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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대전사 부도, 비문 해석(大典寺 浮屠, 碑文 解釋) : 국일도대선사양종정사경월당지비(國一都大禪師兩宗正事慶月堂之碑)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청송 주왕산 대전사에 약 3개월을 머물게 되었다. 올해 무더웠던 여름을 청송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밤에도 20도를 넘지 않아 공기 맑고 시원한 이곳은 여름 지내기에는 최적의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명소 소개는 앞서 '청송 주왕산 대전사 탐방'에서 많은 사진자료와 함께 올려놓았기에 참고하기 바란다.


뜻하지 않은 인연은 정부자금으로 전국 명찰에 대한 고색창연한 옛 사찰의 모습을 되찾고자 사찰내 노출된 전기, 통신, 방송설비를 지중화하고, 건물 외벽에 설치된 현대적 시설 등은 보이지 않도록 내벽 또는 매립 형태로 시공하는 시범사업 프로젝트 현장 책임자로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경내에 있는 소박하고 단아한 부도 4기에 대한 궁금증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들께 여쭤보니 아무도 각서 내용을 모르고 있으며, 스님 말씀으로 종단에 문의하였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불가라는 답변을 듣고 나름 욕심이 발동하여 그간 축적된 고금석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 며칠에 걸쳐 독해를 한 끝에 나름 궁금증이 해소되어 이를 상좌 스님께 보여드렸더니 주지스님(법일스님)께서 기뻐하시면서 경월당 비문 해석을 간곡히 부탁해보라는 지시를 받고 상좌 스님께서 나에게 주지스님 숙원사항을 풀어달라는 요청에 사찰 입구 강변에 방치하다시피 한 경월당 비를 물로 세척하여 수십 장을 사진을 찍어 이를 바탕으로 약 1천여 비문 글자를 한글로 입력 후 한문으로 변환하는 작업과 비문 해석 작업을 약 2개월에 걸쳐하였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미천한 나로서는 불교용어 사전, 독해가 불가능한 몇 문장은 전문가에 의뢰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나름 해석을 하였으나, 부족하거나 오류가 많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완성된 자료는 프린트하여 파일과 함께 상좌 스님께 드렸는데 한 달에 한두 번 대전사에 들리는 주지스님께 보고를 하였고 주지스님은 내용을 확인한 후 흡족해하시며 잘 보관하라는 말 외에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들었으며, 그날 이후 주지스님, 상좌 스님으로부터 고생했다, 수고했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나름 씁쓸하고 야속한 일이겠으나 오랜만에 경월당 대 선사의 비문을 접하면서 그 내용을 알아가는 기쁨이 더 컸기에 그 노력한 기록을 블로그를 통하여 남겨보고자 한다.

적어도 명찰의 주지 정도라면 본인이 원한 숙원사항 하나를 간곡한 부탁에 의하여 노력한 중생에 대한 차 한잔의 대접은 바라지 않더라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주지에 대한 도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방 불교방송 이사장, 최고급 승용차에 기사까지 둔 이 주지는 말사 대전사의 본사인 은해사 주지 자리를 놓고 선거운동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성철스님 이후 몇 소수의 스님을 제외하고 다 이와 같은 현실일 것이며, 소수 존경받는 스님이 참된 불교계를 이끌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10~20년 경전을 제대로 공부한 스님이라면 이 정도의 비문 해석은 기본일 텐데...... 대전사에 머무는 동안 설명이 없는 이여송이 사명당 대사에게 보낸 초서 편액, 범종루 상량문 등을 해석과 함께 올려 보았다.

 

청송 주왕산 대선사 탐방 : 청송 주왕산 대전사 탐방(靑松 周王山 大典寺 探訪) (tistory.com)

부도각서 독해(우측부터)

 

①甲午九月 日 樂眞堂惠雄大師 康熙王十三年 (갑오구월 일 낙진당혜웅대사 강희왕십삼년)

 

② 慶月大和尙舍利塔 ( 경월대화상사리탑)

 

③正面 : 심한 마모로 판독불가. 側面 : 釆眞堂明信首座(변진당명신수좌) 乾隆二十年乙亥三月 日 (건륭이십년을해삼월 일) 側面내용으로 보아(正面 : 釆眞堂明信大師)각서로 추정

 

④ 淸心堂太玉大師( 청심당태옥대사)

 

부도를 옮기면서 순서를 다르게 배치하였음. :(우측부터) 원래 위치에 대한 고증은 1960년 어느 여행가에 의하여 촬영된 사진자료를 참고하여 원래 배치 순서는 우측을 기준으로 (좌측 4번이 우측 1번으로, 두번째는 그대로, 첫번째는 3번으로, 세번째는 4번으로) 4기 중앙에 경월당 비가 배치되었음.



