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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단양 사인암 (丹陽 舍人巖 )

근자에 한가함이 찾아와 오랜만에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시간을 가졌는데 화재(畵材)로 단양 사인암의 봄 풍경을 그려보았다.
사인암은 단양을 대표하는 팔경중 하나로 앞을 흐르는 강과 암자가 있어 옛 선비들이 즐겨 찾아 시흥을 즐기며, 바위에 글을 새겨 그때의 흔적을 남겼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그때의 흥취를 느껴보고자 한다.

 

사인암의 봄풍경

사인암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암리에 위치한다. 높이는 약 50m이며 기암 아래는 남조천이 흐르며 소(沼)를 이루고 있어 아름다운 풍치를 더해주는 곳이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려 때 유학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행적 때문에 지어졌다. 고려 시대 우탁이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인 정 4품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에 있을 당시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연이 있어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가 우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사인암이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단양팔경에 속하며 2008년 9월 9일 명승 제47호로 지정되었다. (게재 내용은 단양 '사인암' 한시 등 필적과 문헌기록(작성자 moonkok711)을 참고하였다.)

박제가가 남긴 사인암 관련 시와, 그곳 암벽에 이인상과 이윤영의 필적이 새겨지게 된 경과, 그리고 사인암에 관한 옛 기록.

- 사인암 필적(筆跡)

O 舍人巖 凌壺公贈名雲英石(사인암 릉호공증명운영석) 사인암 능호공은 운영석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 朴齊家(박제가)

大癡仙人去不還(대치선인거불환) 대치선인(大癡仙人) 떠나가선 돌아오지 않는데
石法乃在丹陽山(석법내재단양산) 석법만은 단양산에 여태껏 남아 있네.
丹陽之山最深處(단양지산최심처) 단양의 산중에도 가장 깊은 이곳에
振衣千仞凌孱顔(진의천인릉잔안) 천 길 벼랑 옷깃 떨쳐 꼭대기로 오르네.
靴紋斧劈落鏡裏(화문부벽락경리) 신발 무늬 도끼 자욱 거울 위로 떨어지니
下有橫奔璧玉水(하유횡분벽옥수) 아래엔 질펀한 벽옥 강물 흐른다.
疎松杳杳生其顚(소송묘묘생기전) 성근 솔 아득히 꼭대기에 자라니
木末天光昂首視(목말천광앙수시) 나무 끝 하늘빛을 머리 들어 바라본다.
流杯之所自天成(류배지소자천성) 술잔 흘려 띄우는 곳 저절로 그리 되고
石上碁局猶分明(석상기국유분명) 바위 위 바둑판은 지금도 또렷하다.
神䤹鬼削不師承(신맘귀삭불사승) 귀신이 깎았는가 배운 솜씨 아니 러니
爭奇鬪秀非經營(쟁기투수비경영) 기이하고 빼난 모습 지어냄이 아니 로다.
元靈日磨三斗墨(원령일마삼두묵) 이인상은 날마다 세 말 먹을 갈았었고
胤之著盡幾兩屐(윤지저진기양극) 이윤영은 몇 켤레의 나막신이 닳았었네.
驚呼一時狂欲絶(경호일시광욕절) 한때에 놀라 외쳐 미칠 듯 좋아하여
半生遨遊歸不得(반생오유귀부득) 반평생 노니느라 돌아가지 않았 다네.
風流零落我初到(풍류령락아초도) 풍류는 스러지고 내 이제야 이르니
醉臥願傍燒丹竈(취와원방소단조) 곁에 취해 누워 단조에 불 지피리.
攀躋壁罅得微徑(반제벽하득미경) 절벽 틈 기어올라 작은 길 찾아내니
四面靑厓亭更好(사면청애정갱호) 사면에 푸른 벼랑 정자 더욱 좋아라.
紅蘿八月色未深(홍라팔월색미심) 8월이라 홍라 넝쿨 빛깔 짙지 않은데
稀葉自零幽壑陰(희엽자령유학음) 성근 잎 골짝 그늘 저 혼자 떨어진다.
手拂蒼苔尋古篆(수불창태심고전) 푸른 이끼 털어내어 옛 전자(篆字) 찾노라니
頭邊磔磔驚棲禽(두변책책경서금) 깃든 새 깜짝 놀라 머리 위서 짹짹댄다.
朝霞鎖盡洞門路(조하쇄진동문로) 아침노을 동문(洞門) 길에 자욱히 잠겨 있어
雲中鷄犬知何處(운중계견지하처) 구름 속 닭과 개들 간 곳을 어이 알리.
身是天台賦裏客(신시천태부리객) 이 내 몸 〈천태부(天台賦)〉가운데 든 나그네라
却憶山陰道上語(각억산음도상어) 산음(山陰) 길 위의 얘기 문득 다시 떠올리네.

