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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도연명 음주 20-10수(陶淵明 飮酒 20-10首)

오늘날 사용하는 한자의 기원은 약 3,300년 전 갑골문(甲骨文 : 거북 배껍질(甲)과 짐승의 뼈(骨)에 새겨진 중국 은(殷), 상(商) 시기의 문자)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시대가 변천하면서 서체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다섯 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있다.

편리한고 실용적인 의사전달 수단에서 글자의 구성과 조화, 균형적 감각에서 미적, 예술적으로 변천되어 오면서 오늘날 서예라는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서(隸書)의 탄생은 진(秦)나라 시황제(秦始皇帝) 때 재상 이사(李斯:?∼BC 208)는 대전(大篆)을 간략하게 한 문자를 만들어 황제에게 주청(奏請), 이제까지 여러 지방에서 쓰이던 각종 자체(字體)를 정리·통일하였는데 이를 소전(小篆)이라고 한다.

소전은 쓰기에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마침 동시대에 정막(程邈)이라는 인물이 10여 년을 연구하여 예서(隸書) 3천 자를 만들어 진시황에게 진상했다고 사서에 나온다. 일설에는 정막(程邈)은 옥리(獄吏 : 감옥을 관리하는 간수 혹은 죄수들의 심문(고문)을 담당하던 형리)였다가 진시황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는데 감옥 안에서 예서를 만들어 바친 공으로 사면되었다고 한다.

서사회요(書史會要 : 중국 명말(明末)의 畵論書)에는"담사십년 변전위예 득삼천자주지(覃思十年 變篆爲隸 得三千字奏之 : 십년을 깊이 생각하여 전서(篆書)를 예서(隸書)로 만들어 삼천자를 바쳤다)"라고 하였고, 한서 예문지(漢書 藝文志 : 정사(正史) 기록 중 당시 존재하던 전적(典籍)의 목록을 수록하여 엮은 것)의 주(注)에는 "예서역정막소헌(隸書亦程邈所獻 : 예서는 또한 정막이 바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서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파세(波勢)와 갈고리(구.鉤), 파임(책.磔)과 같은 필세가 강하게 나타나는데 특히 동한(東漢) 시대의 예서를 팔분(八分)이라고 별칭(別稱) 하기도 했다.

나 또한 젊은 시절 조전비(曹全碑 : 중국 후한(後漢) 때인 185년에 세워진 합양령(郃陽令) 조전(曹全)의 공덕을 찬양한 비)를 법첩(法帖)으로 공부하였으며, 이후 예기비(禮器碑 : 중국 후한(後漢) 환제(桓帝)의 영수(永壽) 2년에, 노(魯) 나라 재상 한래(韓勑)가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이곳에는 한 이하 역대의 비가 많이 있어 곡부비림(曲阜碑林)이라 한다)를 수리하고 제기를 바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 마지막으로 등석여(鄧石如. 1743 ~ 1805. 청나라 안휘(安徽) 회녕(懷寧) 사람. 본명은 염(琰)이고, 자는 석여(石如) 또는 완백(頑伯)이며, 호는 완백산인(完白山人) 또는 급유산인(笈游山人)이다.)의 예서 서법을 위주로 임서(臨書)했다.

 

이처럼 내가 법첩으로 연습한 예서는 여러 필의(筆意)가 담겨있다. 연이어 도연명의 음주 10수를 예서체(隸書體)로 자서(自書) 해 보았다.

 

도연명 음주 20-10수(陶淵明 飮酒 20-10首)

在昔曾遠游(재석증원유) 오래전에 군대를 따라 멀리 갔다가

直至東海隅(직지동해우) 바로 동해 입구까지 이르렀네

道路逈且長(도로형차장)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으며,

風波阻中途(풍파조중도) 중도에 비바람이 심해 고생도 했다.

此行誰使然(차행수사연) 이 행군 누구를 위해서 인가?

以爲飢所驅(이위기소구) 생각하니 가난 때문에 내 몰린 것이리.

傾身營一飽(경신영일포) 궁핍해지면 노력하여 배는 채울 수 있고

少許便有餘(소허편유여) 젊어서라면 편하고 여유로울 수 있겠지만

恐此非名計(공차비명계) 그 길이 명예로운 계책이 아니니

息駕歸閑居(식가귀한거) 가는 길 돌아서 전원으로 왔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