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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효봉선사 행장(曉峰禪師 行狀)

근대 고승(高僧)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흥미진진한 면모를 느끼게 되는데 그 대표적 고승이 효봉학눌(曉峰學訥)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판사의 길을 걷게 되는 어느 날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언도하게 되면서 자책감과 고뇌로 법복을 벗어던지고 3년간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 우연히 금강산 도인 석두 화상을 만나 구도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30대 후반 늦깎이 중이 된 효봉은 남보다 더 철저한 수행으로 한번 자리에 들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절구통 수좌로 무자 화두를 타파하고 석두 화상(石頭和尙)으루부터 법맥(法脈)을 이어받아 일제강점기, 6.25 사변을 겪으며,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과 불교 정화운동에 앞장선 선지식인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게송(偈頌) 몇 수와 함께 그의 행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 내용은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보도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붓다가 된 엿장수>. 몇 해 전 이정범 작가가 효봉학눌(曉峰學訥, 1888∼1966)을 주제로 쓴 소설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효봉스님은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된 인물이다. 이전에는 오늘날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평양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판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게 ‘판사 중’, ‘엿장수 중’ 등의 별명이 붙은 이유다. 말년에는 제자들이 질문을 하면 무조건 ‘몰라, 몰라’라고 답을 해서 ‘몰라 노장’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입으로 항상 ‘무라, 무라’ 하면서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 했다고 해서 ‘무라 노장’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렇다면 효봉은 왜 판사를 그만두고 엿장수가 되었으며, 또한 출가를 해서 붓다가 된 것일까?

 

붓다가 된 엿장수

 

효봉은 평안남도 양덕(陽德) 출신으로 속명은 이찬형(李燦亨)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그는 12살의 나이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게 된다. 14세 때는 평양감사가 주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장원급제를 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과제 제도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 등이 쇠퇴하였기 때문에 장원급제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신학문이었다. 그는 평양 광성보통학교와 평양 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알려진 것처럼 효봉은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판사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 자신은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 화려하게 보였는지 몰라도 효봉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특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어느 젊은이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이후 그는 극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해도 효봉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를 잊기 위해 술에 의지했지만, 고통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효봉의 제자이자 ‘무소유’의 아이콘인 법정은 스승의 생애를 기록한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라는 책에서 이 시절을 ‘화려한 지옥’으로 표현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화려한 지옥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엿장수의 길, 아니 참회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3년간의 엿장수 생활 끝에 우연히 금강산 도인 석두화상(石頭和尙 : 1882~1954)을 만나 사문의 길로 접어든다.

은사 석두 스님이 원명(元明)(나중의 효봉)에게 운봉(雲峰)이라는 법호(法號)를 내려주시면서 스승이 제자에 준 사좌전송(師佐傳頌)은 다음과 같다,

 

사좌전송(師佐傳頌)

春至百花爲誰開(춘지백화위수개) 봄이 와서 온갖 꽃 누구 위해 피는가

東行不見西行利(동행불견서행리) 동으로 가면서 서로 가는 이익 보지 못하네.

白頭子就黑頭父(백두자취흑두부) 흰머리 아들이 검은 머리 아비에게 나아가니

兩個泥牛戰入海(양개니우전입해) 두 마리 진흙 소가 싸우다 바다에 들어가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 때의 일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에 출가한 셈이다. 이때 스승에게 받은 법명이 원명(元明)이며 법호는 운봉(雲峰)이었다. 늦게 출가한 만큼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이어갔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근처에 작은 토굴을 만들고 무문관(無門關)에 들어간 일이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결코 나오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문이 없어서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정진의 방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1년 6개월이 흐른 어느 날 그는 무문관을 박차고 나온다. 엿장수가 붓다가 되는 순간이다. 이 깨침의 순간을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오도송(悟道頌)

海底燕巢鹿抱卵(해저연소녹포란)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화중주실어전다) 타는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다리네

此家消息誰能識(차가소식수능식)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白雲西飛月東走(백운서비월동주)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나와 세계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깨져서 모두가 하나 된 경지를 그리고 있다. 바다와 땅, 하늘 사이에 벽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바다 밑 제비집에서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 거미집에서 물고기가 차를 달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와 하나인 세계에서 차 한 잔 마시는 것은 어떨까?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때 흰 구름은 무심코 서쪽으로 날고 달은 동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삶이 깨침을 향한 구도의 과정이었다면, 이후는 깨침을 실천하는 보살행으로 일관한다. 그는 금강산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송광사에 주석하게 되는데, 이때 꿈속에서 지눌의 16세 법손인 고봉(高峰, 1351~1428)으로부터 몽중설법(夢中說法)을 듣고 효봉이라는 법호를 받게 된다. 법명도 지눌(訥)을 배운다(學)는 의미를 담아 학눌로 바꾼다. 효봉학눌은 해인사, 동화사, 미래사 등 수많은 곳에서 선(禪)의 향기를 전했을 뿐만 아니라 정화운동을 통해 한국불교에 가득했던 먹구름을 걷어내고 새로운 봉우리(峰)를 밝게 드러낸다(曉). 그리고 재약산(載藥山) 표충사에서 다음과 같은 열반의 노래를 남기고 고요 속으로 떠난다.