예전 이곳 사인암에 와서 노닐었던 이인상과 이윤영의 자취를 그리는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제목에서 능호공이 사인암에 운영석(雲英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1구의 대치선인(大癡仙人)은 원나라 때의 유명한 산수화가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호다. 이윤영의 〈구담기(龜潭記)〉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이윤영이 예전 이인상의 집을 찾아갔을 때, 이인상은 황공망이 긴 두루마리에 그린 산수도를 보여준 일이 있었다. 이후 이윤영은 단양 땅의 산수를 보며 황공망의 그림과 방불한 풍경이 이곳에 있는 것을 크게 감탄한다. 자세한 내용은 〈구담기(龜潭記)〉에 실려 있다. 시의 첫 두 구는 이 일을 환기한 것이다.
이어 박제가는 사인암의 풍경과 유배소(流杯所), 즉 물굽이를 따라 술잔을 띄우던 자취, 바위 위에 새겨진 바둑판 등을 묘사하였다. 또 이곳에서 하루에 먹을 세 말 씩 갈아 글씨를 썼던 이인상과, 여러 켤레의 나막신이 다 닳도록 이곳저곳 산수를 거닐었던 이윤영의 자취를 그리워했다. 또 이들이 남긴 푸른 이끼에 덮인 고전(古篆)을 찾노라니, 이미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간 선인들의 체취가 새삼 떠올라 아련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노라고 했다.
박제가는 이 시에 이어 한 수의 시를 더 남겼다.

O 振衣山莊 奉寄徹齋學士(진의산장 봉기철재학사) 진의산장에서 철재 정지검 학사께 받들어 부치다.

君不見(군불견) 그대 보지 못했나
雲英石勢如翶翔(운영석세여고상) 운영석의 기세가 하늘로 날듯하여
一生不厭長相望(일생불염장상망) 평생을 바라봐도 싫증나지 않는 것을
面巖置屋自瀟灑(면암치옥자소쇄) 절벽 앞에 집 세우니 맑고도 시원하고
碧山圍繞東西房(벽산위요동서방) 푸른 산 에워싼 곳 동서로 방 들였지
入門一株茱萸紅(입문일주수유홍) 문에 들면 한 그루 수유 열매 빨갛고
風雨無人鳥啄窓(풍우무인조탁창) 비바람에 사람 없고 새만 창을 쪼는구나
歎息名區閱數姓(탄식명구열수성) 이름난 곳 여러 성씨 주인 바뀜 탄식하다
喜爲鄭公之新庄(희위정공지신장) 정공이 새 별장을 지은 것을 기뻐하네
主人豈非有心人(주인기비유심인) 주인이야 어이 바로 뜻 있는 이 아니리오
買田初欲居丹陽(매전초욕거단양) 처음엔 밭을 사서 단양에서 살려 했지
縱然此地不一到(종연차지불일도) 설령 이 땅에 한번 오지 않았대도
夢魂長在雲霞傍(몽혼장재운하방) 꿈속 넋 언제나 구름 곁에 있었으리
明時際會不可失(명시제회불가실) 밝은 시절 현주(賢主) 만남 잃어서는 안되니
巖穴莫思深遁藏(암혈막사심둔장) 암혈에 깊이 숨음 생각하지 마옵소서
歲輸粟米十餘斛(세수속미십여곡) 해마다 곡식을 십여 곡씩 날라다가
付與漁船達京江(부여어선달경강) 고깃배에 부탁하여 경강까지 이르고저
高秋晩飯風味好(고추만반풍미호) 높은 가을 늦은 저녁 그 맛이 달콤하여
一回把匙一思鄕(일회파시일사향) 숟가락 들 때마다 떠오르는 고향생각.

진의산장(振衣山莊)을 노래한 작품이다. 당시 규장각 학사로 있던 정지검(鄭志儉)에게 보낸 시다. 시를 보면 진의산장이 운영석, 즉 사인암 앞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서로 방을 들인 작은 규모였겠는데, 시를 보면 이윤영 이후로 주인이 여러 성씨로 계속 바뀌었고, 박제가가 찾았던 당시에는 정공(鄭公)이 진의산장이란 당호를 내걸고 새 집을 지었던 듯하다. 사인암은 그 후로도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던 듯, 실제 사인암 암벽의 제각 중에는 ‘성씨별업(成氏別業)’이라 새긴 것도 있다.
앞의 사인암을 노래한 시에서 “절벽 틈 기어올라 작은 길 찾아내니, 사면엔 푸른 벼랑 정자 더욱 좋아라.(攀躋壁罅得微徑, 四面靑厓亭更好 반제벽하득미경, 사면청애정갱호)”라 한 것을 보면, 진의산장에서 절벽 틈새로 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따로 작은 정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지금도 진의산장이 있던 곳에는 절집이 들어서 있고, 정자 자리에는 절의 삼성각(三聖閣)이 서 있다. 진의(振衣)란 옷깃을 떨친다는 말이니, 티끌세상의 먼지가 묻은 옷을 털고서 자연에 은거한다는 의미다.

