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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돈암서원 양성당 십영(遯巖書院 養性堂 十詠)

지난겨울 광김(光金)을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의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한 논산 돈암서원((遯巖書院)을 찾게 되었다. 매서운 날씨와 코로나로 서원을 찾는 사람은 없어 홀로 원내를 살펴보았다. 광김의 후예(後裔) 답게 선조의 자취를 세세히 살펴보고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마침 서원 문화해설사로 계신 이재철 님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궁금해하시는 양성당 내부 편액에 대한 해석과 판독이 어려운 현판 글씨 쓰신 분에 대한 궁금증을 상세하게 설명드렸더니 고마움에 따뜻한 차 한잔을 대접받았다. 또한 정문 산앙루(山仰樓) 주련(柱聯)에 대한 해석과 함께 소강절(邵康節)의 세한음(歲寒吟) 주련은 걸린 순서가 잘못되어 빠른 시일 내 수정을 요청하였는데 수정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지금은 계절이 바뀌어 한 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돈암서원을 방문했던 생각이 떠올라 사진과 함께 서원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본다. 양성당 내부 현판에 걸린 양성당 십영은 독석 황혁(獨石 黃赫)과 계곡 장유(谿谷 張維) 등이 읊었는데 장유의 십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정문(입덕문)에서 바라본 돈암서원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이 타계한 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 충청도 연산현(連山縣)의 임리(林里)에 창건되었다. 창건 시 김장생을 주향(主享)으로 모셨고 1658년 사계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추배(趨拜)하였다. 이어 1688년 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 하였다. 처음에는 김장생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원래는 현재 위치에 보다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하임리 숲말로 연산천 가까운 저지대였는데 1880년(고종 17) 홍수를 피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660년(현종 원년)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지역의 공론과 학문을 주도했다. 서원이 처음 입지 한 숲말 산기슭의 큰 바위를 돈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바위의 이름을 따서 사액(賜額)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돈암’의 돈은 원래 ‘둔(遯)’자로 주역의 둔괘(遯卦)의 의미와 관련이 깊으며 주자가 만년에 사용한 둔옹(遯翁)이라는 호를 가탁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871년(고종 8)의 전국적 서원 훼철령(毁撤令 :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철폐되지 않고 보존되었지만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 때마다 서원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사계 선생에 대하여는 앞에서(사계 김장생 시 2수) 상세히 언급하였기에 생략토록 하겠다.

돈암서원의 배치는 약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전면에 강당을 두고, 후면에 묘당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식(前學後廟式) 배치이며, 전면에서부터 산앙루,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가 중심축 선상에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 응도당, 동서재, 장판각, 경회당, 전사청 등의 건물이 비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크게 묘당(廟堂), 강학(講學), 유식(遊息), 수직(守直)의 4개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가장 중요한 묘당 구역은 제일 안쪽이자 서원 내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전면에 내삼문을 두고 주위에는 사괴석(四塊石) 담으로 둘러져있다.
강학 구역에는 강당인 양성당(養性堂)과 그 앞 좌우에 동·서재를 배치해 두었다. 원래 돈암서원의 옛터에는 응도당이 강당이었으나, 이건(移建) 과정에서 양성당이 먼저 강당 자리를 차지하였다. 중앙의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으로 배열된 동재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인 정의재(精義齋)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당의 서편으로는 판각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 사계 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께서 강학하시던 공간인 정회당(靜會堂)이 위치하고 있다.
돈암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사 구역은 서원의 북편에 배치하고 있다. 하나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경회당과 담장과 협문을 지나 제향을 준비하거나 제기 등을 보관해 두는 전사청이 있다. 전사청은 원래 수직사로 사용하다가 경회당을 신축하면서 현재의 용도로 변경되고, 입덕문 앞에 산앙루(山仰樓)를 건립하면서 유식(遊息) 공간을 만들었다.
돈암서원은 호서는 물론 기호 전체에서 존숭(尊崇) 받는 서원으로서 사계 김장생을 제향 한 서원 중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았으며, 기호 사림 전체의 구심체가 되었다. 돈암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돈암서원(遯巖書院)

산앙루(山仰樓)

산앙루 주련글씨를 살펴보면



其一. 세한음(歲寒吟 : 찬 겨울에 읊다)  - 소강절(邵康節)
松栢入冬靑(송백입동청) 송백은 겨울에 들어 더욱 푸르니
方能見歲寒(방능견세한) 능히 한 겨울 추위에도 볼 수 있다
聲須風裏廳(성수풍리청) 스치는 바람에도 그 소리 들을 수 있어
色更雪中看(색갱설중간) 눈 속에서도 그 푸르름 선명하도다
(주련의 3번 구절과 4번 구절 순서가 잘못 걸려 있다)

其二. 청야음(淸夜吟 : 맑을 기운이 감도는 밤에 읊다 ) - 소강절(邵康節)
月到天心處(월도천심처) 달이 천심에 이르고
風來水面時(풍래수면시) 바람이 수면 위를 스칠 때
一般淸意味(일반청의미) 이 모든 맑은 뜻과 의미를
料得少人知(료득소인지) 알아주는 이 드무네

