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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가정 이곡(稼亭 李穀) 국화 관련 한시 2수 : 십일국(十日菊), 황화주(黃花酒)

이맘때쯤 도심을 벗어나면 도로가 낮은 언덕이나 야산에는 어김없이 노랗게 핀 국화꽃을 보게 된다. 산에서 핀다고 하여 산국(山菊)이라 하는데 코 끝에 스치는 향기가 진하고 오래갈 뿐만 아니라 색도 곱다. 몇 가지 꺾어 물컵에 담가 놓으면 시들 때까지 은은한 향기와 함께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가 근무하고 세종현장 주변에도 산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늘 책상 위에 산국의 향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다.
산국은 들국화의 한 종류로서 개국화라고도 하며 주로 산지에서 자란다. 높이 약 1m로 뿌리줄기는 길게 벋으며 줄기는 모여나고 곧추선다. 흰 털이 나며 가지가 많이 갈라진다. 뿌리에 달린 잎은 꽃이 필 때 마른다. 줄기에 달린 잎은 어긋나고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톱니가 있다.
또한 산국은 국화차의 원료로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 꽃은 진정, 해독 등의 효능이 있어 두통과 어지럼증에 사용하며, 말려서 베겟속에 넣어두면 머리도 맑아지고 숙면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원진 국화(元稹 菊花) 시에서도 此花開盡更無花(차화개진갱무화 : 이 꽃이 다 지고 나면 다른 꽃 볼일 없다)라고 했으며, 노란 국화를 사랑한 당나라의 황소(黃巢 835 ~ 884)의 시 중 我花開後百花殺(아화개후백화살 : 내 꽃(국화) 피고 나면 모든 꽃은 시든다)고 하였다.
이처럼 국화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꽃이기에 깊어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가정 이곡(稼亭 李穀) 선생의 국화관련 한시 2수를 자서와 함께 올려보았다.
 
십일국(十日菊 : 중양절 다음날 국화를 보며..)

中秋十六夜(중추십육야) 중추절도 열 엿새 밤
月色更輝輝(월색경휘휘) 달빛 더욱 밝은데,
重陽十日菊(중양시빌국) 중양절 하루 지난 오늘의 국화꽃은
餘香故依依(여향고의의) 그 향기 여전히 은은하여라
世俗尙雷同(세속상뇌동) 세속은 유행에 부화뇌동하여
時過非所希(시과비소희) 명절만 지나면 관심도 없지만
獨憐此粲者(독련차찬자) 나는 유독 가련한 이 꽃을 사랑하노니
晩節莫我違(만절막아위) 만년의 절조지킴이 내 마음에 꼭 들어
臨風欲三嗅(임풍욕삼후) 바람결에 몇 번이나 향내 맡고 싶지만
又恐旁人非(우공방인비) 주위의 사람이 흉볼까 은근히 겁이 나네
不如泛美酒(불여범미주) 맛있는 술로 흠뻑 취하는 것보다는
昏昏到夕暉(혼혼도석희) 황혼 녘까지 국화 향기와 함께하리라
 
황화주(黃花酒 : 국화주)

九日黃花酒(구일황화주) 오늘은 9월9일 중양절 국화주를 마시니
高堂白髮親(고당백발친) 고당에 계시는 백발의 모친 그리워라.
遠遊空悵望(원유공창망) 변방에서 떠도는 몸 괜히 서글퍼지고
薄宦且因循(박환차인순) 말단 벼슬에 얽매여 다시 떠도는 신세라네.
秋雨荒三逕(추후황삼경) 가을비 삼거리에 쓸쓸히 내리니
京塵漲四隣(경진창사린) 조정의 탐관(貪官)들은 사방에 가득 차
登高猶未暇(등고유미가) 높은 벼슬에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極目恐傷神(극목공상신) 보이는 현실에 마음 상할까 두려움이 앞서네.
 
위 시는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시며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과 쇠망으로 향하는 귀족정치로 인한 폐단을 여러 시로 표현하였다.
 
가정 이곡(稼亭 李穀. 1298 ~1351)은 고려말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한산(韓山 : 충남 서천).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 ·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 · 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 · 충선 · 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 하였다. 한때는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假傳體文學)으로 대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 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변에 핀 국화과 꽃)

황국

 

산국 군락
산국
금불초
쑥부쟁이
과꽃
야콘꽃
털별꽃아재비
청화쑥부쟁이
수레국화
씀바귀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