박제가가 시에서 적고 있는 대로 사인암에는 이인상과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의 필적과 자취가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이윤영은 서울을 떠나 한 때 이곳 사인암에 거처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가 윤지(胤之), 호가 단릉(丹陵)인데, 단양의 산수를 특별히 사랑하여 호조차 단릉으로 지었을 정도였다. 이윤영이 사인암에 복거(卜居)를 정하는 과정은 자신의 문집인 《단릉유고》에 실린 〈복거기(卜居記)〉에 자세하다. 이윤영은 단양 땅을 유람하고 돌아온 스승 한빈(漢濱) 윤선생을 찾아가 이번 유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사인암을 가장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을 기억해두었던 그는 부친이 이곳에 고을살이를 떠나게 되자 신미년(1751) 3월 20일에 선생의 장남 윤덕이(尹德以)와 동생 이운영(李運英)과 함께 단양 땅을 찾는다. 그리고 며칠 뒤 김상묵(金尙黙)과 김종수(金鍾秀)가 합류하여 다섯 사람이 함께 사인암 어귀에 이른다. 처음 사인암을 멀리서 본 감회를 이윤영은 이렇게 적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니 키 작은 솔숲 너머로 어떤 물건이 구름인 듯 아닌 듯, 바위인가 아닌가 싶은 것이 은은히 보였다. 붉고 고운 것이 아롱져서 자세히 보려 해도 분간이 어려웠다.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말했다. “사인암이 이곳에 있습니다.” 밤에도 감히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자니, 마치 장차 뜻 높은 훌륭한 선비를 보려하는 사람이 반드시 먼저 기운을 엄숙히 하고 마음을 비우는 듯이 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 이끌어 흐르는 물에 씻고 선대(仙臺)에서 옷깃을 털고서 시냇물을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바라보니 이른바 사인암이란 것이 우뚝 솟아 낮춰 절하려 하는 듯하여 나도 몰래 무릎이 절로 꿇어졌다. 아아! 한빈(漢濱) 선생께서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 백 걸음 밖에서부터 걸음마다 우러러보며 곧장 그 아래에 이르렀다. 서서보고, 앉아서 보고, 누워서 보며 한참 동안 능히 떠나가지 못하였다. 그런 뒤에야 그 아름다움이 있는 곳을 다 얻을 수 있었다.
(西望短松林外, 有物隱隱, 如雲非雲, 如石非石, 丹麗絢斕, 諦視難辨. 問之土人, 曰 : “舍人巖在此處矣.” 夜不敢解衣而寢, 如將見高人善士者, 必先氣肅而心虛. 早起相引, 濯于流泉, 振衣于仙臺, 循溪而北, 望見所謂舍人巖者, 翛然欲下拜, 不覺膝之自屈也. 噫! 漢濱先生豈欺我哉. 自百步之外, 步步瞻凝, 直至其下, 立看之, 坐看之, 臥看之, 臥看之移日不能去然後, 盡得其美之所存.)

글에 보이는 한빈(漢濱) 윤선생은 〈복거기〉에서는 외람되다 하여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문집을 통해 볼 때 그는 부제학을 지낸 윤심형(尹心衡,1698-1754)이 분명하다. 4월 2일에는 앞서 다섯 사람 외에 이인상이 다시 합류하여, 모두 여섯 사람이 이곳에 머물며 노닐었다. 이때 이인상과 이윤영, 그리고 김종수는 사인암을 찬미하는 글을 지어, 암벽에 새긴다. 팔분체의 고졸한 서체로 써진 이 제각(題刻)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새겨진 글은 이윤영의 문집 《단릉유고(丹陵遺稿)》 권 13에 수록된 〈인암집찬(人巖集贊)〉이란 글과 같다. 원래는 ‘사인암집찬’이었을 이 글의 내용은 이렇다.

繩直準平 玉色金聲(승직준평 옥색금성) 먹줄 곧게 수평 잡아 옥 빛 에다 쇳소리라.
仰之彌高 巍乎無名(앙지미고 외호무명) 우러르매 더욱 높아 우뚝하기 짝이 없네.

