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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분매(盆梅) 관련 한시 2수 : 이명한 영분매(李明漢 詠盆梅), 홍주화 분매(洪胄華 盆梅)

분재(盆栽)는 화분에 나무나 화초를 심어서 사람의 시각에 맞추어 줄기와 가지를 다듬어 작게 가꾼 나무나 화초를 말한다.

나무를 축소해서 고목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분재의 소재는 나무 형체가 작고 잎이 작고 가늘고 잎, 줄기, 가지, 수피, 뿌리의 모양이 매력이 있어야 되며, 4계절 관상이 가능하고 수명이 오래 가야 분재로서 가치가 있다.

40여 년 전 우리나라에 분재의 붐이 일어났지만 지금은 시들한 느낌이다. 분재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형(樹形)을 잡기 위하여 가지에 철사를 감거나 뿌리, 줄기를 잘라서 기형을 만들기 때문에 식물학대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미 조선시대에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은 분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고문하는 것으로 표현했으며, 지금도 아름다운 분재를 '쇠줄에 묶인 개'라고 표현하여 자연스럽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경우도 많다. 과거에 비하여 분재에 대한 관심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간 축적된 재배기술로 명품분재가 지속적으로 탄생하고 있다.

퇴계선생(退溪先生)도 매화를 사랑하여 숨을 거두기 전 분매(盆梅)에 물을 주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분재에 대한 사진은 국립세종수목원에서 소개한 바 있다. : 국립세종수목원 (tistory.com)

 

내가 가꾸는 텃밭에도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진한 매화향기를 뿜어내며 벌을 불러드린다. 바야흐로 봄의 절정으로 치닫는 이맘때 분매(盆梅) 관련 백주 이명한(白洲 李明漢)의 영분매(詠盆梅), 만은 홍주화 (晩隱 洪胄華)의  한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분매(詠盆梅 : 화분의 매화를 노래하다)   - 이명한(李明漢)

雪裏花猶發(설리화유발) 눈 속에서도 꽃은 피고

春來葉尙寒(춘래엽상한) 봄이 왔건만 잎은 차네.

豈無燈下影(기무등하영) 어찌 비춰 볼 등불 없어서랴

宜向月中看(의향월중간) 달빛 속에서 보고 싶어서라네.

 

백주 이명한(白洲 李明漢. 1595 ~ 1645)은 조선 후기에, 대사헌,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이다. 증 영의정 이순장(李順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삼등현령(三登縣令) 이계(李𡹘)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 증광문과(增廣文科 :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式年試 이외에 실시된 비정기 과거)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 · 전적 ·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이르렀다. 앞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 교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조좌랑이 되어 어사로 관동(關東)에 나가 서리들의 정치와 백성들의 폐해를 살폈다. 다시 옥당(玉堂)에서 근무하다가 이조로 옮겨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곳에서 승문원제술관(承文院製述官) · 한학교수(漢學敎授) · 교리 · 사국수찬(史局修撰) 등을 겸대하다가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모시고 가서 이식(李植)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 · 사간에 승진된 뒤 검상(檢詳) · 사인(舍人) · 집의 ·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승진했다. 다시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호당에 들어갔고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가 되었다.

그 뒤 병조참의 · 우승지 · 형조참의 · 좌승지 · 남양부사 · 대사간 · 대사성 ·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39년(인조 17)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 · 대사헌이 되었다.

이 해 도승지로서 홍문관 · 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3년 이경여(李敬輿) · 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척화파(斥和派)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해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아버지 이정구, 아들 이일상(李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白洲集)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분매(盆梅 : 화분의 매화)   - 홍주화(洪胄華)

小屋藏春色(소옥장춘색) 작은 집에도 봄빛은 서려있어

吟詩到夜深(음시도야심) 시를 읊다 밤이 깊었네.

一枝燈下影(일지등하영) 등불 아래 드리워진 매화 그림자

能識主人心(능식주인심) 능히 주인 마음 알아 주네.

 

만은 홍주화(晩隱 洪胄華, 1660~1718) 조선 후기의 효자로 알려진 문인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군실(君實), 호는 만은(晩隱)이다. 홍일운(洪一運)의 아들이며 홍석무(洪錫武)의 손자이다.

부모가 여러 해 된 이질로 누워 계신 가운데, 그는 십리쯤 떨어져 살았으므로 문병차 밤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늘 범이 길을 인도하여 주었다고 한다. 부모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려서 구했으며, 부모 사망 후 묘소 앞의 여막(廬幕)에서 삼년 상을 치르고 있을 때, 맑은 샘물이 저절로 솟아 나왔고 여막(廬幕) 곁에서 흰 기운이 하늘에 뻗쳤으며, 눈이 많이 쌓인 때에도 무덤과 왕래하는 길에는 눈  한점 쌓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상함에 놀랐다고 한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숙종(肅宗) 초 송시열이 유배되자 스승의 명으로 그의 서적을 보관했고, 1689년(숙종 15) 을사환국(乙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박세휘(朴世輝)·한성우(韓聖佑) 등과 백인소(百人疏)를 올려 스승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 그 후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권상하(權尙夏)가 송시열의 유명(遺命)으로 만동묘(萬東廟)를 세울 때 이를 보좌하였다. 지평(持平)에 증직(贈職)되었다.

저서로 만은유고(晩隱遺稿)가 있으며,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에 그의 충효 정문(旌門)이 있다.

 

(텃밭 주변에 핀 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