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소개한 바 있는 노봉선생의 전가사시(田家四時)는 고려 후기에 노봉 김극기(金克己. 1150? ~ 1209?)가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 4 수로 동문선(東文選) 권4에 수록되어 있다. 농가의 사계절, 즉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한 수씩 읊었다.
첫째 수는 바쁜 농사철인 봄을 표현하였다. 봄날의 바쁘고 부산한 들일의 모습과 자연의 싱그러움을 그려내면서도 춘궁기의 고단한 면도 아울러 묘사하고 있다.
둘째 수는 농번기인 여름의 모습이다. 붉은 해로 상징되는 긴 여름철의 무더위 속에 노인만 집 보라고 남겨두고 식구들이 모두 들녘으로 나가 일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나그네에게 정성 어린 술과 안주로 대접하는 농촌의 훈훈한 인정에 감사하고 있다.
셋째 수는 결실의 계절인 가을의 정경을 읊고 있다. 더운 여름을 고생 끝에 보내고 귀뚜라미 우는 가을을 맞아, 거둔 벼를 찧어 햅쌀밥을 짓는다. 붉은 단풍이 아름답고, 물고기도 살찌는 가을의 풍요함 속에서 나그네에게 술잔을 건네면서도 과중한 공납 걱정으로 근심하는 농민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넷째 수는 겨울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겨우살이에 대비하여 초가집을 고치고 새끼도 꼬며 농한기의 한가로운 일상을 그려냈다.
농가의 정겨운 일상을 마치 동양화 화폭에 담아내 듯 서정적으로 묘사한 격조 높은 시를 먼저 소개한 전가사시(겨울, 봄)를 다시 불러와 함께 올려본다.
춘(春)

草箔遊魚躍(초박유어약) 풀통발엔 물고기들 뛰어놀고
楊堤候鳥翔(양제후조상) 버들 둑에 철새들 날아오네
耕臯菖葉秀(경고창엽수) 밭갈이하는 언덕엔 창포잎 곱게 우거지고
饁畝蕨芽香(엽무궐아향) 들밥 먹는 이랑에 고사리 순이 향기롭네
喚雨鳩飛屋(환우구비옥) 비를 부르는 비둘기들 지붕 위에서 날고
含泥燕入樑(함니연입량) 진흙을 문 제비는 들보로 들어오네
晩來芧舍下(만래서사하) 해 질 녘 초가집 처마 아래로 돌아와
高臥等羲皇(고와등희황) 베개를 높이 베니 태곳적 사람 같구나.
하(夏)

柳郊陰正密(류교음정밀) 버들 언덕에 그늘이 바로 짙어지고
桑壟葉初稀(상롱엽초희) 뽕밭 언덕에 뽕잎이 막 드물어졌네
雉爲哺雛瘦(치위포추수) 꿩이 새끼를 먹이기 위해 야위어가고
蠶臨成蠒肥(잠림성견비) 누에가 고치가 되려 살쪄가네
熏風驚麥隴(훈풍경맥롱) 더운 바람이 보리밭 언덕을 놀래 키고
凍雨暗苔磯(동우암태기) 찬 비가 이끼 낀 물가를 그늘지게 하네
寂寞無軒騎(적막무헌기) 적막히 수레나 말 탄 이 올리 없어
溪頭晝掩扉(계두주엄비) 시냇가 어귀엔 낮인데도 사립문 닫았구나.
추(秋)

搰搰田家苦(골골전가고) 힘쓰고 힘써 시골 사람들 괴로웠다가
秋來得暫閑(추래득잠한) 가을이 와 잠시 한가함 얻었지
鴈霜楓葉塢(안상풍엽오) 서리 내린 단풍잎 언덕에 기러기 깃들고
蛩雨菊花灣(공우국화만) 비 맞은 국화꽃 핀 물굽이엔 귀뚜라미 깃드네
牧笛穿烟去(목적천연거) 목동의 젓대소리가 밥 짓는 연기 뚫고 가고
樵歌帶月還(초가대월환) 땔나무 캐는 노랫소리가 달을 휘감아 돌아가지
莫辭收拾早(막사수습조) 사양치 말고 수습하길 일찍 해야 하니
梨栗滿空山(리률만공산) 배와 밤이 주인 없는 산에 가득한 것을.
동(冬)

歲事長相續(세사장상속) 해마다 할 일이 끝도 없이 이어져
終年未釋勞(종년미석로) 한 해가 다 가도 일을 끝내지 못했네
板簷愁雪壓(판첨수설압) 눈에 짓눌린 판자 처마가 걱정되고
荊戶厭風號(형호염풍호) 바람에 삐걱 데는 싸리문 소리도 싫네
霜曉伐巖斧(상효벌암부) 서리 내린 새벽에는 나무하러 가고
月宵乘屋綯(월소승옥도) 달밤에는 지붕 얽을 새끼 꼬아야지
佇看春事起(저간춘사기) 봄 농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舒嘯便登皐(서소편등고) 휘파람 불며 편안히 언덕에 올라볼까나.
'삶의 향기 > 차한잔의 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월당 김시습 시 3수 송인, 죽장암, 고탄(梅月堂 金時習 詩 3首 送人, 竹長菴, 古呑) (0) | 2023.04.28 |
---|---|
매월당 김시습 산거증산중도인(梅月堂 金時習 山居贈山中道人) (0) | 2023.04.27 |
봄 관련 한시 2수 : 금석 박준원 간화, 난고 김립 문두견화 소식(錦石 朴準源 看花, 蘭皐 金笠 問杜鵑花消息) (0) | 2023.04.17 |
봄 관련 한시 4수 : 우량사 춘산야월, 엄운 석화, 장거 춘음, 맹교 춘우후(于良史 春山夜月, 嚴惲 惜花, 張渠 春吟, 孟郊 春雨後) (0) | 2023.04.17 |
정암 민우수 춘일(貞菴 閔愚洙 春日) (0) | 2023.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