제각(題刻)에는 1751년 봄에 첫 두 구절은 이윤영이, 셋째 구절은 김종수가, 마지막 넷째 구절은 이인상이 지었다는 뜻으로, “신미춘윤지정부원령찬(辛未春胤之定夫元靈撰)”이라 적어 놓았다. 참고로 윤지(胤之)는 이윤영, 정부(定夫)는 김종수, 원령(元靈)은 이인상의 자이다. 문집의 ‘외(巍)’를 석벽에서는 ‘위(魏)’로 쓴 것이 다르다. 글씨를 쓴 사람은 이인상인 듯 한데, 이윤영의 글씨로 보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네 구절이 모두 자신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옛 성현을 찬미하는 구절 속에서 발췌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처음 두 구절은 모두 주자의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가운데 보이는 구절이다. 먼저 ‘승직준평(繩直準平)’은 〈이천선생화상찬(伊川先生畵像贊)〉의 제 2구다.
둘째 구 ‘옥색금성(玉色金聲)’은 〈명도선생화상찬(明道先生畵像贊)〉의 제 2구다.
셋째 구 ‘앙지미고(仰之彌高)’는 《논어》〈자한〉에서 안연이 스승 공자의 덕을 찬미하여 한 말이고,
넷째 구 ‘위호무명(巍乎無名)’ 역시 《논어》〈태백〉에서 요임금의 위대한 덕을 칭송한 말에서 따왔다. 요컨대 성현의 덕을 찬양한 표현에서 한 구절씩 집구하여 사인암을 우뚝한 군자나 위대한 성인에 견준 것이다.
서응순(徐應淳, 1824-1880)도 《경당집(絅堂集)》에 실린 〈사군산수기(四郡山水記)〉에서 이 글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후, “사군의 산수에는 대저 단릉과 능호의 유적이 많다.(四郡山水, 大抵多丹陵凌壺遺跡 사군산수, 대저다단릉능호유적)”고 말한 바 있다.
사인암의 위 글씨 바로 옆, 물가의 펑퍼짐한 바위 위에는 앞서 박제가가 시에서 노래한 대로 바둑판이 지금도 또렷이 새겨져 있다. 바로 옆의 바위에는 이윤영의 글씨로 ‘난가대(爛柯臺)’란 각자가 보인다. 난가대는 송문흠(宋文欽, 1710-1752)의 《한정당집(閒靜堂集)》에 〈난가대〉시가 실려 있고, 이인상도 《능호집》에 같은 제목의 시 한수를 남겼다. 그 시는 이렇다.

伐木丁丁勞我思(벌목정정로아사) 쩡쩡 나무 찍는 소리 생각만 수고롭네
燕山樵子問爲誰(연산초자문위수) 연자산(燕子山) 나무꾼아 누굴 위해 애를 쓰나
且喚雲臺千日睡(차환운대천일수) 운화대(雲華臺)로 불러와 천 날 동안 잠자면서
僊山無事學看棋(선산무사학간기) 선산(仙山)에서 일없이 바둑 구경 배워보세.

멀리서 들려오는 나무꾼의 나무 찍는 소리에 한가로운 연상을 떠올려 본 것이다. 이곳 운대로 불러와 신선들의 바둑 구경이나 하면서 지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시 속의 운대(雲臺)는 운화대(雲華臺)를 말한다. 난가대 바로 뒤쪽, 사인암에서 두 바위가 갈라져 문처럼 생긴 좁은 계단을 접어들기 전에 있는 바위를 말한다. 바위에는 이인상 특유의 전서체로 새겨진 제각(題刻)이 하나 더 있다. 이 글은 문집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有時芬氳(유시분온) 이따금 고운 기운
月色英英(월색영영) 달빛도 어여뻐라
雲華之石(운화지석) 구름 꽃 바위이니
愼莫鐫名(신막전명) 이름 삼가 못 새기리.

본문 곁에는 작은 글자로 ‘원령(元靈)’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인상의 전서 바로 곁에는 해서로 쓴 이윤영의 ‘운화대’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둥근 원 안에 ‘윤(胤)’자를 써서 글쓴이를 밝혔다.
《단릉유고》 권 9에 운화대를 노래한 시가 세 수 실려 있다. 〈운화대차사천대부운증백운선사지선(雲華臺次槎川大父韻贈白雲禪師智仙)〉과 〈운화석실차원령이절(雲華石室次元靈二絶)〉이 그것이다. 뒤의 두 수를 읽어본다.

松覆樓何短(송복루하단) 솔이 덮어 누각은 단촐도 한데
雲歸嶽始尊(운귀악시존) 구름 걷자 묏부리 비로소 높다
著書期永業(저서기영업) 글 지음은 학업 오램 기약함이니
同卜水東村(동복수동촌) 물 동편 마을에서 함께 지내세.

江屋書燈細(강옥서등세) 강가 집에 책 불빛은 가물대는데
巖棲容榻尊(암서용탑존) 바위 집은 책상 겨우 용납 하누나
喜成偕隱志(희성해은지) 함께 숨을 뜻 이룸을 기뻐하노니
桃杏自開村(도행자개촌) 복사꽃 살구꽃은 절로 피었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당시 운화대 바위 위에 작은 석실을 들였던 듯하다. 운화대에서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기둥처럼 우뚝 서 있는 바위가 있다. 바위 면은 마치 깎아 다듬은 듯 반반한데, 여기에 다시 이윤영의 단정하고 힘 있는 전서 8자가 새겨져 있다.

