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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만해 한용운 한시 몇 수(卍海 韓龍雲 漢詩 몇 首)

만해 한용운 (卍海 韓龍雲 1879∼1944)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홍성(洪城) 출생. 1905년 인제(麟蹄)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 법을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고 문학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그의 시풍은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하였으며, 은유법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하였다. 주요 작품·저서로 《박명(薄命)》 《흑풍》, 시집 《님의 침묵》 및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에 대해선 앞서 오도송, 춘주 등을 통해 간단하게 소개한 바 있다. 만해가 남긴 한시 몇 수를 통해 잔잔하게 스며드는 내면적 깊이를 느껴보고자 한다.

 

自京歸五歲庵贈朴漢永(자경귀오세암증박한영 : 오세암에 와서 박한영에게 주다)

一天明月君何在(일천명월군하재) 하늘에 밝은 달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滿地丹楓我獨來(만지단풍아독래) 단풍 가득 쌓인 길 나 홀로 돌아왔네

明月丹楓共相忘(명월단풍공상망) 밝은 달 붉은 단풍 공히 서로 잊었는데

唯有我心共徘徊(유유아심공배회) 오직 내 마음은 그대와 함께 배회 하노라

 

當代 學僧이신 박한영(朴漢永)의 본명은 정호(鼎鎬), 호는 석전(石顚)이며, 후일 당호(堂號)를 영호(映瑚)라 하였다. 한영(漢永)은 자(子)이다. 만해보다 9살 연상으로 1870년 전북 완주군 출생으로 1948년 내장사에서 법랍 60세, 세수 79세로 입적했다. 스님은 조계종 초대 교정을 지냈으며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합류하지는 못했으나 3.1 운동 이후 한성 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과 전북 대표를 맡기도 했다. 조선민족대동단에 합류해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행적뿐 아니라 한용운 스님 등과 함께 일제에 항거하며 불교 유신을 역설했다.

독립운동가와 불교지도자로서 스님의 행적 말고 눈에 띄는 것은 교육가이자 문학가로서의 선구적 역할이다.

석전 스님이 길러낸 문학가의 면면은 실로 눈부시기까지 하다. 만해 한용운,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 조지훈, 김달진을 비롯해 전북 출신의 이병기, 서정주, 신석정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한마디로 한국 근현대문학의 산파 역할을 했던 것이다.

석전 스님에 대해 당대를 대표했던 문학가들의 평을 엿보면 스님의 인품과 학식 그리고 그가 이들에게 끼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만해는 서울서 박한영 스님을 만나고 오세암으로 돌아와서 붉게 물든 단풍을 같이 감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각별했던 정을 시로 표현해서 부친 것이다.

 

思鄕(사향 : 고향생각)

歲暮寒窓方夜永(세모한창방야영) 한 해 저문 차가운 창가에 밤은 길어

低頭不寐幾驚魂(저두부매기경혼) 잠 못 들어 뒤척이며 몇 번을 깨니

抹雲淡月成孤夢(말운담월성고몽) 구름 걸린 고요한 달 외로운 꿈 꾸며

不向滄洲向故園(불향창주향고원) *창주 아닌 고향으로 마음은 달리네

*창주(滄洲 : 깊은 바닷속 신선이 사는 이상향의 세계)

 

別玩豪學士(별완호학사 : 완호 학사와 헤어지며)

萍水蕭蕭不禁別(평수소소불금별) 떠도는 수류 인생이지만 이별은 있어

送君今日又黃花(송군금일우황화) 그대를 보내는 날 국화는 만발하였네

依舊驛亭惆悵在(의구역정조장재) 슬픔 남아있는 역사(驛舍)는 텅 비어 예와 같고

天涯秋聲自相多(천애추성자상다) 하늘가 가을 소리 못내 쓸쓸하여라.

 

卽事(즉사 : 즉시 읊음)

烏雲散盡孤月橫(오운산진고월횡) 먹구름 걷히고 외로운 달 비추니

遠樹寒光歷歷生(원수한광력력생) 멀리 나무 사이로 찬 빛이 생생하고

空山鶴去今無夢(공산학거금무몽) 학이 날아간 빈 산 꿈 마저 없는데

殘雪人歸夜有聲(잔설인귀야유성) 깊은 밤 누군가 잔설 밟고 가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