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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매월당 김시습 산거증산중도인(梅月堂 金時習 山居贈山中道人)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은 서울 출생, 조선 전기 학자이자 문인으로 본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이다.

매월당 선생에 대하여 앞서 소개한 바 있어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가 남긴 시는 현재까지 그의 시문집에 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2,200여수나 되지만 실제로 그가 지은 시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스스로 술회하기를 어릴 때부터 질탕(佚蕩)하여 세상의 명리나 생업과 같은 것을 돌보지 아니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산수를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나 읊으면서 살았다. 원래 시란 자기실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역대의 시인 가운데서 김시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써 말한 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대자유인(大自由人)으로 승속(僧俗)을 넘나들며 도인과 교류하면서 읊은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산거증산중도인(山居贈山中道人 : 산에 거하며 산속 도인에게 주다)  

到老幽情頗轉深(도로유정파전심) 늙자 그윽한 정이 매우 더 깊어졌고

林泉終不負初心(림천종불부초심) 끝내 숲과 샘에 살겠다는 초심을 지켰다네.

竹爐初撥三生火(죽로초발삼생화) 대나무 화로에선 *삼생의 불 막 지피고.

石鼎新煎一味蔘(석정신전일미삼) 돌솥에선 최고의 *삼(연단)을 새로 달이네.

風曳洞雲歸遠壑(풍예동운귀원학) 바람은 동굴의 구름을 끌고서 먼 골짜기로 돌아가고

雁拖寒日下遙岑(안타한일하요잠) 기러기는 찬 해를 끌어당겨 먼 봉우리로 내려오네.

共君今夜不須睡(공군금야불수수) 그대와 함께 오늘 밤 잠들지 않을 테니,

月到小窓彈古琴(월도소창탄고금) 달이 작은 창에 이르면 옛 거문고를 탈 거라네.

 *삼생(三生) : 불교에 나오는 말로 전생ㆍ이승ㆍ저승. 뜻은 과거ㆍ현재ㆍ미래

 *연단(煉丹): 도교에서 말하는 장생불사(長生不死藥)인 단약(丹藥)을 굽는 것

 

또(又)

其一.

碧山深處卽爲家(벽산심처즉위가) 푸른 산 깊은 곳이 곧 집이라

松檜森森一徑斜(소회삼삼일경사) 소나무 빽빽한 오솔길 비스듬하네

峭壁雲摩苔作暈(소벽운마태작훈) 가파른 절벽에 구름이 스쳐 이끼 물들고

泓潭風激浪成花(홍담풍격낭성화) 깊은 못에 바람 불어 물결이 꽃 이루네

生涯不許人間詗(생애불허인간형) 생애를 인간들이 묻는 것 허락 않으니

鹽酪寧從村市賒(염랄녕종촌시사) 소금과 우유를 어찌 마을 시장에서 사랴

自有無窮淸福在(자유무궁청복재) 무궁한 청복이 절로 여기 있으니

利名到此儘么麻(명리도차진요마) 이익과 명예가 모두 보잘것없네

 

其二.

支遁山中結草堂(지둔산중결초당) *지둔은 산속에서 초당을 짓고

許詢來訪共匡床(허순내방공광상) *허순이 방문하니 상을 함께 했지

雲松趣味閑來雅(운송취미한래아) 구름과 솔의 취미는 한가하고 우아하고

雪竹襟懷老去剛(설죽금회노거강) 눈과 대의 회포는 늙을수록 강해지네

烏几倩繙方外語(오궤천번방외어) 검은 책상에서 *방외의 말을 번역하고

鴨爐親揷海南香(압로친삽해남향) 오리 화로에 친히 해남의 향 꽂노라

休言㝎罷無伎倆(휴언정파무기량) 선정 끝나고는 재주 없다 말하지 마라

淸水明燈祀古皇(청수명등사고황) 맑은 물 밝은 등으로 *고황께 제사하네

 *지둔(支遁 : 말과 학을 사랑한 동진(東晉) 시대 승려(314~366))

 *허순(許詢 : 동진시대의 명사(名士)로 지둔과 교류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남)

 *방외(方外 : 중국 방역의 밖이란 뜻으로 오랑캐의 땅 또는 서역을 이름.)

 *고황(古皇: 고황씨(古皇氏), 즉 전설에 나오는 유소씨(有巢氏)의 별칭을 가리킨다.)

 

其三.

春山無伴獨行時(춘산무반독행시) 봄산에서 도반 없이 홀로 다닐 적에

猿狖雙雙先後隨(원유쌍쌍선후수) 잔나비는 쌍쌍이 앞뒤로 따르네.

槲葉蔭溪迷小徑(곡엽음계미소경) 떡갈나무 잎사귀 음산한 계곡의 작은 길에서 헤매고

松槎偃石礙通岐(송사언석애통기) 베어진 소나무 바위에 누워 있어 통하던 갈림길 막혔네.

年年收栗忘貧歉(년년수률망빈겸) 해마다 밤을 수확해 가난함과 불만족스러움 잊고

處處團茅任適宜(처처단모임적의) 곳곳마다 띠풀 모아 마땅함에 맡긴다네.

點檢一生忙事少(점검일생망사소) 일생을 점검해 보니 바쁜 일 적었지만

世中韁勒不曾知(세중강륵부증지) 세상 속 고삐와 굴레 일찍 알지 못했다네

 

其四.

客來無語對筠床(객래무어대균상) 객이 와서 말없이 대상에 마주하니

林靄霏霏染夕陽(임애비비염석양) 숲 기운이 짙어 석양을 물들이네

不怕山靈來惱我(부파산령래뇌아) 산신령이 나를 괴롭힘 걱정 않고

深嗔野鼠解偸粮(심진야서해투량) 들쥐가 양식 훔침을 매우 화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