獨立不懼(독립불구) 홀로 서도 두려움 없고
遯世無悶(둔세무민) 세상 피해 근심 없다.

이 글은 《주역》 택풍대과(澤風大過) 괘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두려움을 모르는 군자의 기상을 말했다. 이인상의 둥글고 네모난 전서와는 달리 꽉 짜여 각진 이윤영의 전서는 늘씬하고 단정하다. 글씨 옆에는 ‘윤지(胤之)’란 두 글자가 역시 전서체로 적혀 있다. 예전 정자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아래쪽 사찰에서 운영하는 삼성각이 세워져 있다. 삼성각을 둘러싼 암벽에도 각자(刻字)가 여럿 남아 있다.
가장 큰 글씨는 삼성각 왼편 암벽에 새겨진 ‘퇴장(退藏)’이라고 쓴 전서체의 두 글자다. 필체로 보아 이인상이나 이윤영의 것과는 느낌이 다르고, 글자의 모양도 특이하다. 서명에는 ‘운수(雲叟)’로 적혀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 분명치 않다. 또 삼성각 오른편 벽에는 단정한 해서체로 "탁이불군(卓爾弗群) 확호불발(確乎不拔)"의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관지(款識)에는 ‘사원(士元)’이라 하였다. 역시 누구의 글씨인지 분명치 않다. 그 뜻은 “우뚝하여 무리 짓지 않고,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역시 군자의 확고한 몸가짐을 다짐한 내용이다. 일설에 이윤영 당시 단양군수를 지낸 조정세(趙靖世)가 쓴 것이라고도 한다. 흔히 관광 책자에 소개된 것처럼 우탁(禹卓)의 글씨는 아니다.
다시 삼성각의 뒤로 돌아 나가면 그 뒤편 절벽의 막힌 틈 사이로 작은 공간이 열려 있다. 그 공간 사이에 다시 이윤영이 전서체로 쓴 ‘소유천문(小有天門)’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예전에 작은 문이 있어 사인암 꼭대기로 통하는 입구가 되었던 듯한데, 지금은 축대를 쌓아 막아버려서, 이윤영의 글씨 또한 여간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윤영은 훗날 이곳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사인암을 잊지 못했다. 다음은 권 14에 실린 〈잡저〉에 실린 내용이다.

계유년(1753) 동지 날 새벽에 꿈을 꾸었다. 사인암은 수정 절벽이 되어 있었다. 붉은 해가 구름을 헤치고 나오자,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이인상 김종수와 더불어 그 아래에서 감탄하며 감상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손으로 어루만지자니, 갑작스레 쇠 부처가 되더니만 머리 꼭대기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뒤쪽에는 명(銘)이 써져 있었다. 정유년에 썼다고 했다. 몇 줄의 행초(行草)는 필법이 굳세면서도 아름다웠다.
(癸酉至日曉夢, 舍人巖成水晶壁. 紅日露雲, 光熒透射. 與元靈伯愚, 歎賞其下. 近而摩挲, 忽成鐵佛, 頭上放光, 背有銘誌云, 丁酉題. 數行行草, 筆法遒媚.)

이인상이 지은 〈수정루기(水晶樓記)〉에도 이 꿈 이야기가 나온다. 이 꿈을 꾼 뒤 이윤영은 수정절벽으로 변해버린 꿈 속 사인암의 풍경을 잊지 못해 아예 자신의 서루(書樓)에 ‘수정루(水晶樓)’란 편액을 내걸었던 모양이다. 원래 그가 소장한 기완(器玩) 중에 수정으로 된 필산(筆山)이 있었다. 숙부인 삼산(三山) 이태중(李台重, 1694-1756) 공이 그에게 준 물건이었다. 이후 이윤영은 이공과 윤심형 양공을 모시고 단양으로 가서 그곳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이윤영은 사인암의 바위 위에 두 사람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그 후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뜨고, 이윤영도 한양의 서성(西城)으로 이사하여 방에 있던 수정필산만 쓸쓸히 방안에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위에 본 인용처럼 이윤영은 꿈을 꾸었다. 꿈에 단양 땅에 들어가 40장이나 되는 사인암을 보았는데, 이것이 모두 수정산(水晶山)으로 변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대개 두 어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꿈에 수정산으로 변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정루란 편액을 내걸고, 이인상은 그를 위해 〈수정루기〉를 지어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윤심형은 이윤영의 스승으로 그를 단양으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인상은 〈수정루기〉에서 “두 분이 돌아온 뒤 이윤영은 사인암의 바위 위에 두 분의 이름을 새겨, 환히 물에 비치니, 지나는 사람이 이를 사모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광하(申光河, 1729-?)의 《진택집(震澤集)》 권 11에 실려 있는 〈사군기행(四郡紀行)〉중 사인암조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석문이 있는데 석문에는 이름을 새긴 것이 많았다. 양편에 팔분체와 전자체가 있는데, 모두 이윤영의 글씨다. 또한 원령 이인상의 글씨도 있다. 위쪽에는 “붉은 절벽 푸른 뫼에 돌아갈 꿈 있나니, 흰 바위 맑은 물서 이 말을 들었노라. 丹厓碧嶂有歸夢, 白石淸川聞此言”고 쓴 14자는 윤심형의 글씨로 도장의 표시가 있다. 석문을 통해 올라가면 층계 같은 것이 있고, 또한 사람이 쌓은 것이 있다. 한 칸 띠로 엮은 정자가 있는데 서벽정(棲碧亭)이란 편액을 걸어놓았다. 대개 이백의 시어에서 취해온 말이다. 이것도 이윤영이 세운 것이다.
(有石門, 門扇多題名. 左右有八分篆字, 皆胤之之筆. 亦有李麟祥元靈之筆. 上有‘丹厓碧嶂有歸夢, 白石淸川聞此言’十四字, 尹心衡之筆, 有圖識. 由石門, 躋而上, 有若層階, 亦有人築者, 有一間茅亭, 扁以棲碧, 取靑蓮語也. 亦胤之之所搆.)