(경월당 비문 정면)

國一都大禪師兩宗正事慶月堂之碑(국일도대선사양종정사경월당지비)
나라에 으뜸이시고 대선사 이시며, 불교계 최고의 지도자 이신 경월당 의 비

(좌측면)


崇禎紀元後四丙午閏五月 立(숭정기원후사병오윤오월 입)
1846년 윤 5월에 비를 세우다

舍利塔立於碑閣後 門人壯旻謹書.(사리탑임어비각후 문인 장민근서)
사리탑을 세우고 비각을 사문인(沙門人) 장민이 삼가 글을 쓰다

(비 후면)


大典釋壯旻 爲其師慶月 建浮屠以壽傳之記 來屬于余 夫沙門高手 在在有之 然不于釋而必于儒者 其意益有以也 余旣嘉尊師之誠 而湥感慶月所號之義 遂爲之言曰 萬理一本 無本便無理 有理便有本 萬物本乎天地 萬衆本乎父母 此理也 世之論釋氏曰 無父無君 是豈理哉 今其道澹於世 累高行 其志過乎中 而近乎無故也 雖或一道 要不外理 豈眞無本無理 而別有其道哉.
대전석(大典釋:대전사의 중) 장민(大典釋壯旻)이 그의 스승 경월(慶月)을 위해서 부도(浮屠)를 세워서 오랫동안 전하는 기록을 나를 찾아와서 부탁하였으니, 사문(沙門)의 고수(高手)는 곳곳마다 있다. 그러나 석(釋: 중)이 아니고 반드시 유자(儒者)를 찾은 것은 그 뜻이 더욱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존사(尊師)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리고 경월(慶月)의 호(號)의 뜻에 깊이 감동하였으니, 드디어 말을 한다.
일만 이치는 근본이 하나이니, 근본이 없으면 이치도 없고 이치가 있으면 근본이 있으니, 만물은 천지에 근본하고 일만 대중은 부모에 근본 하는 것이 이런 이치이다. 세상에서 석 씨(釋氏)를 논하기를,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다.”
고하니, 이것이 어찌 이치이겠는가! 오늘날 그 도(佛道)는 세상에 담박하고 자주 고행(高行)을 하니, 그 뜻은 중용(中庸)에 지나가고 무(無)에 가깝기 때문이다. 혹 하나의 도(道)라는 것은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진실로 근본도 없고 이치도 없는데, 별달리 그 도가 있겠는가?

和尙法名有成俗姓金氏 首露王其鼻 祖父諱惠泰母裵氏以 英廟壬午正月二十日生師于慶州府月城里盖其堂號以父母之鄕 而不忘其本也.
화상의 법명은 유성(有成)이요, 속성은 김 씨이다. 신라 수로왕(首露王)이 그 시조이다. 부의 휘는 혜태이며, 어머니 배 씨가 임오년 정월 20일 경주부 월성리에서 스님을 낳았다. 그의 당호는 부모의 향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慶주부 月성리에서 각각 첫자를 따서 법명을 정함)

十六遊蕭寺 見淸淨之行因感悟遂落髮于東慏堂修寬和尙受法乎 雄波堂偉性大師吐含山佛國即本寺 其淵源則西山堂休靜大師之十二世法孫 松桂堂懶湜大師之五世法孫也
晩棲于靑松府周房山白蓮蘭若.
16세에 절을 찾았다가 스님들의 청정한 행실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출가를 하였고 마침내 동명당 수관 화상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았다. 토함산 불국사를 본사로 웅파당(雄波堂) 위성(韋性) 대상의 법을 이어받았으니 그 법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산당 휴정 대사의 12세 법손이 되었으며, 송계당 나식 대사의 5 대법 손이다. 만년에는 청송부 주왕산 백련암에 머물렀다.

晝常默誦秘呪夜每聸天拜斗不求自家福田心所祝願者壽 君福國也嗚呼賢哉
낮에는 항상 고요히 진언을 외우고 매일 밤에는 하늘을 우러러 북두칠성에 예배드렸다.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의 타고난 은덕인 복 밭의 마음자리를 잊지 않음 이요 나아가 임금의 장수와 나라의 복됨을 축원하기 위함이었으니 아! 그 어지심이여!