其三. (작자미상. 안앙루 건립당시 유생이 지은 것으로 추정)

山仰樓接天(산악루접천) 산앙누각은 높아 하늘과 접해 있고
文華布自然(문화포자연) 문장의 화려함은 자연의 섭리를 담고 있네
春夏秋冬節(춘하추동절)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學生會屋前(학생회옥전) 유생(학생)들은 누각에 모여들었네(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원 입구에 세워진 비석(높은 비석은 황강 김선생정회당사적비)
입덕문(入德門) 입구
정면 건물이 양성당. 우측 거경재, 좌측이 정의재, 그 뒤로 숭례사(崇禮祠)가 자리잡고 있다
응도당(凝道堂)
돈암서원 현판(우암 송시열 글씨로 추정)
응도당에서 바라본 모습(좌측 건물이 정회당, 정면 향나무 뒤로 장판각이보인다)
연산돈암서원지비(連山遯巖書院之碑) : 돈암서원을 세운 배경과 구조, 사계 김장생 부자의 성품과 학문적 업적에대한 칭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 비문 제목은 전서체로 김장생의 증손인 김만기가 썼다. 명필 송준길의 글씨가 방금 새긴 것 처럼 선명하다.
양성당(養性堂), 편액 휘호는 추사 김정희 제자인 추당 서상우(秋堂 徐相雨)의 글씨다.

양성당 십영(養性堂十詠)은 조선 중기 장유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돈암서원의 양성당(養性堂)을 소재로 지은 제영(題詠)이다.
양성당(養性堂)은 임진왜란 후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이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하였을 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양성당 십영(養性堂 十詠)이라는 동명의 시가 여러 수 있다. 독석 황혁(獨石 黃赫)이 지은 김희원연산양성정십영(金希元連山養性亭十詠)은 차제에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당대의 명문장가인 장유(張維)가 사계 김장생에게 바친 시를 소개하겠다. 양성당 십영은 장유의 시문집인 계곡집(谿谷集) 권 33에 수록되어 있으며, 양성당에 대해 제목을 붙여 읊은 10편의 칠언절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4 수를 자서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양성당 십영(養性堂十詠) - 장유(張維)

제1영 : 약포춘우(藥圃春雨, 약초밭에 내리는 봄비)

一雨乘春土脈融(일우승춘토맥융) 봄비 한번 내리자 땅기운 화하고
小畦條甲翠成叢(소휴조갑취성총) 조촐한 밭 껍질 깨고 무더기로 파릇파릇
閑看不比庭前草(한간부비정전초) 얼른 봐도 뜰에 난 풀과 같지 않나니
康濟他時有妙功(강제타시유묘공) 훗날 병자 구제하는 기막힌 공 이루리라

제2영 : 사저추어(沙渚秋魚, 모래톱 가에 노니는 가을 물고기)
前溪秋雨玉鱗肥(전계추우옥린비) 앞 개울 가을비에 옥 비늘 살진 고기
密樹陰中坐石磯(밀수음중좌석기) 빽빽한 나무 그늘 바위에 앉아 계시 누나
莫把堯夫觀物興(막파요부관물흥) 요부처럼 관물 하는 선생의 이 흥취를
擬他西塞綠蓑衣(의타서새록사의) 서새의 초록 도롱이에 견주질랑 마오시라

제3영 : 계룡방은(鷄龍訪隱, 계룡산의 은자를 방문함)

靑山深處白雲迷(청산심처백운미) 청산 깊은 곳 흰 구름만 오락가락
中有高人物外棲(중유고인물외서) 그 속에 고명한 분 세상 잊고 사시나니
欲討琴書來往熟(욕토금서래왕숙) 학문 서로 담론 하러 왔다 갔다 익숙한 길
夕陽驢背過寒溪(석양려배과한계) 석양에 나귀 타고 찬 개울 건너가시누나

제4영 : 대둔심승(大芚尋僧, 대둔산의 승려를 찾아감)
石林精舍幾牛鳴(석림정사기우명) 석림의 정사 소 울음소리 들릴 거리
暇日携笻叩化城(가일휴공고화성) 틈나는 날 죽장(竹杖) 짚고 화성 찾아가시나니
莫道先生愛禪寂(막도선생애선적) 선생께서 선적을 좋아한다 말을 마오
碧雲佳句自關情(벽운가구자관정) 벽운의 멋진 시구 절로 흥이 나서라오

제5영 : 매초호월(梅梢皓月, 매화나무 가지 끝에 걸린 하얀 달)
江梅初放臘前花(강매초방납전화) 납일(臘日)도 되기 전에 꽃망울 터뜨린 강매여
分外天公借月華(분외천공차월화) 분에 넘치게 천공이 또 달꽃을 빌려 주었고녀
摠入淸襟添灝氣(총입청금첨호기) 가슴속에 호기를 듬뿍 안겨 주나니
一生思慮自無邪(일생사려자무사) 일생 동안 삿된 생각 저절로 없어지리