이로써 앞서 박제가의 시에 본 계단 위의 작은 정자 이름이 서벽정(棲碧亭)임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윤영이 큰 스승으로 존경해마지 않았던 윤심형의 글씨도 친필의 유려한 행서체로 지금까지 또렷이 남아 있다. 다만 원문은 신광하의 기록과는 달리 `단애벽장(丹厓碧嶂)’이 ‘청산녹수(靑山綠水)’로 되어 있고, ‘청천(淸川)’이 ‘청천(淸泉)’으로 달리 적혀있다. 새겨진 인문(印文)을 판독해 보니 ‘윤심형인(尹心衡印)’ 네 글자가 또렷하였다.

역대 제가들의 기행문 속에도 사인암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다. 이 글에서 모두 소개할 수는 없고, 대표적인 몇 작품만을 선별해 읽어 본다. 먼저 이윤영이 지은 〈사인암기(舍人巖記)〉 전문을 우리말로 옮긴다.

사인암은 높이가 40장인데, 동쪽을 향해 섰다. 시냇물이 그 앞으로 흘러간다. 사인암 밑의 바위는 또 마루나 섬돌, 또는 편안한 침상이나 물건 두는 안석처럼 펑퍼짐하여, 높고 낮고 평평하고 기운 것이 제각기 마땅함을 얻었다. 8,90명이 앉아 술자리와 붓 벼루를 마음대로 앞에 펼쳐 놓고, 시냇물을 굽어보며 장난치면서 양치질도 하고 씻을 수도 있다.
사인암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 50여보 쯤 되는 곳에 사인암의 북쪽 밑둥이 물에 잠겨 있다. 물이 깊어서 배를 띄울만 하다. 사인암 아래서 노니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류의 얕은 곳을 취해 건너온다. 시내를 버리고 밭두둑 사이로 가서 서당의 담장 밖을 지나 사선대(俟仙臺) 솔숲을 나서면 절벽 아래 또 얕은 곳과 만나 시내를 건넌다. 마침내 시내를 끼고 북쪽으로 가면 얼마 후 사인암 아래로 이르게 된다.
사인암에 이르기 10여보 전에 사인암의 남쪽 머리가 끝나는 곳이 보인다. 마치 병풍이나 부채를 꺾어 접은 듯하여, 반듯하면서 곧고, 굽고도 깊어, 바라보면 몹시 기이하였다. 사인암이 끝나면 다시 바위가 있다. 갈라서서 있는 것이 마치 문과 같다. 문을 따라서 들어가면 마치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양편에 담장처럼 깎아질러 서 있고, 위쪽은 소나무가 무슨 장막인양 덮고 있다. 사인암의 서쪽은 쪼개져서 위쪽은 떨어지고 아래쪽은 붙어있으니, 마치 도끼나 톱을 써서 새겨 갈라놓은 것 같아 제각금 자태가 다르다.
봉취암(鳳嘴巖)에 이르러 또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남쪽으로 틀면 바위는 마침내 절벽을 이루는데 형세가 둥글다. 그 가운데 수백 이랑의 논이 있다. 폭포가 또 가운데서 쏟아져서 그 논에 물을 대니, 길이가 15장 가량 된다. 폭포에서 남쪽으로 십여 보를 가면 또 석실이 있다. 두 사람이 책을 잡고 앉아 있을 만하다. 절벽이 끝나는 곳에 작은 묏부리가 있다. 돌아서 서쪽으로 가면, 사선대가 다시 이곳과 서로 가깝다. 시내 양편의 바위는 희기가 눈 같아, 앉아있으면 일어설 줄 모른다. 가지런하게 깎아 대(臺)를 만들고, 펼쳐서 물을 받는다. 물이 그 속으로 들어오면 마치 큰 구유통이 흘러 넘치는 것만 같다. 대(臺) 위에는 펑퍼짐한 돌로 바닥을 삼았다. 물의 흐름은 맑고도 얕다. 그 형세가 감돌아나가 구름 비단의 무늬를 만든다. 대 아래쪽은 물이 깊고 돌이 커서, 둥근 물거울이 환하다. 양편의 솔숲 그늘에는 사람이 앉아 낚시를 하는데 종종 아낄만한 광경이다. 그러나 감돌아 나가는 기이한 경관은 이 몇 곳에만 있지는 않다.
