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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동하 정습명 시 2수 : 석죽화, 증기(東河 鄭襲明 : 石竹花(패랭이꽃), 贈妓)

내가 머무는 세종에는 대단위 공동주택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정보통신 감리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점심 후 과거 임야였던 택지조성이 진행되는 개발지를 산책하곤 하는데 완만한 경사지에는 토사유실 방지를 위하여 다양한 식물씨앗 등을 적당한 퇴비와 함께 살포하는데 그 중 패랭이 꽃 씨앗이 포함되어 있어 곱게 핀 모습에 바라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패랭이꽃은 석죽목 석죽과 패랭이꽃속의 여러해살이풀로 대충 묶어 패랭이꽃이라고 한다.

어버이날 상징인 카네이션은 패랭이꽃의 개량종이다.

예로부터 패랭이꽃을 석죽화(石竹花), 대란(大蘭), 산구맥(山瞿麥)이라고도 불리며, 꽃의 모양이 옛날 민초(民草)들이 쓰던 모자인 패랭이(조선시대 때 신분이 낮은 양민이나 천민들이 쓰고 다녔던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은 모자)를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으며, 문학작품에서도 소시민을 패랭이꽃에 비유한다.

패랭이꽃(石竹花)에 대한 전설은 옛날 힘이 센 장사가 있었다. 그는 인근 마을에 밤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석령(石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화살을 겨누어 그 돌을 향해 힘껏 쏘았는데 너무나 세게 쏘아 화살이 바위에 깊숙이 박혀서 빠지지가 않았다. 그 후, 그 돌에서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고운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바위에서 핀 대나무를 닮은 꽃이라 하여 ‘석죽’이라 불렀다.

 

소개하고자 하는 패랭이꽃 관련 한시는 고려 중기의 문인이자 연일 정씨(延日 鄭氏)의 시조인 정습명(鄭襲明)이 석죽화(石竹花)라는 제목을 짓고 시를 읊었는데, 고려 예종(睿宗 : 1079 ~ 1122년. 고려의 제16대 국왕(재위 : 1105 ~ 1122년))이 이를 듣고 깊게 감탄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제수(除授)시켰다고 한다. 이 시는 동문선(東文選) 기록되어 있으며 패랭이 꽃 한시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명시(名詩)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으며 직접 촬영한 패랭이꽃 사진을 함께 올려보았다.

 

석죽화(石竹花 : 패랭이꽃)

世愛牧丹紅(세애목단홍) 세상에선 모두들 붉은 모란꽃만 사랑하여

栽培滿遠中(재배만원중) 뜰 안에 가득히 심고 가꾸네.

誰知荒草野(수지황초야) 누가 알랴, 이 거친 초야에도

易有好花叢(역유호화총) 좋은 꽃 떨기 피고 있는 줄을

色透村塘月(색투촌당월) 어여쁜 모습은 연못 속의 달에 어리고

香傳壟樹風(향전롱수풍) 향기는 밭두렁 나무의 바람에 전하네

地偏公子小(지편공자소) 궁벽한 시골이라 찾아주는 귀공자 적어서

嬌態屬田翁(교태속전옹) 아리따운 자태를 늙은 농부에게 붙이네

 

기록에 의하면 어느 환관(宦官)이 석죽화를 읊어 임금에게까지 들리니 임금(仁宗)이 감탄하여 정습명(鄭襲明)을 옥당(玉堂)에 보임하였다는 일화가 파한집(破閑集)에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석죽화는 바로 정습명의 출세작이 된 셈이다.

 

평범한 산문의 조직을 연상하게 하는 구법(句法)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 작품의 풍유기법(諷諭技法 : 본뜻은 숨기고 비유하는 말만으로 숨겨진 뜻을 암시하는 수사법. 비유법의 하나로, 속담이나 격언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은 높은 수준을 보인다. 초야에 묻혀 사는 자신의 처지를 패랭이꽃에 비유하여 세속에서 사랑받는 모란(牡丹)과 대응시키고 있다.

 

젊을 적 초야에 묻혀 사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촐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피어나는 야생화인 패랭이꽃(石竹花)에 비유하여, 세속에서 사랑받는 모란꽃과 대조시켜 읊은 시이다.

 

동하 정습명(東河 鄭襲明, 1094 ~ 1150)은 고려 중기의 문신,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호(號)는 동하(東河), 형양(滎陽)이다. 글을 잘하여 향공(鄕貢)에 급제하였으며 인종조에 여러 번 벼슬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으며, 관직은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이르렀다. 연일정씨(延日氏)의 시조(始祖)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는 그의 10대손이다.

그는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3대의 조정에 출사 한 중신(重臣)으로 성품이 강직, 쾌활하였고 지, 인, 용을 겸비하였으며 문명(文名)과 기개가 높았다. 또한 직언으로 의종(毅宗)이 스스로 깨닫도록 인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는 '습명은 임금의 주위에 이와 같은 소인간신(小人奸臣)의 무리가 에우고 있는 한(限)은 끝끝내 바른 임금의 도리를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마침내 앙약(仰藥) 자결하였으니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후에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폐출되어 쫓겨날 때, 눈물 흘리며 자신에게 바른말로 간하던 그를 찾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명시(名詩) 증기(贈妓)는 나이 든 기생에게 지어준 시로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증기(贈妓 : 나이 많은 기생에게 주다)

百花叢裏淡丰容(백화총리담봉용) 온갖 꽃들 속에서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忽被狂風減却紅(홀피광풍감각홍) 느닷없는 바람을 맞아 아름다움이 시들었네

獺髓未能醫玉(달수미능의옥협) 수달의 골수로도 옥 같던 얼굴을 고칠 수 없으니

五陵公子限無窮(오릉공자한무궁) 풍류를 아는 공자님들 한없이 안타까워하겠네

 

그가 죽고 나서 19년 뒤 벌어진 일이 바로 무신정변(武臣政變 : 고려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해 일어난 정변으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으로 동요되고 있었던 고려 문벌귀족사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이다. 특히 정습명을 모함한 김존중(金存中), 정함(鄭諴)은 막대한 부를 쌓으며 호의호식하는데 그와 별개로 최후에 김존중은 김부식(金富軾)과 마찬가지로 시체조차 온전치 못하게 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정함은 이 무신정변의 원인이 되는 총신정치, 환관정치의 원흉이었는데 그 역시 정변 이후 기록에서 아예 사라져 버린다. 격국 무신정변을 막지 못한 의종(毅宗) 본인은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허리가 꺾여서 죽게 된다.

 

(패랭이꽃)

 

- 패랭이 꽃(김동리) -   

파랑새를 쫓다가 들 끝까지 갔었네

흙 냄새 나무빛깔 모두 낯선 타관인데

패랭이꽃 무더기 져 피어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