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이전 같으면 풍성한 명절 분위기로 들떠 있을 텐데 코로나로 인하여 귀향 발길을 잡고 있다. 연일 언론에선 북한의 총격으로 피살된 공무원의 진상규명, 법무부 장관의 아들 문제 무혐의 처분에 따른 국민들의 우려는 크져만 간다.
현 집권여당의 일부 수장들은 젊은 시절 주입된 사상의 틀에 고정되어 변화된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변화, 발전하고 있는 사상을 무식한 나의 소견으로 간단하게 살펴보면 마르크스(1818~1883)는 독일의 정치학자, 경제학자, 공산주의 창시자로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해야만 인간해방과 이상사회인 공산주의로 이행해 나가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했다면, 레닌(1870~1924)은 러시아 공산당을 창설하여 혁명을 지도했고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가 된 인물로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에 창조적 발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될 만큼 이론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면을 가미하여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 반항의 철학자 카뮈(1913~1960)에 의하여 그리스도교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독단적 측면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철학에 바탕을 두어 시대의 스승으로 추앙받은 인물로 기존 마르크스, 레닌 사상을 반박하여 새로운 사상의 변화를 가져왔며, 또 다른 자유의 철학자 샤르트르(1905~1980)의 등장으로 실존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였던 그는 인간이 하나의 실존임을 밝히고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 구조를 밝히는데 심혈을 기울렸 듯이 완벽한 사상을 존재하지 않으며 변하는 시대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상적 대립과 쟁점은 이론적 접근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을 발견하고 배워가며, 정체된 사고를 벗어나 더욱 발전되고 보편적 시각을 넓혀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집권세력 일부 수장은 과거의 운동권 시절 학습된 사상에 완전히 몰입되어 자신을 가두며 내가 결정하면 옳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심히 우려스럽다.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년~1582년)은 조선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 : 조선 중종~선조 연간에 시명을 떨친 3인으로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최경창(崔慶昌)을 일컬음)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峯). 아버지는 백세인(白世仁)이며, 어머니는 광산 김 씨 첨정 김광통(僉正 金廣通)의 딸이다. 형인 백광안(白光顔)과 백광홍(白光弘) 및 종제 백광성(白光城)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강호(江湖)에서 시와 서도(書道)로 자오(自娛)하였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盧守愼)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그 당시 송시(宋詩)냐 당시(唐詩)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삼당시인들은 송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방향 전환을 위해서 당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백광훈의 시는 당풍(唐風)을 쓰려고 노력하였고, 풍류성색(風流聲色)을 중시하여 자못 낭만적이고 염일(艶逸)한 시풍(詩風)을 지녔던 것이다.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백광훈은 손꼽히는 호남 시인으로 특히 절구(絶句)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 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하였다. 백광훈은 이산해(李山海), 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서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별세한 뒤 1590년(선조 23)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 되었고, 저서로는 옥봉집(玉峯集)이 있다. 현재 그의 유묵(遺墨)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1981년 유물관이 건립되었다.
그가 홍경사(弘慶寺)를 지나며, 그 회고적 감회를 읊은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1구에서는 가을 풀 우거진 고려시대의 절 홍경사의 모습을, 2구에서는 그곳에 최충(崔冲)의 비문이 쓸쓸히 남아 있는 모습을, 3구에서는 천년 동안 말없이 흘러가는 물을, 4구에서는 해질 무렵에 돌아가는 구름을 본다고 읊었다.
이 시에 대하여 허균(許筠)은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오로지 절창(絶唱)이라고만 하여 더 이상의 췌언(贅言)이 필요하지 않은 뛰어난 작품임을 말하였고,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우아하고 뛰어나 예로부터 이만한 것이 없다(雅絶之古).”라고 하였다.
이처럼 당대, 후대까지 칭송을 받았던 시 홍경사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弘慶寺(홍경사 : 1021년 고려 현종12년 왕명에 의하여 천안시 성환읍에 건립된 사찰)
秋草前朝寺(추초전조사) 시들은 가을 풀잎, 지난 왕조의 절터에는
殘碑學士文(잔비학사문) 깨어진 비석에 최학사(崔冲)의 글씨만 남았네
千年有流水(천년유류수) 천년 세월 흐르는 물은 그대로인데
落日見歸雲(낙일견귀운) 해지는 황혼에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봉선 홍경사(奉先弘慶寺)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비석만이 남아 있다.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 비는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신(碑身)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비문(碣記碑)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왕명에 의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崔沖)이 짓고, 당대 최고 서예가 백현례(白玄禮)가 글씨를 썼다.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체로 굳건하며 안정감 있는 명필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1000년을 버텨온 갈기비는 국보 제 7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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