사인암 동쪽면의 바위는 마치 쌓지 않고 단을 올린 것 같고, 갈지 않고 만든 비석 같다. 모나고 평평하고 높으면서도 똑발라서 단 칼에 곧장 끊어 갈라터지거나 튀어나오고 움푹 팬 흔적이 없다. 비록 솜씨 좋은 장인이 승묵(繩墨)과 자척을 잡게 하더라도 이보다 더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인암의 면세는 붉지만 검지는 않고, 푸르면서도 시커멓지는 않다. 청화하고 고아하여 오채가 무늬처럼 뒤섞여 있어, 채색하거나 덧칠한 흔적이 없다. 비록 화공으로 하여금 색채를 베풀게 하더라도 그 모습을 본뜰 수는 없다.
사인암의 반짝이는 빛은 멀리서 바라보면 사랑스럽고, 다가가서 보면 공경할만 하다. 단정하고 엄숙하며 화기롭고 깨끗하여, 엄숙하면서도 뻣뻣하지 않으니, 하루 종일 마주하고 있어도 싫증나는 줄을 모른다. 또 감히 태만하고 건방진 생각을 먹을 수가 없다. 사인암의 기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이한 곳에서 지극히 기이함이 생겨나오고, 우아하고 소박한 가운데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깊은 산 깎아지른 골짜기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면서 티끌 하나 이르지 않는다. 마치 화표주(華表柱)처럼 우뚝하게 서 있어, 백학이 장차 적성(赤城)으로 돌아오려 하매 자옥한 노을 기운이 표지를 세워주는 것만 같다. 임종(林宗)이 이를 본다면 마땅히 “곧으면서도 세속과 끊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고, 요부(堯夫)가 이를 본다면 마땅히 공중누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감히, “먹줄 곧게 수평 잡아, 옥빛에다 쇳소리라. 繩直準平, 玉色金聲.”란 여덟 글자를 취하여 받들어 석장(石丈)을 위한 찬사로 바칠 뿐이다.
(舍人巖高四十丈, 東向立, 溪水流其前, 巖下之石, 又盤陁如堂如陛, 如安牀如置几. 高下平仄, 各得其宜. 可以坐八九十人, 尊俎筆硯, 隨意在前, 俯弄溪水, 可漱可濯. 循巖自北而南, 爲五十餘步, 巖之北根浸于水, 水深可航. 人之遊巖下者, 必取下流淺處涉之. 捨溪行田畝中, 過書堂牆外, 出俟仙臺松林, 壁下又得淺處, 涉溪. 遂挾溪北行, 良久乃至巖下, 未至巖十餘步, 見巖之南頭盡處, 如屛扇折摺, 方而直, 曲而奧, 望之甚奇. 巖盡而復有巖, 拆立如門. 從門而入, 如入室中. 左右削立如牆壁, 上覆松如帷幕. 巖西拆昻低離合, 如用斧鋸刻畵, 各異其態. 至鳳嘴巖, 而又南轉, 南轉之, 巖遂成壁勢彎. 其中有水田數百畝, 瀑水又當中瀉下, 以灌其田, 長可十五丈. 瀑泉之南十餘步, 又有石室, 二人可把書而坐. 壁止而有小岡, 環而西竢仙之臺, 復與此相近矣. 溪兩傍石白如雪, 坐而忘起. 整斲成臺, 展開受水. 水入其中, 如大槽盈溢. 臺上亘石爲底, 水流淸淺, 其勢回旋, 作雲錦之文. 臺下水深石濶, 圓鑑通明. 東西松林蔭, 人坐釣, 種種可愛. 然其環奇之觀, 不在此數處. 而在四十丈東面之石夫, 如壇而不築, 如碑而不磨. 方平峻正, 一刀直斷, 無缺剥凹凸之㾗. 雖使巧匠執繩尺無以過之者. 舍人巖之面勢也, 丹而不焦, 蒼而不黝. 淸華古雅, 五彩錯文, 無渲染點綴之跡. 雖使畵工施粉墨, 無以倣其貌者. 舍人巖之輝光也, 望之而可愛, 卽之而可敬. 端莊和潔, 肅而不厲, 終日對之, 而不知其厭. 又不敢生怠傲之意者. 舍人巖之氣像也, 平易處生至奇, 雅素中有純美. 不在深山絶壑之中, 而一塵不到, 如華表特立, 白鳥將返赤城, 鬱鬱霞氣建標. 林宗見之, 當曰: 貞不絶俗. 堯夫見之, 當曰: 空中樓閣. 然曰余小子敢取繩直準平玉色金聲八字, 奉爲石丈之贊辭耳.)