師其悟道之特高者乎 全其本而理亦具焉晝其理而道亦至焉豈若是世所謂修鍊之忘其本乖其理者之可及也.
스님의 가르침에 깨우친 자는 특별히 높은 자들이었으니, 그 근본을 온전히 하고 이치도 또한 갖추어져 있고 그 이치도 역시 지극하니, 그 이치가 어찌 세상에 이른바 수련하는 것을 잊어 그 본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잊는 자가 미칠 수 있겠는가.

天稟仁厚器度眞默遍遊名勝參詳禪經僧寮佛龕捎○而剏茸愚髠凡緇說法 而敎訓屢經表忠院春曹之薦任每參諸法事無遮之勝會非徒嶺湖之緇衲皆宗之當世牧伯士君子之遊於玆山者必先訪而談玄說理稱爲洞主焉.
스님은 천품이 인후 하였으며, 됨됨이와 그릇이 참되고 무거웠다. 명승지를 두루 노닐면서 참선을 닦고 경전을 익혔다. 저축을 덜어 불전과 요사를 짓거나 수리했으며, 어리석고 범상한 수행자들이 설법을 통해 가르치고 깨우쳤다. 예조에서 임명하는 표충원(표충사)의 직책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으며, 무차대회와 같은 온갖 법사에 참여하였으니,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이 모두 으뜸으로 여겼다. 당시의 벼슬아치나 선비들조차 스님이 머무시는 산에서 노닐 때는 반드시 먼저 방문하여 현묘함을 논의하고 스님을 골짜기의 주인이라고 일컬었다.

一日告弟子曰萬法歸一歸何處言訖而化嗚呼 此其悟道之造乎高妙者乎句非本乎理者孰能覺於此哉 是曰即當宁十二季乙巳八月二十日未時 壽八十四法臘七十八得的傳五人闍黎六人受律儀十餘人闍 維之夕雷雨太作山谷鳴咷靈瑞大放亘繞洞壑如五彩長虹滅而復起翌朝見二顆舍利光彩瑩耀此其靈異所著也.
어느 날 제자들에게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고 이르고는 말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이는 그 도를 깨우치되 묘하게 된 것이니, 구(句)가 이치에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깨닫겠는가? 그때가 을사년 8월 20일 미시였으며, 세수는 84세, 법랍은 78세였다. 법을 이어받은 적통 제자 5인, 아사리 6인, 율의를 전수받은 제자 10여 명이 있다.
다비하는 날 밤에는 큰 비가 내리고 번개가 울려 산과 골짜기를 울렸으며 신령한 상서로움이 크게 일어나 다섯 빛깔 무지개가 온 마을과 골짜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밤새도록 하였다. 다음 날 아침 광채가 빛나는 사리 2 과를 발견하였으니 그 영이(靈異)함의 나타나신 바였다.

即磨浮圖卜吉處奉遠近來觀咸稱神異 林姓人嘉善在根發願三十金先倡施主 以某月日堅石以記 嗚呼 生而悟道没而顯異後之見者想當有感 於斯仍爲之銘曰.
곧바로 부도를 다듬어 좋은 땅을 택하여 봉안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와 보는 사람들은 모두들 신비로운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임 씨 성을 가진 가선 재근이 금 30을 앞서 시주하여 발원하니 모월 모일 견석으로 비를 세워 기록하였다.
아! 태어나서는 도를 깨닫고 돌아가시면서는 신이(神異)함을 나타냈으니 후세에 이 비석을 보는 이들은 마땅히 감명을 받으리라. 이에 아래와 같이 명(銘)을 짓노라.

圓通妙覺理具本立三昧精神二宗偈法樹幡入空彈丸閱刧光明寶珠瑞彩燁燁磨玉礱礦彌藏重(龍+从)四大十地萬古一塔曇雲護擁慧月繞罨百靈繽紛衆生匝還名區寺刹的傳緇衲至今靈異屹然石榻.
원통(圓通), 묘리(妙理)와 이치를 근본으로 갖춘 선사의 삼매는 선종과 교종이 함께 우러르며 이 부도는 만고에 하나뿐인 탑이니 신령한 구름은 항상 보호하며 지키고 밝은 달은 암자를 둘렀다. 중생들이 끊임없이 탑을 도니 이 도량은 명망 있는 사찰이며 법을 물려받는 제자들이 지금까지 신령하니 우뚝한 비석 이도다.

原任翰林同知 經筵春秋館事石帆居士 徐念淳撰.
한림동지(翰林同知)를 역임하였으며
경연(經筵, 함께 성인의 경전을 읽는 자리, 곧 임금의 스승)춘추관사(春秋館事)인 *석범거사(石帆居士) 서념순(徐念淳,1800~1859)이 짓노라.

