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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가재 김창업 풍계야봉사경(稼齋 金昌業 風溪夜逢士敬)

가재 김창업(稼齋 金昌業, 1658~172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또는 노가재(老稼齋). 17세기에 활약한 노론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인 김수항(金壽恒)의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 형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특히 시에 뛰어나 후에 김만중(金萬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681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송계(東郊松溪 : 지금의 성북구 장위동)에 은거하였다. 1689년에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나자 포천에 있는 영평산(永平山) 속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1694년 정국이 노론파(老論派)에 유리하게 되자 다시 송계로 나왔다. 이때 나라에서 내시교관(內侍敎官)이라는 벼슬자리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응하지 않았고 스스로 노가재라 부르며 세상일을 멀리하였다. 그리고 향리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

1712년 연행정사(燕行正使)인 김창집(金昌集)을 따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때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을 펴내었다. 이 책은 중국의 산천과 풍속, 문물제도와 이때 만난 중국의 유생, 도류(道流 : 도교를 믿고 그 도를 닦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책으로 손꼽힌다. 또한 그림솜씨가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서자인 김윤겸(金允謙)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에 유행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소개하고자 하는 그의 시 풍교야봉사경(風溪夜逢士敬)은 동갑 이자 친구인 *사경 김시보를 만나기 전 해질 무렵 주변 풍경을 서정적으로 운치 있게 표현한 시를 예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풍계야봉사경(風溪夜逢士敬 : 풍계에서 밤에 사경(士敬)을 만나다)

靑林坐來暝(청림좌래명) 푸른 숲 속에 앉아 있으니 어둠이 내려와

獨自對蒼峰(독자대창봉) 홀로 푸른 산봉우리 마주 대하하고 있네

先君一片月(선군일편월) 그대보다 먼저 찾아온 한 조각달이

來掛檻前松(래괘함전송) 난간 앞 소나무에 걸려 있도다

 

*사경 김시보(士敬 金時保. 1658~173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모주(茅洲)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아가 공조좌랑(工曹佐郞)·무주부사(茂朱府使)고성군수(高城郡守) 등을 거쳐 도정(都正)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