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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남명 조식 시(南冥 曺植 詩) 몇 수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한 번쯤은 들어봤던 남명 조식 선생의 시조이다. 조식(曺植. 1501~1572)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건중(健中) 혹은 건중(楗仲)이고, 호는 남명(南冥)·방장산인(方丈山人)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토골(兎洞)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펼쳐놓고 자신을 독려하였다. 부친이 문과에 급제하자 서울로 이주하여 이준경(李俊慶), 성운(成運) 등과 교류하였다.  1531년 생계가 곤란하자 살림이 넉넉한 김해의 처가를 찾아가 탄동(炭洞)에서 산해정(山海亭)이란 정자를 지어놓고 생활하였다. 여러 번 향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隱逸)로서 학문에만 전념하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561년 지리산 덕천동(德川洞)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선조 때 대사간,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경남 산청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 남명집, 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전한다.

 

조식 문하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구(鄭逑)·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김우옹(金宇顒)·최영경(崔永慶)·김효원(金孝元)·오건(吳健)·이제신(李濟臣)·강익(姜翼)·문익성(文益成)·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곽일(郭走+日)·하항(河沆)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은둔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어서, 조식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식은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는데, 그의 문인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 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文風)을 일으켰다. 조식의 영향을 받은 후학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투철한 호국관과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조식은 반궁체험(反躬體驗 : 학문을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을 돌이켜 보며 이를 체험하는 것)과 지경실행(持敬實行 :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것)을 중시하고, 특히 경(敬)과 의(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敬'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라고 하였다. 그는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하였다. 조식은 특히 실천궁행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는 일절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독서할 때마다 몸에 긴요한 것이 있으면, 이를 기술, 편찬하였다. 이것이 학기유편(學記類編)인데, 그는 이를 을 통하여 도(道)의 체통(體統)을 말하고 학문하는 방법과 마음을 논하는 핵심 및 수신의 방법과 치국의 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삼재태극도(三才太極圖), 성위태극도(誠爲太極圖), 천인일리도(天人一理圖) 등 10여 종의 도해(圖解)를 붙여 리학(理學)을 설명하였다. 그는 초심자에게 심경(心經), 서명(西銘), 태극도설(太極圖說) 등 심성에 관한 글을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에 반대하고, 소학, 대학, 논어와 같은 실천적인 경전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교수방법도 자해자득(自解自得)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식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개인, 즉 사람의 자아를 문제 삼는다. 그는 절대적인 주체를 추구하고 하였다. 조식의 시나 명(銘)에서 보이는 글들은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리와 기 개념에 대한 추구보다는 절대 자아를 발휘하는 데 핵심이 되는 경(敬)과 의(義) 같은 실천적 개념을 더 중시한다. 이황의 경건함이 이 세계의 객관적인 법칙에 따라 자신을 가다듬는 태도인 데 반해, 조식은 의로움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아를 단련하는 치열한 의식인 데서 차이가 난다. 그리하여 조식은 이황의 사칠논변 같은 형이상적 사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호남학적 경향이나 양명학적 경향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식은 敬을 모든 생활의 좌우명으로 해서 살아갔다. 그는 理에 따라 살려고 함으로써 구체적인 모든 사태에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이는 맹자가 말한 浩然之氣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의 위대한 실천적 학문으로 후학들로 하여금 의(義)와 행(行)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치신  존망 받는 스승, 조식의 깊이 있는 학문에 대하여 해외에서도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퇴계 학풍을 넘어서는 정신세계에 대한 재조명이 다시 한번 심도 있게 논의되기를 기원해 보면서 그가 남긴 한시 몇 수를 자서해 보았다.

 

天王峰(천왕봉)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원컨대 천석들이 큰 종을 보고 싶었네

非大扣無聲(비대고무성)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

萬古天王峰(만고천왕봉) 만고불변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은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네.

 

山中卽事(산중즉사 : 산중에서 겪는 일상) 1

從前六十天曾假(종전육십천증가) 이 전의 60년은 하늘이 복을 더하여 주었으니

此後雲山地借之(차후운산지차지) 이 뒤로는 구름과 산의 땅에서 빌려야겠구려..

猶昰窮塗還有路(유시궁도영유로) 오히려 이 곤궁한 처지도 영위할 길이 있나니

却尋幽逕採薇歸(각심유경채미귀) 조용한 오솔길 찾아 고사리 캐어 돌아가리라.

 

山中卽事(산중즉사) 2

日暮山童荷鋤長(일모산동하서장) 해는 저무는데 산골 아이는 호미 길게 둘러메고

耘時不問種時忘(운시불문종시망) 김맬 때를 묻지 않으니 파종할 때를 잊는구나.

五更鶴唳驚殘夢(오경학려경잔몽) 새벽녘 학 울음에 놀라 꿈속을 헤매니

始覺身兼蟻國王(시각신겸의국왕) 이 몸이 개미 나라의 왕을 다했음을 깨우치네.

 

靑鶴洞(청학동)

獨鶴穿雲歸上界(독학천운귀상계) 한 마리 학은 구름 위로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고.

一溪流玉走人間(일계루옥주인간) 한 줄기 옥계천은 인간 세상으로 흐르네.

從知無累翻爲累(종지무루번위루) 누 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心地山河語不看(심지산하어불간) 산하를 마음으로 느끼고는 보지 않았다고 말하네,

 

德山卜居(덕산복거 : 덕산에 살면서)

春山底處无芳草(춘산지처무방초) 봄산 어디에 이른 들 향기로운 꽃이 없으리오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다만 천왕봉을 즐기다 보니 천제 사는 곳과 가깝다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백수로 돌아와 먹을 것을 어이할까

十里銀河喫有餘(십리은하끽유여) 은하가 십리나 마시고도 오히려 남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