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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황소 국화시 3수(黃巢 菊花詩 3首)

흔히 최치원(崔致遠)을 이야기할 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당이 쇠퇴하는 시기에 황소가 난을 일으켰는데 최치원은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격문(檄文)을 지어 황소에게 보낸 격문 중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드러내 놓고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또한 땅속귀신들도 이미 너를 가만히 죽이려 논의하였을 것이니..(仰亦地中之鬼已議陰誅.. )”라는 섬뜩한 격문의 대상이 황소다.

황소(黃巢 835 ~ 884)는 당나라의 반란자 대제 초대 황제(승천응운계성예문선무황제 : 承天應運啓聖睿文宣武皇帝)로 연호는 금통(金統, 881년)이라 했다.

그는 원래 과거를 준비하던 유학자였으나 수차례 시도해도 과거에 낙방되면서 단순히 실력만이 아닌 재력과 인맥이 필요할 정도로 당나라 내부가 썩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당 왕조에 대해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의미에서 국화라는 이름의 시편을 3개 지었다.

황소 자신은 나중에 폐망 후 야전에서 자살하였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소 봉기(蜂起)가 실패 한 후 루오양(洛陽)에서 승려를 했다는 전설이 있어 아이러니함을 느끼게 한다. 황 씨(黃氏) 성으로 유독 국화(黃菊)를 사랑해서인지 국화 관련 3수를 남겼는데 마지막 1수는 널리 알려지지 않아 이를 함께 찾아 살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1. 부제후부국(不第后賦菊 : 과거에 낙방 후 국화를 읊다)

待到秋來九月八(대도추래구월팔) 늦가을 구월 초파일 다가오면

我花開後百花殺(아화개후백화살) 내 꽃 피고 나면 모든 꽃은 시든다네.

冲天香陣透長安(충천향진투장안) 하늘에 닿은 향기 장안에 스며들 제

滿城盡帶黃金甲(만성진대황금갑) 온 성 도처에 황금빛 갑옷을 두른다네

 

2. 제국화(題菊花 : 국화를 제목 삼아 읊다)

颯颯西風滿院裁(삽삽서풍만원재) 가을바람은 스산하고, 국화는 정원에 가득한데

蕊寒香冷蝶難來(예한향냉접난래) 꽃도 향기도 모두 차가워 나비도 찾지 않네.

他年我若爲靑帝(타년아약위청제) 언젠가 내가 꽃을 다스리는 *청제가 된다면

報與桃花一處開(보여도화일처개) 복숭아꽃과 함께 한 곳에 피게 하리라

*청제(靑帝) : 각 방위를 관장하여 지킨다는 오방신장의 하나로, 동쪽과 봄을 맡은 신

 

3. 자제상(自題像 : 자신의 형상을 보며 짓다)

記得當年草上飛(기득당년초상비) 그 당시에는 세상을 분주히 기고 날았건만

鐵衣著盡著僧衣(철의착진착승의) 철갑옷을 입은 일 다한 후 승복을 입었네

天津橋上無人識(천진교상무인식) 천진의 다리 위 나를 알아보는 이 없고

獨倚欄干看落暉(독기난간간낙휘) 홀로 난간에 기대어 석양을 바라보네

 

황소에 대해 더 알아보면 과거 낙방 이후 소금 밀매를 시작하는데 애초에 고대시대의 소금 자체가 필수품이면서 초고가인 상품 중 하나였으며 안사의 난(安史之亂 : 안록산의 난) 이후 재정이 부실해진 중앙정부의 몇 없는 중요 수입원 중 하나였기에 당연히 국가가 독점하는 상품이었다. 다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 보니 못 사는 백성들이 많았고 이들을 상대로 직접 몰래 조제한 소금을 비교적 싼 가격에 밀매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황소도 여기에 끼어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밀염(密鹽)은 사람들에게 있어 생존에 필수품인 소금이었으며, 국가가 소금전매제를 통해 유통하는 합법적인 소금은 그 가격이 너무 비싸 가난한 민중들은 그야말로 뼈 빠지게 벌어 소금값만 대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법적인 소금 상인들을 통해 소금을 구매했으며, 이는 법을 지키느냐 마느냐를 넘어선 생존의 문제였기에 자연스럽게 대다수의 가난한 민중들은 돈 뜯어가기에 바쁜 국가의 정부보다 밀염상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찬동했던 것이며 정말 현대의 마약상과 같이 평판이 나빴다면 애초에 난 자체를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연이은 쇠퇴에 안사의 난으로 밑천까지 바닥난 당나라의 통제력은 극도로 약화된 상태였으며 거기에 기근까지 들자 친구였던 소금장수의 우두머리인 왕선지(王仙芝)의 제의에 동의해 함께 이 둘이 각각 반란군을 일으켰으며 왕선지가 결국 패사(敗死)한 뒤, 황소는 왕선지의 잔당들까지 흡수한 뒤 게릴라 전략을 바탕으로 당나라의 세력을 갉아먹는 동시에 본인의 세력을 확장시킨다. 이후 동관을 점령한 걸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황소는 수도였던 장안까지 함락시키는 데 성공, 그 당시 황제인 희종은 함락되기 직전 부랴부랴 뛰쳐나와 촉(蜀) 땅으로 피난갔다.

 

장안에 도착한 황소는 제(齊) 나라를 창건하여 황제로 즉위한 뒤 항복한 관리와 군인들을 적극 기용하며 제국을 굳히고자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황소 정권에겐 경제적 기반이 전무했고, 실질적인 지배 지역도 장안 근교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촉 땅으로 피신한 당나라 대신들은 중원 각지의 병사들을 징발해 황소를 공격했고, 황소의 부장이자 나중에 후량(後梁)을 세우는 주전충(朱全忠 852~912 : 주온(朱溫)·주황이라고도 한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원래 주전충은 반란군 황소(黃巢)의 진영에 있다가 적절한 기회에 당에 투항한 보상으로 중국 중부에 있던 카이펑(開封) 부근의 전략적 요지에 절도사로 임명되었다.)마저 배신하는 바람에 결국 고립되자 장안을 잃고 퇴각해야 했다. 결국 황소는 추격하는 각지의 절도사들의 공격을 받아 결국 패퇴하였고, 끝내 야산에서 자살하였다.

 

본인이 일으킨 황소의 난 자체는 크게 보면 큰 성과를 맺지 못하고 끝났지만 이 난은 안사의 난 이후로 밑천이 바닥난 중앙정부의 실태를 사방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안 그래도 사실상 군주로 군림하던 절도사들은 황소의 난을 정리하면서 '생각보다 중앙도 별거 아니네?'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결국 사실상 자치나 다름없던 입장에서 아예 당나라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세력을 구축한 뒤 내전까지 벌이게 되었어도 당나라 중앙정부는 이걸 제대로 억제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황소의 난 종결 이후 30년도 안 된 시점에서 그 난의 1등 공신 중 하나인 주전충에 의해 멸망한다. 황소 본인은 큰 역할을 못 했지만 그게 도화선이 되어 얼마 안 가 당나라를 멸망시켰으니 그 뜻은 이룬 셈이다.

 

기록의 역사는 권력자, 식자(識者), 승자들만의 유산으로 불의에 항거하거나 개혁을 꿈꾸다 실패한 자들은 역적, 도적, 배신자의 낙인으로 영원히 기록에 남게 되는데 최치원 선생의 토황소격문은 승자들의 기록으로 황소는 결국 역적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황국

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