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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표암 강세황 시 몇 수(豹菴 姜世晃 詩 몇 首)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박암(樸菴), 의산자(宜山子), 견암(蠒菴), 노죽(露竹), 표암(豹菴), 표옹(豹翁), 해산정(海山亭), 무한경루(無限景樓), 홍엽상서(紅葉尙書). 서울에서 강현(姜鋧)의 3남 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생모는 광주이씨이다.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 소생인 강인(姜亻寅), 강흔(姜俒), 강관(姜亻寬), 강빈(姜儐)과 나주나씨(羅州羅氏) 소생의 강신(姜信)이 있다. 강신과 그의 아들 강이오(姜彛五), 강흔의 손자 강진(姜晉)이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교육, 자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다. 처남 유경종(柳慶種), 친구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과 절친했다. 또한 이익(李瀷), 심사정(沈師正), 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김홍도(金弘道)와 신위(申緯)가 주목된다. 8세에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처가인 진주유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그는 일찍부터 안산에 세거하고 있던 이현환(李玄煥), 이광한(李匡煥) 등 이익(李瀷)집안의 남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시와 서화에 전념하였다.

64세에 기로과(耆老科 : 60세 또는 70세 이상인 노인만 보는 과거)에, 66세에는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 사포 별제(司圃別提),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69세에(正祖) 어진 제작의 감독을 맡았다. 이때 당시 화원 한종유(韓宗裕), 이명기(李命基)에게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관직에서 물러난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으로국가 원로 예우를 위한 명예 기구이다.)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예를 얻었다. 1785년 75세,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천수연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사행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였다. 이때마다 기행문과 실경 사생을 남겼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은 영·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그를 보호하여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이른 일을 계기로 강세황이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평론가로서 중국과 조선의 수많은 서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품평을 남겼다.

그는 사군자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역대 서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수많은 법첩과 필적을 통해 서예를 배웠다. 그의 글씨는 이왕(二王: 왕희지·왕헌지)을 근간으로 삼아 미불(米芾), 조맹부(趙孟頫)의 서법을 연마하여 해·행·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화가 개성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서화의 정통성과 올바른 방법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참신하고 독자적인 서화관에 의해 실천적으로 문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속기(俗氣)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의 경지였다.

그림의 소재는 산수·화훼(花卉)를 주로 다루었다. 만년에는 묵죽(墨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 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다.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상당수에 달하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고,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詩.書.畵 3絶의 경지에 이른 표암의 안면목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시 몇 수를 통해 격조 높은 삶을 다시 조명하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차해암사시석전화(次海巖謝示石田畵 : 해암이 고맙게 보여준 석전의 그림에 차운하다)

雲冒前山白雨紛(운모전산백우분) 구름이 앞산을 가리더니 소나기 쏟아지고

風來草木有奇芬(풍래초목유기분) 바람이 초목에 불어와 기이한 향기 풍기네

北窓對榻消長日(북창대탑소장일) 북창에서 책상 마주하며 긴 여름날을 보내노니

不惜淸凉與子分(불석청량여자분) 청량한 이 기분 아낌없이 그대와 나누리라

 

표암 강세황의 처남 유경종(柳慶種)이 명나라의 유명한 화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을 표암에게 보여주었는데, 이 시는 그 그림에 있는 제화시의 운자를 따라 지은 작품이다. 해암은 유경종의 호이고 석전은 심주의 호이다. 유경종은 강세황보다 한 살 적은데 대단한 장서가로 안산에서 10리 안에 이웃해 살며 늘 문장과 서화로 담론을 나누었다. 운자가 다른 시가 6편이나 되는 걸 보면 그림도 여러 폭이었을 듯하다. 무더운 여름철 소나기가 지나가자 기온이 뚝 떨어지고 집 주위의 풀이며 나무에 바람이 불어와 신록의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서늘한 북쪽 창문 아래서 책을 읽으며 긴 여름날을 보내노라니, 이 청량한 기분을 혼자 누리기 아까운 생각이 든다. 처남이 그립다. 3구에서. 도연명이 오뉴월에 북창 아래에 누워 서늘한 바람의 감촉을 즐길 때면 내가 복희 씨 이전의 태곳적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해 질 녘 바람과 저녁노을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이 청량한 기분을 그대와 나누는 것을 아끼지 않으리[晩風落日元無主, 不惜淸凉與子分.]”라고 한 소동파의 시에서 온 것이다. 표암은 서울에서 살다가 살림이 어려워져 32세에 처남이 사는 안산으로 이주하여 오랫동안 시서화의 세계에 몰두하며 공부를 하다가 61세 되던 1773년에 자제들이 과거에 잇달아 급제하고 자신도 관운이 트여 서울로 이사를 한다.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는 안산에 살 때 『개 자원화 전(芥子園畫傳)』에 실린 심주의 그림을 모방해 그린 것인데 원래의 그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여름철의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준다. 다소 답답해 보이는 화보의 그림과는 달리 툭 트인 공간을 창조하고 푸른 계통의 옅은 색을 입혔기 때문일까. 앞에서 소개한 시는 원래 이 그림과는 무관하지만, 이 그림의 화제로 써넣으면 맞춤할 듯하여 시의 제목으로 소개해 보았다.

