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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지포 김구 낙이화(止浦 金坵 落梨花)

김구(金坵. 1211~1278) 선생은 고려시대 인물로서, 본관은 부안(扶安)고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김구는 고려 충렬왕 4년(1278)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그의 학문과 공적을 기리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2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고, 정원부 사록에서부터 제주판관,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또한 수찬관, 정당문학, 참지정사, 지공거, 중서시랑 평장사(平章事 :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2품 관직으로 지금의 장관격인 제상직에 해당된다.)를 역임하였다.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원의 몽고군 침입시에는 탁월한 지략과 화려한 변려문체(騈儷文體 :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한 한문 문체.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 때문에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한다.)의 표문(表文 : 중국의 임금에게 보내던 외교 문서, 또는 신료나 백성들이 임금에게 올리던 문서의 일종. 표(表)란 문체의 하나)으로 이를 막아냈으며, 원나라 최고의 문장가 *왕악(王鶚)이 감탄할 정도로 문장 실력이 뛰어났다.

 

지포선생은 당대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고려사 열전 권 제19에 실릴 만큼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는 원나라에 갔을 때 남긴 북정록(北征錄)과, 충렬왕의 용루집(龍樓集)에 시가 남겨져 있으며, 특히 변려문에 뛰어났으며, 당대의 문호로 추앙받던 이규보는 이 나라 문장을 저울질할 사람이라고 경탄하였고 이제현은 선생의 시를 평하며 아름답기가 더할 나위 없는 시라고 극찬하였다.

 

저서로는 지포집(止浦集)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34년(중종 29)에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하였다.

그의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시 낙이화를 흑지에 은니(銀泥)로 자서해 보았다.

 

낙이화(落梨花 지는 배꽃)                   -  金坵(김구)

飛舞翩翩去却回(비무편편거각회) 펄펄 날아 춤추며 가다 서다 다시 돌아와

倒吹還欲上枝開(도취환욕상지개) 거꾸로 불면 가지에 도로 올라 다시 피고자

無端一片黏絲網(무단일편점사망) 속절없이 한 조각 꽃잎 거미줄에 걸리니

時見蜘蛛捕蝶來(시견지주포접래) 때마침 거미는 나비인 줄 알고 잡으러 오네.

 

배꽃

*왕악(王鶚 1190년 ~ 1273년)은 금원(金元) 교체기 때 조주(曹州) 동명(東明) 사람. 자는 백일(百一)이다. 금나라 애종(哀宗) 정대(正大) 원년(1224) 진사제일(進士第一)이 되고, 응봉한림문자(應奉翰林文字)에 임명된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을 역임했다. 금나라가 망하자 만호(萬戶) 장유(張柔)에 의지해 보정(保定)에서 살았다. 홀필렬(忽必烈)이 사람을 보내 번저(藩邸)로 모셔 오게 하여 『효경(孝經)』과 『서경(書經)』, 『주역(周易)』 및 제가치국(齊家治國)의 도에 대해 강의하도록 했다.

 

그가 즉위하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하니, 제고전장(制誥典章)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자선대부(資善大夫)가 더해지고, 상주하여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과 십도제거학교관(十道提擧學校官)을 세웠다. 당시 아합마(阿合馬)가 아부를 통해 재상 자리에 오르려고 하자 대신들도 그를 도와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그만 홀로 호응하지 않았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성품이 낙천적이고 느긋했으며, 사부(詞賦)에 능했는데, 문장을 지을 때 조식(雕飾)을 일삼지 않았다. 저서에 『여남유사(汝南遺事)』와 『응물집(應物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