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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범중엄 악양루기(范仲淹 岳陽樓記)

경자년(庚子年) 한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일상의 박탈과 부동산 폭등으로 집 없는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은 멀어졌고 미취업으로 인한 청년들의 한숨은 날고 깊어만 간다. 이런 와중에 법무부 장관은 살아있는 권력에 최대 걸림돌인 검찰총장 끌어내리기에 올인하여 법치와 정의가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또한 매일 천명을 넘나드는 코로나 확진 소식에 기본적인 사회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으며, 자화자찬으로 일관하다 백신 확보에 실기(失期)한 국가 지도자와 정부에 대한 원성은 커져만 가고 있고 세모의 따뜻한 정은 온데간데없이 평소 붐비던 거리마저 활기를 잃었다. 이처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현실은 국민이 선택한 결과로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는 국민보다 앞서 근심하고 국민이 즐거움 이후에 즐겨야 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 명문의 한 구절이 떠올라 서글픈 마음으로 붉은 색지에 은니(銀泥)로 악양루기를 자서(自書)해 보며, 다가오는 신축년(辛丑年)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나은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범중엄(范仲淹. 989년 ~ 1052)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자가 희문(希文)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추밀부사(樞密副使),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면서 교육(敎育), 군사(軍事), 과거(科擧) 제도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반대파의 중상(中傷)으로 쫓겨났다. 여러 주(州)의 지방관(地方官)을 전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겼다.
악양루(岳陽樓)는 악주(岳州) 파릉현(巴陵縣) 성문의 서쪽 누대로, 동정호(洞庭湖)를 굽어보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범중엄이 등주(鄧州)를 다스릴 때, 친구인 등종량(滕宗諒)이 좌천되어 악주(岳州)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때 악양루를 중수(重修)하고 기문(記文)을 부탁하자, 친구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아 써준 명문장의 글이다.

악양루기(岳陽樓記)

慶曆四年春 滕子京謫守巴陵郡(경력사년춘 등자경적수파릉군) 인종 경력사년 봄에 등자경이 좌천되어 파릉군을 다스리니
越明年 政通人和 百廢具興(월명년 정통인화 백폐구흥) 후년에 정사가 잘 되고 인심이 화합하여 온갖 폐지되었던 것들이 모두 복구되었다.
乃重修岳陽樓 增其舊制(내중수악양루 증기구제) 이에 악양루를 중수하여 옛 모습보다 더 크게 짓고
刻唐賢今人詩賦於其上(각당현금인시부어기상) 그 위에 당나라의 현인들과 지금 사람들의 시부를 새기고
屬予作文以記之(촉여작문이기지) 나에게 글을 지어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予觀夫巴陵勝狀 在洞庭一湖(여관부파릉승상 재동정일호) 내가 보니 파릉의 훌륭한 경치는 동정호 하나에 달려 있다.
銜遠山 吞長江(릉승상 탄장강) 먼 산을 머금고 장강을 삼켰으니
浩浩湯湯 橫無際涯(호호탕탕 횡무제애) 드넓고 넘실거려 횡으로 끝이 없으며
朝暉夕陰 氣象萬千(조휘석음 기상만천) 아침 햇살과 저녁 어스름에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此則岳陽樓之大觀也 前人之述備矣(차즉악양루지대관야 전인지술비의) 이것이 바로 악양루의 큰 구경거리인데, 옛사람들이 모두 이를 서술해 두었다.
然則北通巫峽 南極瀟湘(연즉북통무협 남극소상) 그런즉 북쪽으로는 무협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소수와 상수에 닿아

遷客騷人 多會於此(천객소인 다회어차) 좌천되는 나그네와 글을 짓는 이들이 이곳에 많이 모였으니
覽物之情 得無異乎(남물지정 득무이호) 경물을 보는 감정이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若夫霪雨霏霏 連月不開(약부음우비비 연월불개) 만약 장맛비가 계속 내려 몇 달 동안 개이지 않고
陰風怒號 濁浪排空(음풍노호 탁랑배공) 음산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 탁한 물결이 허공을 치며
日星隱耀 山岳潛形(일성은요 산악잠형) 해와 별이 빛을 숨기고 산악이 모습을 감추며
商旅不行 檣傾楫摧(상여불행 장경즙좌) 장사꾼과 나그네가 다니지 않아 돛대가 기울고 노가 부러지며
薄暮冥冥 虎嘯猿啼(박모명명 호소원제) 저물녘에 어둑어둑하여 호랑이가 울부짖고 원숭이가 울어댄다.

登斯樓也 則有去國懷鄉(등사루야 죽유거국회향) 이 때 누대에 오르면 도성을 떠나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憂讒畏譏 滿目蕭然(우참외기 만목소연) 참소에 근심하고 비난을 두려워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쓸쓸하여
感極而悲者矣(감극이비자의) 감정이 지극해져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至若春和景明 波瀾不驚(지약춘화경명 파란불경) 만약 봄날이 화창하고 햇빛이 밝고, 물결이 일지 않아
上下天光 一碧萬頃(상하천광 일벽만경) 위아래의 하늘빛과 푸른 물이 한없이 넓게 펼쳐 있고
沙鷗翔集 錦鱗游泳(사구상집 금린유영) 모래밭의 갈매기들은 날아와 모여들고 아름다운 물고기들은 헤엄치며
岸芷汀蘭 郁郁青青(욱안지정란 욱청청) 언덕의 지초와 물가의 난초가 향기 높고 푸릇푸릇하다.
而或長煙一空 皓月千里(이혹장연일공 호월천리) 혹은 길게 퍼진 안개가 한번 개이고 밝은 달이 천리를 비추며

浮光躍金 靜影沉璧(부광약금 청영침벽) 물에 뜬 달빛은 금빛으로 빛나고 고요한 달그림자는 마치 구슬이 잠긴 듯하며
漁歌互答 此樂何極(어가호답 차락하극) 어부들의 노래 소리 서로 화답하니 이 즐거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登斯樓也 則有心曠神怡(등사루야 즉유심광신이) 이런 때 이 누대에 오르면 가슴이 트이고 정신이 즐거워져
寵辱皆忘 把酒臨風(총욕개망 파주림풍) 영광과 모욕을 모두 잊고 술잔을 잡고 바람을 대하고서
其喜洋洋者矣(기희양양자의) 그 기쁨이 넘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嗟夫!予嘗求古仁人之心(차부! 여상구고인인지심) 아아! 내가 일찍이 옛 성현의 마음가짐을 추구해보니
或異二者之為 何哉(혹이이자지위 하재) 간혹 이 두 가지 경우의 행위와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不以物喜 不以己悲 外物(불이물희 불이기비 외물) 기뻐하지도 않고 자신의 처지 때문에 슬퍼하지도 않아서
居廟堂之高 則憂其民(거묘당지고 즉우기민) 조정의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그 백성들을 걱정하였고
處江湖之遠 則憂其君江湖(처강호지원 즉우기군 강호) 강호의 먼 곳에 머물면 그 임금을 근심하였으니
是進亦憂 退亦憂(시진역우 퇴역우) 이는 나아가서도 걱정하고 물러나서도 걱정한 것이다.
然則何時而樂耶 其必曰(연즉하시이락야? 기필왈) 그렇다면 어느 때에나 즐거워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낙이락여) “천하 사람들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워 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하였으리라

噫! 微斯人 吾誰與歸(희! 미사인 오수여귀) 아! 이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

時六年九月十五日(시육년구월십오일) 때는 경력 6년(1046년) 9월 15일이다.

庚子年 冬至節 華岡居士 書(경자년 동지절 화강거사 서) 경자년 동지절에 화강거사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