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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근대 고승 해안스님 게송(近代高僧 海眼스님 偈頌)

해안(海眼, 1901~1974)스님은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 1901년 3월7일 태어났다. 아버지 김해 김씨 치권(致權)공과 어머니 은율(恩律) 송씨(宋氏)의 3남이다. 아이 때 이름은 성봉(成鳳)이며, 커서는 봉수(鳳秀)라 불렸다. 10세를 전후하여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14세 되던 해(1914) 부안 변산 내소사(來蘇寺)에서 만허(滿虛)선사를 만나 불연을 맺고 머리를 깎았다.

 

1917년 전남 장성 백양사(白羊寺)에서 송만암(宋曼庵)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해 사미과를 수료한 스님은 이듬해 백양사 광성의숙(廣成義塾)에서 보통과를 수료했다. 1918년 성도절을 앞두고 7일간 용맹정진을 산내 대중이 했다. 스님은 조실 학명(鶴明)스님으로부터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고 정진했다. 정진 7일째 되던 날 저녁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이어 종소리가 울리고 선실의 방선 죽비가 탁! 탁! 탁! 하고 터지는 순간이었다. 스님은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전에 없던 환희의 세계를 맛보는 동시에 답답하던 가슴이 일시에 시원함을 느꼈다.

 

오도송(悟道頌)

鐸鳴鍾落又竹幅(탁명종락우죽폭) 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에

鳳飛銀山鐵壁外(봉비은산철벽외) 봉황이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네

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 누군가 나에게 기쁜 소식 묻는다면

會僧堂裡滿鉢供(회승등리만발공) 회승당 안에 만발공양이라 하리라.

 

1920년 백양사 지방 학림에서 중등과와 사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서울로 가서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 2년간의 전 과정을 마치고 백양사에서 대선(大禪) 법계(法階)를 받았다.

 

한소식 크게 한 이후에도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스님은 이해 겨울 중국으로 구도의 고행을 떠났다. 중국에서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고 탁마를 더하는 한편 북경대학에서 2년간 불교학을 연수, 견문을 넓혔다.

 

1925년 귀국한 스님은 내소사에 행장을 풀고 은사 만허스님을 시봉했다. 1927년 백양사에서 중덕(中德) 법계를 받고 변산 내소사 주지에 취임했다. 1931년 변산 월명(月明)선원에서 안거했다. 1932년 내소사 앞 입암리(立岩里)에 계명학원(啓明學院)을 설립하여 무취학(無就學)과 무학성년(無學成年)을 교육하며 문맹퇴치 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1935년 스님 나이 35세 되던 해 백양사 본·말사 순회포교사 직책을 맡았다. 이때부터 스님은 본격적인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펼쳤다. 스님의 음성은 맑고 잔잔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문으로 울림이 큰 힘이 있었다. 해박한 지식과 깊고 밝은 선지(禪指)로 시연(時緣)을 따라 청중의 근기에 맞춰 설법하니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법석에 몰려들었다.

 

1936년 대덕 법계를 받고 1945년 종사(宗師) 법계를 받았다. 이 해에 금산사 주지를 맡았으니 종무(宗務)는 삼직(三職)에 일임하고 서래선림(西來禪林)을 개원, 참선지도와 납자 제접(提接)에만 전념했다. 1950년 세수 50에 이른 스님은 6·25전쟁이후 서래선림 지장암에 은거 두문불출, 오직 선정 삼매에 들었다. 3년간 공양 때 시자가 식사만 토굴에 올려 보낼 뿐 외부와는 완전 단절한 기간을 보냈다.

 

1969년 봄 스님을 따르던 불자들이 모여 ‘불교전등회(佛敎傳燈會)’를 창립했다. 대종사에 추대된 스님은 춘하추동으로 정진법회를 개최, 7일간 혹은 3·7일간 참선수행으로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한국불교는 실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를 중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가 있지 않고는 어려우리라고 생각한지가 이미 오래이다. 이제 늦었으나마 용기 있는 새로운 일꾼을 길러낼 일이 가장 급하고 중대한 불사라 생각한다. 좋은 인재나 신심이 확고한 불자는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 지도할 것을 사양하지 않는다.”

 

스님은 이렇듯 전등회의 장래를 걱정하고 인재양성에 혼신을 다했다. 1970년에 스님은 전주 한벽선림(寒碧禪林, 전등회 전주지부)에 주석했고 1972년에는 서울 전등선림에 주석했다. 그해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대원정사(大圓精舍) 개원과 더불어 조실로 추대되어 대원선원에서 특별정진 법회를 개최했다.

 

1974년 3월9일 아침6시30분 입적했다. 법랍 57년, 세수 74세였다.

 

“스님, 그래도 오셨다가 가신 흔적으로 비(碑)는 세워야지요. 제자들의 도리도 있고요” “굳이 세우려거든 앞면에 ‘범부해안지비(凡夫海眼之碑)’라고 쓰고 뒷면에는 ‘생사어시(生死於是) 시무생사(是無生死)’라고만 써라.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스님 열반송을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그런 건 군더더기 같은 소리야” “그래도 한 말씀 일러주셔야지요” “그러면 할 수 없지. 이르마.”

 

열반송(涅槃頌)

生死不到處(생사부도처) 생사가 이르지 못하는 곳에

別有一世界(별유일세계) 하나의 세계가 따로 있다네 

垢衣方落盡(구의방낙진) 때 묻은 옷을 벗어버리자

正是月明時(정시월명시) 비로소 밝은 달 훤한 때로다

 

스님 열반 후 문도들은 당신이 생전에 한 법문과 시문(詩文)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냈다. <해안집(海眼集)>이란 이름으로 낸 책은 모두 3권이다. 제1권은 ‘해안법어편’으로 상당법어, 수시법어(隨時法語), 천혼법어(薦魂法語), 선게(禪偈) 그리고 기(記) 명(銘) 문(文) 축(祝) 사(辭)와 전법게송, 시집인 시심시불(是心是佛), 신도와 제자들에게 보낸 서장(書狀)과 아울러 해안선사 행장기, 연보 등을 실었다. 제2권은 선문헌해설편(禪文獻解說篇)이다. 칠불(七佛) 및 삼십삼조사(三十三祖師) 게송, 전등록, 관심론, 혈맥론, 신신명, 수심결을 수록했다. 제3권은 경전해설편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십현담, 금강반야바라밀경, 대방광원각수다라요경을 담고 있다.

 

전등사·전등선림에서 펴낸 해안집(海眼集)은 스님의 사상과 해박한 학문 그리고 깊은 선지(禪指)를 담고 있어 후학의 정진에 훌륭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불교신문3435호/2018년10월27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