 

열반송(涅槃頌) 

吾說一切法(오설일체법) 내가 말한 모든 법

都是早騈拇(도시조병무) 그거 다 군더더기

若問今日事(약문금일사) 만약 오늘 일을 묻는다면

月印於千江(월인어천강)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일천 강에 비친 달

 

효봉은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낸 고승이다. 그가 정화운동을 이끌면서 강조한 것은 첫째도 화합, 둘째도 화합이었다. “큰집이 무너지려 하니, 대중들은 힘을 합쳐 붙들라(大廈將崩 衆力扶持)”는 효봉의 메시지는 오늘에도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승가에 대립과 갈등이 난무하면 한국불교라는 큰집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화합이라는 승가의 정신에 입각해서 정화운동을 이끌고 오늘의 한국불교를 있게 한 선지식이다. 우리가 그에게 주목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효봉은 삶과 죽음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이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생일을 맞이하여 선사를 경무대로 초대한 적이 있다. 박정희는 초대에 응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선사의 생일에 자신도 불러달라고 하는데, 이때 효봉의 답변이 매우 인상적이다.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어찌 생일이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와!’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삶과 죽음의 이치를 단순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전했기 때문이다. 이를 <반야심경> 버전으로 표현하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不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지를 자유자재로 드러낸 것이다. 삶과 죽음은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그것을 끓이면 수증기로 변하는 현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두 형태만 바뀌었을 뿐,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H2O)로 이루어진 본래의 바탕(本質)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진리를 깨친 선사들이 한결같이 삶과 죽음을 하나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효봉은 중생들을 위해 남긴 모든 법을 군더더기라고 하면서 고요 속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군더더기가 윤회의 세계를 헤매고 있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귀한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중생들이 사는 곳이 우물 안이라면, 깨침의 세계는 우물 밖에 비유할 수 있다. 효봉은 우물 밖 진리의 세계를 체험하고 그곳에서 즐긴 것이 아니라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물 밖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안과 밖의 간극이 너무 넓어 중생들은 선사들이 전한 마음의 언어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효봉은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물 안의 언어로 친절한 안내서를 만들어 진리의 세계를 전했다. 그는 고요 속으로 떠나면서 이를 군더더기라고 표현한 것이다.

 

진리의 세계를 체험한 견성 도인에게 우물 안에서 남긴 말이 군더더기 일지 몰라도 중생들에게는 우물 밖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한마디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 자상한 안내서라는 뜻이다. 그가 송광사와 해인사, 동화사 등에서 남긴 수많은 법문들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효봉은 근원적인 질문, 즉 ‘나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열반송에서 말하고 있는 ‘오늘의 일(今日事)’이 바로 그것이다. 우물쭈물하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우리에게 효봉은 일천 강에 비친 달로 답을 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그가 떠나면서 남긴 법문을 제대로 들을 만큼 귀가 열려있을까? 마음 밭(心田)을 잘 가꾸고 있느냐는 뜻이다. 그의 게송을 군더더기로 만들지, 아니면 진리를 향한 안내서로 가꿀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다.

 

개인적으로 지난해부터 효봉선사 에세이를 쓰고 있다. 그가 수행한 도량을 순례하고 내가 느낀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하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답사한 곳이 효봉이 열반에 든 표충사(表忠寺)였다. 그날 재약산(載藥山)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득 젊은 시절 자주 들었던 산울림의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하늘도 이별을 우는데, 눈물이 흐르지 않네’라는 가사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효봉이 떠나던 그날 하늘은 이별을 슬퍼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글을 써 내려갔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고 보았던 효봉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그는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떠나는 날 하늘은 슬퍼하거나 울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무심(無心)하게 있었을 뿐이다. 하늘은 본래 그렇다.”

 

하늘이 무심한 것처럼 일천 강을 비추고 있는 달도 여전히 무심하다. 그 소식을 알아차리는 것 또한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불교신문3697호/2021년12월28일자)

 

석두 화상에서 효봉스님의 법맥을 잇고 조계총림을 개원해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구산수련(九山秀蓮, 1909~1983) 스님은 참선수행에 몰두하는 한편 늘 자상한 미소와 친절한 가르침으로 스님들은 물론 재가불자들의 신행생활에 도움을 준 선지식이다.

1951년 정월 보름, 동안거 결제 후 구산 스님은 부산 금정사에 주석하고 있는 효봉스님을 찾아 게송을 지어 올리고 경지를 인정받았다. 이때 구산 스님이 효봉스님에게 올린 게송과 효봉스님이 내린 전법게(傳法偈)는 다음과 같다.

 

(구산스님이 효봉스님께 올린 게송)

大地色相本來空(대지색상본래공) 대지의 색과 상이 본래 공한데

以手指空豈有情(이수지공기유정) 공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어찌 정이 있으리오

枯木立岩無寒暑(고목립암무한서) 마른나무 서 있는 바위엔 추위와 더위가 없건만

春來花發秋成實(춘래화발추성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열매 맺도다.

 

전법게(傳法偈) : 贈九山法子(증구산법자 : 구산 법자에게 줌)

裁得一株梅(재득일주매) 한 그루 매화를 얻어 가꾸라 했더니

古風花已開(고풍화이개) 옛 바람에 꽃을 피웠구나

汝見應結實(여견응결실) 그대 응당 열매를 보았으리니

還我種子來(환아종자래) 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