(崔岦) 등과 함께 구황(救荒 : 흉년 등으로 말미암아 굶주림에 빠진 빈민(貧民)을 구제하는 일)을 잘했다 하여 옷 한 벌이 하사되었다.

이후 한성좌윤·오위부총관·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지방을 침범해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해 수사·수령의 기강 쇄신과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다.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를 변무(辨誣: 잘못된 것을 바로 잡도록 함)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군(海原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사헌(大司憲)·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1591년 5월 석강(夕講 : 임금이나 세자가 저녁에 글을 강독하거나 강론함)에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답서를 명나라에 알려 진상을 보고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보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양사의 합계(合啓 :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홍문관의 관원 중에서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연명으로 올리던 계사. 계사는 논죄(論罪)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 정철(鄭澈)에게 당부(黨附)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그리고 건저문제(建儲問題: 세자 책봉의 문제)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윤두수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음을 안 선조는 공을 인정하는 뜻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 평양 행재소(行在所)에 임진강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해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이듬해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했으며, 1595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臺諫 : 고려∼조선시대 감찰 임무를 맡은 대관과 국왕에 대한 간쟁 임무를 맡은 간관의 합칭)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평소 온화하고 화평했으나, 큰 일을 당했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때에는 적극적으로 극복에 나섰다. 저서로는 오음유고(梧陰遺稿)·기자지(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