(비 우측)

受法弟子(적통제자 : 5인)
南虛堂致定 雪峯堂玩沾 印虛堂快明 棲岩堂信翊 玩虛堂壯旻
闍黎(사려) : 아사리.(阿闍梨 : 불교교단의 스승, 스님을 가르치는 교수)
再沾 取演 典益 壯旻 快能 德元
懺悔弟子(참회제자)
月虛 瑞榮 澄影 快慧 蓮波 取演 默菴 戒添 孝菴 德元
受戒闍黎嘉善(아사리 수법자)
仁活 仁彦 仁學 ○永 壯默 壯訔
孫闍黎(손사려 : 法孫아사리)
登仁 德謙 德咸 太訓 快宗 太澄 宗悅 順吉 命俊 丁叔
法孫弟子
九峰 啓壯 大隱 昌活 圓虛 浪賢 凌波 壯詢
施主養 林加弗(비석제작 참여자에 공양 시주한 사람 : 임가불)
刻 綸貫(비석에 글을 세긴 사람 : 륜관)

- 2021년 8월 23일 華岡 金容培 삼가 註解하다.

*석범거사(石帆居士) 서념순(徐念淳,1800~1859)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조(敬祖)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고조는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고, 증조부는 영상(領相) 서지수(徐志修)이며, 조부는 서유후(徐有後)이다. 부친은 서공보(徐恭輔)이고, 생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서춘보(徐春輔)이다. 외조부는 현감(縣監) 이집인(李集麟)과 이응배(李應培)이고, 처부는 구양원(具陽元)이다. 형 서은순(徐恩淳)과 서제(庶弟) 서각순(徐恪淳)‧서흔순(徐忻淳)이 있다.
1819년(순조 19) 식년시에 생원 3등 11위로 합격하였으며, 1827년(순조 27) 증광시에 병과 1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승지(承旨)‧양주목사(楊州牧使)‧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832년(순조 32) 안주목(安州牧)의 집 3백81호(戶)가 불에 탄 일이 일어났을 때, 별 겸춘추(別兼春秋)로서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나아가 백성을 위로하는 데 힘썼다. 1834년(순조 34) 옥당(玉堂)에서 사위(嗣位)를 연명한 차자(箚子)로 청하였다가 왕의 분노를 샀다. 1837년(헌종 3) 도둑이 들어 준원전(濬源殿)에 있던 어용(御容)의 초면(綃面)이 손상되었는데, 관리를 소홀히 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재임용되었다. 1842년(헌종 8) 황해감사(黃海監司) 시절 황해도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심의면(沈宜冕)의 장계로 인해 벌을 받았다가 다시 임용되었다.
1858년(철종 9) 청북 암행어사(淸北暗行御史) 이건필(李建弼)의 서계로 탄핵을 받았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910년(융희 4)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李如松이 四溟堂大師에게 보낸 친필 서신(편액)

贈義僧將(증의승장) : 의승장에게 주다. 松雲大禪伯行(송운대선백행) : 사명당대사백행. 拂下(불하) : 불하*(松雲 : 사명대사의 법호). 無意圖功利 專(무의도공이 전) : 스님의 뜻은 공과 이익에 없고 오로지, 心學道仙 今聞(심학도선 금문) : 마음은 도와 선을 배우다가 이제 듣기로, 王事急摠攝 下(왕사급총섭 하) : 임금의 일이 급하니 승병 모두를 데리고(摠攝 : 僧軍副摠攝 직책), 山巓(산전) : 산에서 내려 오시기 바랍니다. 天朝將太子小傅(천조장태자소부) : 천조장수이며 태자의 스승인, 李如松謹稿(이여송근고) : 이여송이 삼가 쓰다.


大典寺 梵鍾樓 上樑文

龜 諸法從本來 常者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佛記 二五六三 西記 二0一九 己亥年 陰 七月二六 陽 八月二六 日 周王山 大典寺 華嚴 梵鍾 上樑子 龍 : 구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불기서기 2019 기해년 음 7월26, 양 : 8월26일 주왕산 대전사 화엄범종 상량자 용 (제 법은 본래부터 항상 저절로 적멸한 모습이니 불자들이 이러한 도를 행하면 내세에는 성불하리라. 불기 2563년(서기 2019년) 기해년 음력 7월26(양력 8월26일) 주왕산 대전사에 화엄 범종루를 상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