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노봉 김극기 시 2수 어옹, 통달역(老峰 金克己 詩2首 漁翁, 通達驛)

김극기(金克己. 1150? ~ 1209?) 고려 명종(明宗) 조의 문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노봉(老)이다. 어릴 때부터 문명이 있었으며, 진사가 된 뒤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시작(詩作)으로 소일하다가, 40대에 이르러 명종의 부름을 받고 의주방어판관(義州防禦判官)이 되었으며,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일 때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김태준(金台俊)은 근거를 밝히지 않은 채 귀국 길에 객사했다고 하였으나, 진정국사호산록(眞淨國師湖山錄)에서는 1209으로 추정되는 기사년(己巳年)에 사망했다고 했으며, 문집 서문에서 6품 당하관(堂下官)으로 죽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귀국한 뒤에 다시 전원생활을 하다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체로 1150년경에 출생하여 60세 정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과의 교유 이외에는 문인들과의 교유가 확인되지 않으며, 문집명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린 많은 시로 보아 ‘거사‘ 노릇을 하면서 유랑 생활을 오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문집 김거사집(金居士集)은 1220년경 당시의 집권자 최우(崔禹)의 명에 의해 고율시(古律詩)·사륙(四六)·잡문(雜文) 등을 모아 한국문학사상 초유의 대규모인 135권으로 간행되었는데, 15세기까지는 전승된 듯하나 그 후 실전되었다.

 

동문선(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시 260여 수가 남아 있고, 산문은 동문선,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등에 60여 편 남아 있다. 그가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 조선초기에 조운흘이 엮은 한시집)에 가장 많은 시가 뽑힌 시인이라는 데서 여말까지의 그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에 대하여 최자(崔滋)는 표현이 맑고 내용이 풍부하다고 평하였으며, 후대의 비평가들은 의경(意境 : 작가가 스스로 체득하고 인식한 내적 형상)이 온자(溫藉 : 포용력이 크고 점잖음)하고 시어 구사가 유려(流麗)하여 기상이 호방(豪放)하다고 찬양했다. 그의 시는 자연과의 교감을 부드럽게 표현하거나 사대부로서의 고민과 전원 귀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 많으며, 농민의 삶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것이 특히 주목된다. 사(詞) 3편이 남아 있어 이른 시기에 사를 지은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소개하고자 하는 노봉의 시 2수는 널리 알려진 시다. 어옹은 고기 잡는 노인을 직접 대면하여 말하는 것처럼 쓴 시로, 어옹의 삶을 통해 세상의 풍파는 어느 곳이든 다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우리의 삶도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옹(漁翁)

天翁尙未貰漁翁(천옹상미세어옹) 천옹이 아직도 어옹에게 너그럽지 않아

故遣江湖少順風(고견강호소순풍) 일부러 강호에 순풍이 적게 하네

人世嶮巇君莫笑(인세험희군막소) 인간 세상 험하다고 그대여 비웃지 마소

自家還在急流中(자가환재급류중) 자기도 도리어 급류 속에 있는 것을

 

통달역(通達驛)

煙楊窣地拂金絲(연양솔지불금사) 내 낀 버들 어느새 금실을 너울대니

幾被行人贈別離(기피행인증별리) 이별의 징표로 꺾이어짐 얼마 던고

林下一蟬諳別恨(임하일선암별한) 숲 아래 저 매미도 이별 한을 안다는 듯

曳聲來上夕陽枝(예성래상석양지) 석양의 가지 위로 소리 끌며 오르누나

 

통달역(通達驛)은 함경도(咸鏡道) 고원군(高原郡)에 있던 역으로 멀리 평안도 변방에서 느끼는 나그네의 외로운 심경을 경물(景物)에 붙여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