사인암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답게 사인암의 주변 경관을 세부적으로 섬세하게 잘 묘사하였다. 남유용(南有容, 1698-1773)은 《뇌연집(雷淵集)》 권 14에 실린 〈동유소기(東遊小記)〉에서 “사인암은 물이 얕고 맑으며, 돌이 적고 깨끗하여 절로 사람을 머물게 만드는 뜻이 있다.(舍人巖水淺而湛, 石少而潔, 自有留人意)”고 하였다.
신광하는 앞에서 본 글에서 “사인암은 예전 사인 우탁이 살던 곳이다. 선대(仙臺)의 아래에는 맑은 못이 달빛을 받아 텅비고 환했다. 우러러 암벽을 보니 푸르스름한 것이 마치 뜻높은 선비가 두 손을 맞잡고서 읍을 하며 장중하게 홀로 서있는 듯 하여 범할 수 없는 모습이 있었다. 또한 우탁 선생의 높은 풍모를 떠올릴만 하였다.(巖故禹舍人址也.(중략) 臺下澄潭受月虛明, 望見巖壁蒼然, 若高人拱揖, 凝重獨立, 有不可犯之容, 亦可想舍人之高風也.)”라고 적었다. 사인암은 고려말 우탁(禹倬, 1263-1342) 선생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을 때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이 이름을 얻었다. 신광하는 이 일을 환기시킨 후, 고인(高人)이 읍을 하는 듯 하여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 느껴진다고 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에서 “동구에서 보니 깎아 세운 듯 한 석벽이 있는데, 평평하기가 자로 잰 듯 하였다. 아래는 맑은 못이 깨끗하고 고결하여 마치 고야산의 선인과 같았다.(洞口見, 有石壁削立, 其平中準, 下爲澄潭, 粹然高潔, 若姑射之仙人.)”고 적었다. 이어 그는 사인암에 얽힌 흥미로운 고사를 소개하였다.

예전 승지 오대익이 이곳 꼭대기에서 나무로 깎은 학을 타고 백우선을 들고서 노끈을 소나무에 매고서 하인 두 사람을 시켜 천천히 놓아 아래로 맑은 못위에 이르게 하고는 이를 일러 ‘신선이 학타고 노는 놀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기이하다.
(昔吳承旨大益, 于此頂乘木鶴執白羽扇, 以繩繫松, 令二僕徐放之, 下至澄潭之上, 號之曰仙人騎鶴之游. 其亦奇矣.)

한진호(韓鎭㦿, 1792-1844)의 장편의 기행문 《입협기(入峽記)》에는 〈사인암별기(舍人巖別記)〉란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위 오대익의 기학(騎鶴)고사 외에 또 다른 흥미로운 고사가 소개되어 있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단양의 빼어난 경치로는 오암(五巖)이 있다고 한다. 삼선암과 운암, 그리고 사인암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사인암을 보니 참으로 하나의 웅장한 경관이었다. 일찍이 들으니, 예전에 그림을 잘 그렸던 김홍도를 연풍현감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가서 사군의 산수를 그려 돌아오게 하였다. 김홍도가 사인암에 이르러 그림을 그리려 하였으나 그 뜻에 차지 않았다. 십여일을 머물면서 골똘이 바라보고 생각을 수고로이 하였으나, 마침내 참된 형상을 얻지 못한 채 돌아갔다.
(世稱丹陽之勝有五巖. 謂三仙巖及雲巖與舍人巖也. 今見舍人巖, 眞一瑰觀. 曾聞, 先朝以善畵人金弘道, 爲延豊縣監, 使之往畵四郡山水而歸. 弘道至舍人巖, 欲繪未得其意, 留至十餘日, 熟玩勞思, 竟未得眞形而歸.)

이는 김홍도가 52세 되던 병진년(1796)년의 일이다. 하지만 김홍도의 병진년화첩에는 사인암도가 엄연히 남아 있다. 그가 그림을 완성한 시점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사인암에 압도되었던 김홍도의 사인암 그림과 실제 사인암의 풍경을 비교해보면 그의 고심처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상 박제가의 사인암시와 답사를 통해 본 각종 제각(題刻), 그리고 여기에 얽힌 이윤영과 이인상의 이야기, 여러 문인들이 남긴 사인암 관련 기록을 거칠게 간추려 보았다. 바위 하나에도 문화가 흐르고, 선인들의 숨결이 뛰노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문헌의 고증 없이 풍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들이 도처에 넘쳐나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바른 이해에 큰 장애가 되고 있음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