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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송당 박영 도학시 4수(松堂 朴英 道學詩 4首)

박장원(철학박사, 교수)의 「松堂 朴英의 道學的 特徵과 松堂學派에 관한 硏究」, 대구한의대학교 박사논문과 “문헌에서 발견되는 松堂朴英의 학행에 대한 고찰”에서 인용한 내용으로 송당선생은 문무를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학과 의술에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의술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어 그 내용 또한 살펴보고자 한다. 경북 구미 선산의  명경당 비에 실려있는 도학시를 주제(空과 功 : 허상과 실상)로  성리학(性理學)을 두루 섭렵(涉獵)한 도학자(道學者)만이 나눌 수 있는 시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1537년(중종 32)에 송당의 제자 박운(朴雲, 1493~1562)이 경상도 선산 해평현 고리실 자신의 집에 ‘수지명경(止水明鏡)에서 뜻을 취하여 명경당(明鏡堂)을 지었다. 이를 기념하여 개최한 시회(詩會)에 함께 박영과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함께 참석하여 공(空)과 공(功)자를 운자(韻字)로 한 도학시(道學詩)를 서로 주고받은 일화는 이들이 긴밀하게 교유하였음을 바로 보여준다.

 

『松堂先生文集』 卷之一, 詩, 原韻(원운 : 韻字는 空과 功)  - 김취성(金就成. 字 成之)

風過無形色(풍과무형색) 바람은 지나쳐도 형체 없고

雲行迹亦空(운행적역공) 구름은 운행해도 또한 자취 없네

澹然無一事(담연무일사) 고요하고 편안하여 한 가지 일도 없으니

天地一般功(천지일반공) 천지가 모두 같은 공일세라

 

『松堂先生文集』 卷之一, 詩, 次金成之    - 박영(朴英)

有象非爲有(유상비위유) 형상이 있다 하여 있는 게 아니고

無形不是空(무형불시공) 형체가 없다 하여 없는 게 아니로다

實中知是實(실중지시실) 진실과 적중해야 진실을 알게 될지니

功外莫尋功(공외막심공) 스스로 쌓은 공외에 공을 찾지 마라

 

『松堂先生文集』 卷之一, 詩, 次韻   - 이언적(李彦迪)

有響還難捉(유향환난착) (바람은) 소리가 있어도 잡기 어렵고

無心却礙空(무심각앵공) (구름은) 무심하여도 공중을 덮는다

有無都不累(유무도부루) 있고 없고 가 누가 되지 않으니

純一是眞功(순일시진공) 순수한 그 하나야 말로 참된 공일진데

 

『松堂先生文集』 卷之一, 詩, 次韻  - 박운(朴雲)

源泉流日夜(원천유일야) 샘의 근원은 밤낮으로 흐르는데

淸澈小潭空(청철소담공) 물 맑은 작은 연못 텅 빈 듯하구나

萬象咸來照(만상함래조) 만상이 함께 와서 비추니

方知別有功(방지별유공) 특별한 功이 있음을 알겠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중종실록 34권, 중종(中宗) 13년(1518년) 9월 25일 손주·박영·최명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한 기록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손주(孫澍)를 한성부 좌윤으로, 박영(朴英)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최명창(崔命昌)을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김구(金絿)를 전한(典翰)으로 삼았다.

(以孫澍爲漢城府左尹, 朴英爲承政院同副承旨, 崔命昌爲弘文館直提學, 金絿爲典翰)

 

사신은 논하기를: 박영은 선산(善山) 사람이다. 소시 적에 무예(武藝)를 업으로 삼아 무과에 올랐다. 그리고 유학(儒學)의 서적을 통달하고 낙동강 가에 집을 지어 살며 영화와 복리(福利)를 좋아하지 않았다.

(史臣曰: "英, 善山人。少業武登第, 通儒書, 築室于洛東江上, 不喜榮利)

 

일찍이 남쪽 변방에 장수로 나가서 시를 쓰기를, 외진 남쪽 변방 바닷 기운 침침한데 투구 쓰고 갑옷 입은 *왕손(王孫) 늙어가네 *기린각(麒麟閣)에 이름 오르는 것 마음에 없어 낙동강 강마을에 집이 있도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추천으로 *정원(政院)에 들어왔던 것이다.

(嘗戌南邊, 題詩云: ‘絶域南陲海氣昏, 兜鍪金甲老王孫。無心麟閣題名字, 家在洛東江上村。’至是以推薦入政院)

 

뒤에 병조 참판에 올랐으나 얼마 못 가서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後陛兵曹參判, 未幾罷歸田里)

 

의술(醫術)을 잘 알았는데, 일찍이 약재(藥材)를 사서 쌓아놓고서 사람 살리는 것을 주업으로 삼으니, 병 보러 오는 사람이 집에 가득하였으며 살려준 사람이 매우 많았다.

(妙解醫術, 嘗購蓄藥料, 以活人爲事, 問疾者滿門, 其所全活甚衆)

 

*왕손(王孫) : 송당(松堂) 박영(朴英)이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외손자이므로 이른 말이다.

*기린각(麒麟閣) : 기린각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기린을 잡았을 때에 지은 누각(樓閣). 선제(宣帝) 때에 와서 곽광(霍光)·장안세(張安世) 등 11인의 공신상을 그려서 누각에 걸었다. 여기서는 공명(公名)을 세우는 데에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정원(政院) : 조선시대 왕명의 전달, 어러 가지 사항들을 임금께 보고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정종 2년(1400) 중추원으로 고쳐 도승지 이하의 벼슬을 두었고, 고정 31년(894)에 승선원(承宣院)으로 고쳤다.

 

송당 박영(松堂 朴英 1471 ~ 1540)은 조선전기 강계부사, 동부승지, 내의원제조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이다.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박철손(朴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수종(朴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딸이다. 경북 선산(善山)에서 대대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 막하(幕下)에 있을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 : 조선시대 정예 기병 중심의 친위병)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 :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관직)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大學)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같은 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소환돼서 임명되었으며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그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했는데, 김억제(金億濟)의 모함으로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 임을 적극 주장해 풀려날 수 있었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의술에도 능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松堂集)·경험방(經驗方)·활인신방(活人新方)·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