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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매화 관련 한시 4수(梅花 關聯 漢詩 4首)

한 낮 기온이 20도 가까이 오르내리는 완연한 봄 날씨다. 산과 들에는 울긋불긋 진달래가 붉음을 더하고 동내는 개나리가 노란빛으로 담장을 물들였다. 특용작물을 시험 재배하고 있는 주말농장 작은 텃밭에도 완연한 봄이 왔음을 알려주기에 바야흐로 거름 뿌리고 밭갈이해야 하는 농부의 마음을 재촉하고 있다.

오늘 새벽 밭에 오르는 길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나를 불러 향기를 선물하기에 보답으로 매화 관련 한시 4수를 자서와 함께 사진을 올려보고자 한다. 매화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지기에 황금 같은 하루하루의 귀한 시간이 더디 가기를 갈망해 본다.

 

  • 其 一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1503) 조선 전기 경남 함양군수를 지낸 분관으로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조위는 1472년(성종 3) 생원진사시에 입격(入格)[시험에 뽑힘]하고 1474년 식년 문과의 병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다. 1484년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1490년까지 함양군수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표리(表裏:임금이 신하에게 내리거나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던 옷의 겉감과 안감), 녹피(鹿皮) 등을 상으로 받았다.

1495년 그가 친필로 새기고 찬한 어머니 묘지명(貞夫人文化柳氏墓誌銘誌石)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로 지정되어 있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무오사화의 계기가 된 매형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편찬하였다는 이유로 유배되어 1503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매계집(梅溪集)이 있으며, 조계문묘비(曺繼門墓碑)를 지었다. 전라남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우리나라 유배 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다. 조위는 매계총화(梅溪叢話)를 정리하는 등 유배 중에도 저술 활동을 계속하다가 사망하였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對梅夜讀周易(대매야독주역 : 매화를 마주하고 밤에 주역을 읽다)   - 조위(曺偉)

夜靜人閑獨閉門(야정인한독폐문) 고요한 밤 한가로워 홀로 문 닫아걸고

伴燈看易對幽軒(반등간역대유헌) 등불 벗 삼아 주역 보며 그윽한 동헌 창과 마주하네.

讀來不覺梅花落(독래불각매화락) 독서에 매화 꽃잎 지는 줄 몰랐더니

飛撲床頭點素痕(비막상두점소흔) 책상머리에 날아들어 하얀 흔적 한 점 남기네.

 

  • 其 二

월암 이광려(月巖 李匡呂, 1720년 ~ 1783년)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며 실학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 칠탄(七灘)이다.

그는 인품도 훌륭했고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또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광려의 문장에 대해서 이만수(李晩秀)는 “국조(國朝) 300년의 문교를 받아 이광려 선생을 낳았다.”라고 하며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은 그의 문인(門人)에게 그대로 전해져 신대우(申大羽)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한편, 그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당시의 시대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책을 통하여 고구마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1763년(영조 39)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曮)이 대마도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오자 곧 재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시도는 당시 동래부사(東萊府使)였던 강필리(姜必履)에게 자극을 주어 고구마 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한 밑바탕이 됐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 길이 없으나 같은 시대에 살았던 문인들의 평가를 통해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서로는 이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매)      -이광려(李匡呂)

滿戶影交脩竹枝(만호영교수죽지) 대나무 그림자 길게 드리워 집안에 가득 차고

夜分南閣月生時(야분남각월생시) 밤 깊어 남쪽 사랑에 달이 떠오를 때

此身定與香全化(차신정여향전화) 이 몸 정녕 그 향기에 흠뻑 젖어

嗅逼梅花寂不知(후핍매화적부지) 매화에 다가가 향기 맡아도 알 수가 없네

 

  • 其 三

대산 김매순(臺山 金邁淳)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이다.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사인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그 뒤 예조참판을 거쳐 1821년(순조 21) 강화부유수(江華副留守)를 역임하였다.

 

김매순은 당대의 문장가로 홍석주(洪奭周) 등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또한, 성리설에 관하여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에 이간(李柬)과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고종 때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대산집(臺山集)·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주자대전차문목표보(朱子大全箚目問標補), 궐여산필(闕餘散筆),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등이 있다.

 

觸目偶成(촉목우성 : 눈에 들어온 것을 우연이 읊음)   - 김매순(金邁淳)

簿領如雲掃更堆(부령여운소갱퇴) 구름같이 쌓인 문서 처리하면 또 쌓이니

不知春色暗中催(부지춘색암중최) 봄기운 모르는 새 지나감도 몰랐구나

今朝始上東樓望(금조시상동루망) 오늘 아침 처음으로 동루에 올라보니

開遍墻陰一樹梅(개편장음일수매) 담장 아래 한 그루 매화 흐드러지게 피었네

 

  • 其 四

육유(陸遊 1125~1210) 중국 남송시대 대표적 우국 시인으로 그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12세에 시문을 지었고, 25세에는 당시 애국 사상 시인이었던 증기에게서 시를 배웠다. 육유는 시어가 매끄러우며 문장 구조가 깔끔하고 단정했다. 시와 사(詞) 뿐만 아니라 산문에도 능했고, 사학(史學)에 대한 조예 또한 깊었다.

32살부터 85살까지 50년 동안 시를 써 현존하는 시는 10,000수에 가까우며, 중국의 역대 시인들 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다. 또한 그의 문학은 호탕한 기개, 혹은 좌절해 침울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최고 특색은 당나라 시풍의 강렬한 서정을 부흥시킨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렬한 시만 쓰지 않고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전원생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한적한 시도 짓는 등 매우 폭넓은 시를 썼다.

그는 금에 대한 항전과 잃어버린 땅의 회복을 주장하며 살았던 시인이며, 이런 그의 강인한 투쟁의식은 그의 수많은 우국 시를 통해 표출되었고 이로 인해 육유는 오늘날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우국 시인(憂國詩人)으로도 추앙받고 있다.

저서로 검남시고(劍南詩稿), 위남문집(渭南文集), 남당서(南唐書) 등이 있고 만년에는 효종 · 광종의 실록 및 삼조사(三祖史)를 완성하였다.

 

探梅(탐매 : 매화를 찾아)  - 육유(陸游)

江路雲低糝玉塵(강로운저삼옥진) 강변로에 구름 내리고 옥 먼지 날리는데

暗香初探一枝新(암향초탐일지신) 은은한 향 찾아가니 한 가지에 새롭게 피었네

平生不喜凡桃李(평생불희범도리) 평생토록 복사꽃, 오얏꽃 기뻐하지 않았건만

看了梅花睡過春(간료매화수과춘) 매화꽃을 본 후로 졸면서 봄을 지나노라...

 

(텃밭 주변에 곱게에 핀 매화)

(만개한 진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