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자 예술가로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 씨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다. 시, 그림, 글씨에 능했던 예술가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상으로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면서 고향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읊은 시 2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思親(사친 :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千里家山萬疊峰(천리가산만첩봉) 천리 먼 고향 만겹 봉우리 저쪽인데
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 돌아가고 싶은 마음 늘 꿈길에 있네
寒松亭畔雙輪月(한송정반쌍륜월) 한송정 가에는 하늘과 물의 두 둥근 달이요
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 경포대 앞에는 시원한 바람 한바탕 불리
沙上白鷗恒聚散(사상백구항취산) 바닷가 모래밭에 갈매기 모였다 흩어지고
波頭漁艇每西東(파두어정매서동) 파도 머리 고깃배 이리저리 오고 가리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 언제 다시 고향 강릉 길 밟고 가
綵舞斑衣膝下縫(채무반의슬하봉) 비단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곁에서 바느질할꼬
읍별자친(泣別慈親 : 어머님을 향하여 흘리는 눈물)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백발의 어머니 강릉(江陵) 땅에 계신데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이 몸만 홀로 서울로 향하는 심정.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머리 돌려 북촌 땅 때때로 한번 씩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 아래로 흐르고 저문 산은 푸르기도 하여라.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 ~ 1551)은 조선 초기에 활동한 여성 서화가로 호는 사임당(思任堂; 師姙堂) · 시임당(媤姙堂) · 임사재(姙師齋)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신명화(申命和)와 용인이씨(龍仁李氏) 사이에서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41세에 진사에 올랐으나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실현에 뜻을 같이해 1519년 기묘사화 이후에는 관계(官界)를 떠나 학문에 뜻을 두었다. 무남독녀로 외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한 모친의 영향으로 학문에 상당한 조예를 이루었다. 1522년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해 4남 3녀의 7남매를 낳았다.
부군인 이원수는 50세가 되어서야 종5품 벼슬인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시작으로 내섬시 · 종부시 · 주부(主簿)에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신사임당은 엄격함과 자애로움, 그리고 당당함을 겸비한 주부로서 집안 대소사에 소홀함이 없었다. 남편은 서울에서 홀로된 모친 홍씨(洪氏)를, 신사임당은 강릉에서 친정어머니를 모셨기에 이들 부부는 근 20년이나 떨어져 살았다.
셋째 아들이 조선 성리학의 거유 이이(李珥)이다. 맏딸 매창(梅窓)과 넷째 아들로 막내인 이우(李瑀)가 그림으로 이름을 남겼다. 신씨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표상이자 교육의 사표(師表)이며 변함없는 존경의 대상으로 알려졌는데, 여러 명사제현들의 문헌에 서화가로서의 명성이 거론되었다. 전래작이 많음은 서화의 전래가 드문 조선 전기로서는 의외의 사항이라 하겠으나 이들 대부분은 전칭작을 면하기 어렵다. 신사임당은 산수 · 영모 · 묵포도 · 초충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뿐 아니라 시문에도 능했으며 글씨도 잘 썼다.
7세 때부터 조선 초 최대 거장으로 근 백년 앞선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고 <산수도>를 그렸다는 아들 율곡 이이의 증언과 산수화에 뛰어났다는 문헌기록이 있으나 이 화목의 전래작은 몹시 드물다. 산수화로는 율곡 이이 종손가에 있는 <산수도> 8폭과 <금강산도>, 그리고 1985년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된 병풍에 있는 산수도 2점 등 11점이 알려져 있다. 특히 후자인 산수도 병풍은 화면에 인장은 없으나 수묵 위주이면서 두 폭 모두 나무 주변에 약간 담황(淡黃)을 칠한 흔적이 있다. 화면의 무게 중심을 각기 좌우 상단에 두고 있으며, 각기 좌우에 3행씩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과 이백(李白)의 5언시를 적었다.
두 폭은 일견 중천(中天)에 만월(滿月)이 있는 야경으로 보이지만, 한 폭은 해질 무렵의 달이며 다른 폭은 저물 무렵의 지는 해임이 이들 시로 해서 비로소 확인되니 둘 다 야경은 아니다. 시 내용에 맞게 서정적인 시적 정취가 짙은 문인화 영역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 두 폭을 연결하면 원경에서 시작해 근경으로, 그리고 다시 원경으로 마무리되는 남송대 이후 흔히 볼 수 있는 일반화된 두루마리의 구도를 보여준다. 바위와 토파의 묘사에서 보이는 강한 묵선과 흑백대조, 그리고 고목의 줄기나 가지에서 보이는 거친 듯 짧은 필선에서 조선시대 중기를 풍미한 절파계(浙派系) 화풍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래작으로는 초충도(草蟲圖)가 많은데, 집에서 재배하는 양귀비 · 맨드라미 · 꽈리 등 풀꽃, 가지 · 오이 · 수박 등 채소, 벌 · 나비 · 매미 · 잠자리 · 개미 · 쇠똥구리 · 메뚜기 등 곤충, 도마뱀 · 들쥐 · 개구리 등이 등장한다.