 

임 애상화(臨崖賞花 : 언덕에서 꽃을 감상하다)

蒼崖當小屋(창애당소옥) 푸른 언덕이 작은 집 앞에 있어

春來花亂開(춘래화난개) 봄이 오자 꽃이 난만히 피었네

推窓極幽賞(퇴창극유상) 창문을 밀고 그윽한 감상을 다하니

何必費筇鞋(하필비공혜) 굳이 지팡이와 신발이 필요하리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승경을 그린 그림이나 유람기를 통하여 와유(臥遊)를 하는 것과 달리 이 시는 집 앞에 있는 언덕이 아름다워 굳이 멀리 나돌아 다니고 싶지 않다고 한다. 시 자체만 떼어놓고 보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림과 어울려 고상한 세계를 연출한다. 창문으로 산수가 들어오게 하는 발상을 통해 주변의 경관을 자연스럽게 자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느긋한 마음이 감상자를 편안하게 해 준다.

표암의 그림과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아, 이것이 바로 문기(文氣)로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로 오랫동안 단련을 한 문인의 격조 같은 게 느껴진다.

그가 그린 산수화나 묵죽도뿐만 아니라 옅은 채색을 가한 무나 봉선화 등을 그린 화첩을 봐도 일반 정물화와는 전혀 다른 문인화의 기품이 있다. 신선한 감각 속에 어떤 화격이랄까, 표암이 말한 대로 독특한 취향과 고상한 생각[奇趣遐想]이 담겨 있는 듯하다.

표암이 북경으로 사신을 갔을 때 청나라 황제가 ‘미불보다는 아래이고 동기창보다는 위이다.’라는 뜻으로 ‘미하동상(米下董上)’ 4글자를 편액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며, 연경의 명사 중에 어떤 이가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와 같고, 그림은 고개지(顧愷之)와 같으며, 풍채는 두목지(杜牧之)와 같으니, 광지(光之)는 이 사람들을 겸하였구려. [文之退之, 筆之羲之, 畫之愷之, 人之牧之, 光之兼之.]”라고 하였다 한다. 광지는 표암의 자인데, 갈지(之) 자가 10번 들어가 ‘십 지평(十之評)’이라 한다.

시서화(詩書畵)삼절로 잘 알려진 표암의 서화를 좀 더 깊이 감상하자면 그의 문집을 보아야 할 텐데 연구자들의 지적처럼 누락된 시와 글이 다수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표암의 한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을 법한 「길에서 만난 여인[路上有見]」 같은 시는 『병세집(並世集)』과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있지만, 문집에는 없다.

 

노상유견(路上有見 : 길에서 만난 여인)

凌波羅襪去翩翩(준파나엄거편편) 물결 걷듯 비단 버선 사뿐사뿐 가더니

一入重門便杳然(일입중문편묘연) 중문 한 번 들어가선 감감 보이지 않네

惟有多情殘雪在(유유다정잔설재) 그래도 다정하여라 잔설이 남아 있어

屐痕留印短墻邊(극흔유인단장변) 낮은 담장 가에 발자국이 찍혀 있네

 

이 시는 작고한 김도련 선생이 애정 한시를 모은 『꽃피자 어데선가 바람 불어와』의 가장 앞부분에 소개한 시로 한겨울 따뜻한 볕에 눈은 녹았지만 담장가에 잔설에 찍힌 여인의 발자국 흔적을 보며 길에서 만난 여인의 아름다운 여운과 함께 높은 격조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