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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부설거사 사부시(浮雪居士 四浮詩)

겨울 비 내린 뒤 갑자기 한파가 찾아왔다. 꽃피고 새우는 춘삼월이 어제 같은데 벌써 세모의 정이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고인이 말하기를 인생은 허무하고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다고 한다. 이에 걸맞는 시가 부설(浮雪)거사의 사부시(四浮詩)다. 이 시는 우리네 삶의 실상을 보여주고 한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깊고 넓고 높은 함축된 법문이다. 특히 불가에게는 왜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지, 수행의 구경(究竟)목표는 어디에 있는지를 일러주는 사부시를 흑지(黑紙)에 금니(金泥)로 자서해 보았다.
소해(小楷)의 묘미(妙味)는 중국 남송(南宋)의 서가(書家) 장즉지(張卽之), 당인(唐人) 종소경(鍾紹京)이 대표적인데 독창성을 갖춘 글씨로그들이 남긴 사경을 통해서 새로운 묘미를 느껴보기에 충분하다. 지금은 기존 구체(歐體), 안체(顔體)의 틀에 박힌 사자관체(寫字官體) 형식의 소해는 금방 실증을 느끼게 된다. 사견이지만 현존 작가로 해서(楷書)의 경지를 이룬 방홍의(房弘毅. 1955~ )는  구체(歐體)를 기반으로 고법(古法)을 두루 섭렵(涉獵)하여 독창적 서체를 구사하고 있는 중국인으로 현재 일본에 머물면서 왕성한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소해(小楷)는 볼펜 쓰듯이 집중하여 자주 쓰다보면 익숙해 지기 마련인데 몇 년 만에 세필을 잡다보니 눈도 침침하여 뜻대로 되지 않는다.

浮雪居士 四浮詩(부설거사 사부시)  

妻子眷屬森如竹(처자권속삼여죽) 처자와 권속들이 삼대같이 수가 많고
金銀玉帛積似邱(금은옥백적사구) 금과 은, 옥과 비단 산처럼 쌓였어도
臨終獨自孤魂逝(임종독자고혼서) 죽음에 이르면 내 한 몸만 홀로 가니
思量也是虛浮浮(사량야시허부부) 이것을 생각하면 허망하고 덧없도다

朝朝役役紅塵路(조조역역홍진로) 날마다 힘을 다해 먼지 나는 길을 달려
爵位纔高已白頭(작위재고이백두) 벼슬 조금 높아지자 머리털이 희어졌네
閻王不怕佩金魚(염왕불파패금어) 명부의 염라왕이 금어 관대 두려워하랴
思量也是虛浮浮(사량야시허부부) 이것도 생각하면 허망하고 덧없도다

錦心繡口風雷舌(금심수구풍뢰설) 비단결 같은 화려한 마음 수단, 좋은 말솜씨로
千首詩輕萬戶候(천수시경만호후) 천 편 시와 문장으로 만호 벼슬 비웃어도
增長多生人我本(증장다생인아본) 다생토록 너다 나다 잘난 자랑만 길러 놨네
思量也是虛浮浮(사랭야시허부부) 이것도 생각하면 허망하고 덧없도다

假使說法如雲雨(가사설법여운우) 입으로 구름 덮듯 비 내리듯 설법하여
感得天花石點頭(감득천화석점두) 하늘에서 꽃비내리고 돌 사람이 끄덕여도
乾慧未能免生死(건혜미능면생사) 아는 것만으로는 생사고를 못 면하네
思量也是虛浮浮(사량야시허부부) 이것도 생각하면 허망하고 덧없도다

부설거사(浮雪居士)는 삼국 신라시대 널리 알려진 승려로 우리 나라 대표적인 거사(居士)이다. 성은 진씨(陳氏), 이름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 경상북도 경주 출신. 신라 선덕여왕 때 태어났으며, 어려서 출가하여 경주불국사에서 원정(圓淨)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영희(靈熙), 영조(靈照) 등과 함께 지리산·천관산(天冠山), 능가산(楞伽山) 등지에서 수 년 동안 수도하다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순례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들판이 있는 두릉(杜陵)의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집에 있는 18세의 딸 묘화(妙花)는 나면서부터 벙어리였으나 부설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열렸으며, 그 때부터 부설을 사모하여 함께 살고자 하였다. 부설이 승려의 본분을 들어 이를 거절하자 묘화는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에 부설은 ‘모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인연따라 제도하는 것’이라 하여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15년을 살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은 뒤 아이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별당을 지어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영희와 영조가 부설을 찾아왔을 때 세 사람은 서로의 도력을 시험하였다. 질그릇 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서 대들보에 달아두고 병을 돌로 쳐서 물이 흘러내리는지 아닌지로 도력을 가늠하기로 하였다.
영희도 영조도 병을 돌로 치자 물이 흘러내렸지만 부설이 그 병을 치자 병은 깨어졌으나 물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부설은 참된 법신에 생사(生死)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설법을 한 뒤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入寂)하였다.
영희와 영조가 다비(茶毘)하여 사리를 변산 묘적봉(妙寂峰) 남쪽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은 그 때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으며, 부인 묘화는 110세까지 살다가 죽기 전에 집을 보시하여 절을 만들었다. 이 전기(傳記)는 조선 후기에 편찬한 영허대사집(暎虛大師集) 속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