영모화(翎毛畵 : 새와 짐승 등을 소재로 그린 그림)는 조선 중기 화단에 크게 유행한 이른바 수묵 위주의 사계영모도(四季翎毛圖) 계열이어서 유행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월림세전유묵(月林世傳遺墨)》에 있는 두 <수금도(水禽圖)>나 율곡 종가 소장으로 알려진 <물새>는 물가에 새 한 마리만을 등장시킨 소품들로 사계영모의 하경에 주로 등장되는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경윤의 《낙파연주첩(駱破聯珠帖)》 내에도 들어 있는 친숙하고 흔한 소재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노연도(鷺蓮圖)>, <노안도(蘆雁圖)>, <요안구압도(蓼雁鳩鴨圖)> 및 개인 소장의 <원앙도(鴛鴦圖)> 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 모두 소폭들로, 수금(水禽)을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설채(設彩 : 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함)와 수묵 두 부류인 점에서 구별된다.
묵포도(墨葡萄)는 조선에서 이 소재의 정형을 이룩한 황집중(黃執中)과 양식상 공통점과 친연성이 있고 18세기 대수장가 김광국이 모은 《석농화원(石農畵苑)》 화첩에 수록된 작품과 이병연(李秉淵)의 제시가 첨부된 간송미술관 · 삼성미술관리움에 있는 2점이 대표적이다.
간송미술관 <신씨어하도(申氏魚鰕圖)> 또는 <황쏘가리> 혹은 좌측에 2행에 걸친 제발로 <자리도(紫鯉圖)>로 불리는 어해도는 조선 후기나 말기의 이 소재와는 구별을 보이며 송(宋) 이후의 <조어도(藻魚圖)> 계열이다. 15~16세기 분청사기에 철화로 그리거나 인화문(印花文)으로 나타낸 쏘가리의 예가 없는 바는 아니나 어해도(魚蟹圖)의 흐름에서도 앞부분을 점한다.
신사임당의 유작은 수량도 많고 소재도 다양해서 서화의 전래가 드문 조선 전기로서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특히 초충도와 묵포도 분야에서 고유색 짙은 화풍의 형성과 창출로 그 역할이 두드러진다. 이에 16세기 전반의 화단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분명한 위상을 지니며 후대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16세기 전반에는 명대(明代) 중기의 초서풍이 수용되어 유행하였다. 김구(金絿)로부터 시작하여 김인후(金麟厚) · 양사언(楊士彦) · 황기로(黃耆老)로 이어지는 초서풍은 명(明) 장필(張弼)을 수용하여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운필을 구사하거나 당(唐) 회소(懷素)를 바탕으로 독특한 일격(逸格)을 이룬 서풍으로, 광초(狂草)에 가까운 거침없는 필법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계열과는 달리 깔끔한 필획으로 단아한 작풍을 보인 또 다른 계열의 초서풍이 유행되었는데, 그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여성 명필 신사임당이다.
현재 신사임당의 필적은 진적(眞跡)이 없이 다수의 전칭작(傳稱作 : 명확하지 않으나 작가가 추정되는 작품)이 전하며, 이들 전칭작은 대부분 초서이다. 이 가운데 가장 신빙이 가는 필적은 <초서 당시오절(唐詩五絶)> 6수로 강릉시 오죽헌 · 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필적은 8폭 병풍으로 장황되어 있는데, 1~6폭에는 각기 당수 1수씩 쓰여있고, 7폭에는 강원도 관찰사 이형규(李亨逵)의 1774년 발문, 8폭에는 강원도지사 이용(李龍)의 1963년 발문과 이은상(鷺山 李殷相)의 1971년 발문이 각각 들어 있다. 이 밖에 대전선사박물관 소장의 <초서 당시오절> 8수, 개인 소장의 <초서 당시오절> 5수는 <초서 당시오절> 6수와 더불어 동일한 시가 3수 실려 있어 신사임당의 초서풍을 살필 수 있는 대표적 필적이다.
<초서 당시오절(唐詩五絶)> 6수는 운필이 명료하여 점획과 자형을 살피기에 충분하다. 특히 붓을 대는 기필(起筆)에서 붓을 명확하게 댄 후 적절한 속도로 단정하게 운필하였으며, 붓을 거두는 수필(收筆)에서는 깔끔하게 삐치거나 가볍게 떼었다. 또한 글자마다 중심이 되는 세로획과 가로획을 해서처럼 곧고 반듯하게 그은 뒤 나머지 획을 부드럽고 동그란 곡선으로 처리하여 방필(方筆)과 원필(圓筆)의 조화를 이룬 점도 돋보인다. 이처럼 <초서 당시오절> 6수는 초서의 자형을 취했으면서도 점획이 해서처럼 매우 간정(簡淨)하고 자형이 명료하며 짜임이 단아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차분한 풍격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아들 이우(李瑀) 및 한 세대 뒤인 백광훈(白光勳) · 백진남(白振南) 부자의 필적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17세기 초에 활동했던 초서 명필들의 글씨에서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독특한 풍격을 갖춘 신사임당의 초서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지는 이를 설명해주는 문헌이 전무한 관계로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다. 과장된 획이 없이 전아(典雅)한 필법을 구사하였다는 점에서 왕희지 고법에 뿌리를 두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점획이 간정하고 짜임이 단정하며 원필과 방필을 조화롭게 구사한 점은 역대 어느 서가의 글씨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요소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사임당은 고법을 바탕으로 16세기 초서풍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초서 명가라 할 수 있다. 현전하는 진적이 없어 그의 초서풍의 원류를 규명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는데, 이러한 부분은 아들 이우 및 백광훈 부자의 필적 등과의 비교를 통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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