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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매헌 권우 시 추일(梅軒 權遇 詩 秋日)

입동을 몇일 앞둔 어둑한 새벽 텃밭으로 향하는 좁은 길에 낙엽이 두텁게 쌓여 깊어 가는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겉절이용 배추 몇 포기 수확하는데 손은 시렵지만 다행이 올해는 진딧물이나 뿌리혹병이 생기지 않아 속이 알차게 영글어 가고 있다.

어제가 매화피는 춘삼월 같았는데.. 시간이 화살과 같이 빠르게 흘러가는 삶의 아쉬움을 길가에 늦게 피어난 망초 몇 송이가 시름을 달래 준다.

 

천금 같은 가을날씨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 한 구절처럼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따스한 가을 햇볕의 소중함은 식물 뿐만 나이라 우리 에게도 시간이 잠시 머물다 갔으면 하는 바램은 한결 같으리라. 인간이 저지른 자연생태계 파괴로 지구온난화를 촉진한 결과 점점 짧아지는 봄,가을의 아쉬움에 조그만 위로를 받고자 매헌선생의 시 추일을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매헌 권우(梅軒 權遇. 1363 ~ 1419)는 조선전기 문신이자 학자로서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원(權遠), 자는 중려(仲慮),여보(慮甫), 호는 매헌(梅軒)이다.

어려서는 형인 권근(權近)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자라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377년(우왕 3) 진사가 되고, 1385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문첩녹사(文牒錄事)가 되고, 이어 성균박사·밀직당(密直堂)·장흥고사(長興庫使)·군기주부(軍器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창왕 2) 액정알자감(掖庭謁者監)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고, 이듬 해 이조좌랑을 거쳐 군자감승(軍資監丞)을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계속 등용되어, 1394년(태조 3) 광주판관(廣州判官)에 임명되고, 이듬 해 중부유학교수관(中部幼學敎授官)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는 사헌부사헌에 오르고 성균직강(成均直講)·예조정랑·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집현전지제교(集賢殿知製敎)·예문응교(藝文應敎) 등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그 뒤 성균사예(成均司藝)·사헌부집의·사간원우사간 겸 춘추편수관(司諫院右司諫兼春秋編修官)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에 올랐다.

1412년(태종 12) 예조우참의와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이 되었다가 곧 예조좌참의와 세자좌보덕이 되고, 형조참의를 거쳐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1415년 원주목사를 거쳐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빈객이 되었다. 관직에 재임하는 동안 두 번이나 시관(試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 명사 1백여 명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 그의 형 권근의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워놓은 비석)가 남아 있다. 또한 시문에 능했으며 성리학과 주역에 밝았다. 당시 그의 학풍이 떨쳐져 정인지·안지(安止)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매헌집(梅軒集) 6권이 있다.

 

추일(秋日)

 

 

 

竹分翠影侵書榻(죽분취영침서탑) 대나무는 푸른 그림자 책상에 드리우고

菊送淸香滿客衣(국송청향만객의) 국화는 맑은 향기 보내 나그네 옷에 가득 스몄네

落葉亦能生氣勢(낙엽역능생기세) 지는 잎도 역시나 기세를 일으켜서

一庭風雨自飛飛(일정풍우자비비) 정원 가득한 비바람에 스스로 날아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