제6영 : 죽림청월(竹林淸風, 대나무 숲의 맑은 바람)

湖右人家少竹林(호우인가소죽림) 호서(湖西) 땅엔 죽림 있는 인가도 드물 텐데
移來何地忽成陰(이래하지홀성음) 어디서 옮겨 와서 무성한 그늘 이루었나
憐渠可但淸煩暑(련거가단청번서) 어여뻐라 대숲이여 어찌 더위만 식혀 주리
歲暮風霜共此心(세모풍상공차심) 세모의 풍상 고절(孤節) 그 마음 함께 지니리라

제7영 : 일구도원(一區桃源, 한 구역 무릉도원)
花開處處眩東西(화개처처현동서) 도처에 핀 복사꽃 어디가 동이며 서쪽인고
地僻都無樹下蹊(지벽도수수하혜) 궁벽진 곳 나무 아래 길도 나지 않았어라
莫把漁人透消息(막파어인투소식) 어부 붙잡고서 도원(桃源) 소식 묻지 마오
塵蹤欲到自應迷(진종욕도자응미) 속인 들어가려 하면 길 잃고 헤매리라

제8영 : 우지하화(兩池荷花, 쌍둥이 연못 위의 연꽃)
翠蓋紅粧淨不妖(취개홍장정부요) 푸른 일산 붉은 화장 요염을 떠난 조촐한 모습
雙塘水白暖香飄(쌍당수백난향표) 쌍둥이 연못 맑은 물에 날리는 향기 나긋나긋
濂溪宅裡如無此(염계택리여무차) 염계의 저택 속에 이 정경이 없었다면
霽月光風便寂寥(제월광풍편적요) 광풍제월도 문득 적요했으리라

제9영 : 횡사담경(黌舍談經, 학당의 경서 강론)
講肆雍容聚席珍(강사옹용취석진) 강당에 조용히 모여 앉은 석진들
靑衿濟濟學規新(청금제제학규신) 단정한 유생의 모습 학규 또한 새로워라
懸知衆說翻瀾處(현지중설번란처) 갖가지 주장 온갖 토론 벌어질 적에
別有鏗然舍瑟人(별유갱연사슬인) 쟁그랑 비파 놓는 사람 있을 줄을 내 알겠네

제10영 : 임정관가(林亭觀稼, 숲 속 정자에서의 농사일 구경)

田居事事且隨宜(전거사사차수의) 때 맞춰 행해지는 갖가지 농사일들
植杖林亭看餉菑(심장림정간향치) 임정에 치장하고 새참 먹는 농부들 보네
從此免敎沮溺笑(종차면교저닉소) 앞으로 장저(長沮) 걸닉(桀溺) 비웃음 받진 않겠지만
先生元不學樊遲(선생원부학번지) 선생은 원래 번지를 배운 분이 아니라오

양성당 십영은 돈암서원 내 양성당을 중심으로 한 자연경관과 김장생의 도학자적 삶을 읊은 장유의 한시로 문학적 형상화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8 ~ 1638)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 계곡(谿谷), 묵소(默所)이다. 1587년 아버지 형조판서 덕수군(德水君) 장운익(張雲翼)과 어머니 밀양 박 씨 박숭원(朴崇元)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년)에 19세의 나이로 향시에 장원을 했으며, 이듬해인 1606년 증광시 진사시에 2등 10위로 입격 하였다. 3년 뒤인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진사로서 증광시(增廣試 : 나라에 경사가 겹쳤을 때 임시로 실시한 과거)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했으니 당시 23세였다. 이후 예문관·승문원 등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있을 당시, 매제 황상(黃裳)이 연루되어 역적으로 체포되면서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2년 동안 고향인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는데, 이 무렵에 대가의 문장을 거의 다 접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었고 신풍군에 책록 되었다. 이조좌랑과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공신이면서도 공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소장 관인들을 보호하다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다. 이때 인조가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 청나라 시대에 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의 굴욕을 당한 뒤 삼전도(三田渡) 비문을 쓴 일로 욕을 많이 먹었다. 어쨌든 1637년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친상을 이유로 18차례의 상소 끝에 물러났다.
사후 효종이 즉위하자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유는 천문, 지리, 의술, 병서, 그림, 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상촌 신흠(象村 申欽), 택당 이식(澤堂 李植)과 더불어 4대가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꼽혔다. 이는 네 명의 호를 딴 것으로, 장유는 계(谿)로 세 번째에 든다. 여한구문가(麗韓九文家)로 꼽힌 적도 있다.
다방면에 탁월한 실력을 겸비하여 실록을 집필한 사관 역시 ‘조정에서는 명신(名臣)이었고 임금의 장인이었으며, 공훈은 마원(馬援)과 등애(鄧艾)를 능가하고 문장은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를 앞질렀다’고 평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저서로는 계곡집(谿谷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