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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모당 손처눌 신세음(慕堂 孫處訥 新歲吟)

10여 년 전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가 높았던 적이 있다.

관심의 출발점은 21세기 혁신의 아이콘이라 평가받는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소크라테스와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내놓을 수 있다. 애플을 애플답게 하는 것은 인문학과 IT기술의 결합이다”라고 설파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잡스의 말은 IT 기반의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으며 인문학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문학은 무엇인가?

인문학(人文學)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로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思辨的)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한다.

즉 인간의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성찰하고 그것을 탁월함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많은 분들이 인문학을 문학, 역사, 철학의 지식 체계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인문학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도덕적 판단력을 길러야 하며 쓰고 읽는 능력을 향상하는 것이다.

즉 내면세계 성찰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며, 창조적인 삶과 멋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과 성향의 집단에 인문학 성향의 한 사람이 있을 때 경직된 조직을 활성화 시킬 뿐만 아니라 사고의 발상을 높이며,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조직으로 변하며 건강한 집단의 생태계가 유지된다고 한다.

 

역사를 통해 선조들이 남긴 흔적을 찾아 탐구하는 것 또한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는데 의미가 있으리라.

 

모당(慕堂)선생의 시 신세음(新歲吟)을 살펴보며 곧 다가올 설날의 의미를 느껴보고자 예서체(隸書體)로 자서해 보았다.

 

신세음(新歲吟 : 새해에 읊다)

迎新除舊歲(영신제구세) 묵은해를 보내고 또 새해 맞으니

天道日乾乾(천도일건건) 하늘의 도 날로 힘써 쉬지를 않네

更合修新德(경합수신덕) 새로운 덕 다시금 또 닦아야 하고

端宜改舊愆(단의개구연) 예전 허물 다시금 또 고쳐야 하네

微陽須靜養(미양수정양) 미약한 양기 고요히 잘 길러야 하고

善思豈因遷(선사기인천) 착한 생각 쇠해지게 해선 안 되네

莫恨年華晩(막한년화만) 나이 이미 다 늙었다 한탄치 말라

作詩九十年(작시구십년) 아흔 살에 시를 지은 사람 있다네.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 1553~1634)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손순무(孫荀茂), 증조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손세경(孫世經), 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손치운(孫致雲),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이탄(李坦)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이원경(李遠慶)의 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조응의(曺應義)의 딸 하성조씨(夏城曺氏)이다. 손첨(孫添), 손잠(孫潛), 손침(孫沉)의 아들 셋을 두었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태어났으며,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태암(苔巖) 이주(李輈) 등 지역 인사들과의 대구 팔공창의회맹(八公倡義會盟)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정사철과 서사원이 부모상을 당하자, 손처눌이 의병장과 소모관(召募官 : 조선시대, 병란에 대응하기 위하여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항일 의병 모집 역할을 수행하던 관직)을 겸직하였다. 그가 의병을 이끌고 달성군, 동화사, 팔조령 등지에서 매복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손처눌 역시 부모상으로 의병 활동을 중단하고 아우 오매정(五梅亭) 손처약(孫處約)에게 군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1597년 9월 왜적이 다시 대구를 공격하자 팔조령(八助嶺)에 의병 부대를 매복하게 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 황청동(黃淸洞 : 지금의 대구 수성구 황금동)의 부모 묘소 아래에 영모당(永慕堂)을 짓고 본격적인 강학을 시작하였다. 영모당(永慕堂)에서 길러낸 제자 가운데 ‘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諸子錄)’에 기록된 사람만 202명에 달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과 이황의 문묘종사론(文廟從祀論)을 정인홍(鄭仁弘)이 논척(論斥 : 옳고 그름을 따져 물리침)하자, 이에 대항하여 5촌 숙부인 손린(孫遴)과 함께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지어 비판하였다.

 

저서로는 『한강예설중찬(寒岡禮說重纂)』, 『가례의절전서(家禮儀節傳書)』 및 『모당집(慕堂集)』 3권 2 책이 있다. 『모당집』은 1784년(정조 8) 후손 손양겸(孫養謙)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광정(李光靖)의 서문이 있다.

1694년 청호서원(靑湖書院) 창건 시 배향되었다. 1970년 밀양의 혜산서원(惠山書院)에 복향(復享)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