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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여류시인 황진이 시 별김경원, 영반월(黃眞伊 詩 別金慶元, 詠半月)

황진이(黃眞伊) 조선조 중종 때 개성 출신의 명기(名妓)로서, 본명은 황진(黃眞), 필명은 진이(眞伊),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필명은 진랑(眞娘)으로 중종(1506-1544) 초엽에 태어나 명종(1545-1567) 시대를 무대로 활약한 여류시인이다.

황진이는 송도 양반 황진사의 서녀(庶女)로 출생하였으며, 용모가 아름답고 거문고, 노래, 시예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음. 당대 사람들이 선녀(仙女)라고 불렀음. 그러나 황진이는 후에 송도(松都)의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 된 동기에 대하여도 15세경 이웃 총각이 혼자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전하기도 함.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함.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서민의 딸로 태어나 아름다운 용모와 총명함으로 교방(敎坊)의 동기(童妓)로서 대성하여 시서음률(詩書音律)이 당대의 으뜸이었고 문인, 석유(碩儒)와 교우(交友)하여 그들을 매혹시켰다고 전한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을 위하여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배움에 힘썼으며, 자부심이 강하여 자칭 서화담(徐花潭)·박연폭포(朴淵瀑布)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

10년을 수도한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키고 벽계수(碧溪水)를 시조 한 수로 도취시켰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시는 서정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점이 있는 반면에 냉정한 이지와 청일(淸逸)하고 풍부한 인간미가 담겨 있다.

오늘날 즐겨 부르는 시조 여섯 수와 한시 몇 수가 전하며, 시조 여섯 수에는 그의 한시의 세계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그 작품이 무한한 변화와 풍부한 정감과 사실적인 수법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문학사상 황진이의 위치는 전통적인 민족의 리듬으로 한국 여성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정감과 교방 여성들의 정한(情恨)을 시조와 한시로 묘사·표현한 점에 주목되며, 작품은 기교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하게 애정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가 남긴 시 2수를 자서해 보았다.

 

별김경원(別金慶元 : 김경원과 이별하며)

三世金緣成燕尾(삼세금연성연미) 영원한 굳은 인연 제비 꼬리처럼 갈라지니

此中生死兩心知(차중생사량심지) 이 중에서 살고 죽음을 두 마음만은 알리라

楊州芳約吾無負(양주방약오무부) 양주의 꽃다운 약속 내 어기지 않으려니

恐子還如杜牧之(공자환여두목지) 그대 도리어 *두목지와 같음이 두렵네

 

위 시는 김경원과 이별하면서 지은 시이다. 나와 김경원과는 삼세(三世)의 굳은 인연으로 맺어 금실 좋은 짝이 되었으니, 이 인연으로 살거나 죽을 때까지 서로 헤어질 수 없다. 그런데 양주에서 한 이러한 이별하지 말자는 약속을 나는 어기기 않을 것인데, 그대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데 김경원이 두목지처럼 미남이어서 다른 여인이 유혹할까 두렵다는 뜻으로 김경원은 부운거사로 불린 정도로 풍류를 즐기며 명산대천을 찾아다닌 인물이다. * 두목지(杜牧之)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병법가이자 풍류제일기남(風流第一奇男) 두목(杜牧)으로 字가 목지(牧之)라 두목지라 불린다.

 

영반월(詠半月 : 반달을 읊음)

誰斲崑山玉(수착곤산옥) 누가 곤륜산의 옥을 깎아서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가?

牽牛一去後(견우일거후) 견우가 한번 가버린 뒤에

愁擲碧空虛(수척벽공허) 시름 겨워 벽공에다 던져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