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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허난설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許蘭雪軒 廣寒殿白玉樓上樑文)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1570년(선조 3)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가 지은 상량문이다.

상량문(上樑文)은 집을 지을 때 대들보를 올리며 행하는 상량의식에 쓰이는 글이다.

허난설헌은 신선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많은 신선이 동원되고 기술자가 있었지만 상량문 지을 시인이 없자 자신이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면서 8세에 이 글을 지었는데 그녀의 유일한 산문(散文)이다.

8세밖에 안된 아이가 상량문을 지었고 명문(名文)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여러 사람들이 이 글을 보기를 요청하였는데 허초희(허난설헌)의 남동생인 허균(許筠)이 수안군수(遂安郡守)로 재직하던 1605년 5월에 한호(韓濩)의 글씨로 충천각(沖天閣)에서 목판본으로 1차 간행하였다.

이 목판본은 1606년에 사신으로 왔던 중국인 주지번(朱之蕃)의 요구에 의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현재 국내에서는 목판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어린 나이로는 상상할 수 없는 중국의 실존인물과 신선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태평광기(太平廣記 : 북송 초 이방(李昉) 등이 황제의 명에 따라 편찬한 총 500권 규모의 중국 설화·소설·전기·야사류 문헌으로, 한(漢)대부터 북송(北宋) 초까지의 이야기를 92항목으로 분류해 수록한 책)』와 같은 책을 즐겨 읽어서 신선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또 거기에 풍부한 상상력이 결합되어, 이처럼 속세를 벗어난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문체는 다른 상량문과 마찬가지로 포량(抛樑 : 상량문에서 대들보를 올리며 울리는 소리를 뜻하는 관용어)의 동 · 서 · 남 · 북 · 상 · 하의 육위(六偉)가 묘사되고, 이 광한전이 신선세계에서 오래오래 서 있기를 기원하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상량문에서 허초희는 여성으로서 실현 불가능한 현실세계의 이상을 가상세계인 선계에 설정하고, 초속적(超俗的)인 이상향을 실현하고 있다.

8세에 지었다고 하기에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지만 개인적 생각으로는 15세 전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허난설헌의 삶은 생각할수록 애달프고 비통하기 그지없다. 다만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역사상 가장 비운의 천재 여류시인으로 고전을 접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난설헌의 시 몇 수는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시 2수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 모춘(暮春)

허난설헌 춘우(許蘭雪軒 春雨)

허난설헌 효심아지체(許蘭雪軒 效沈亞之體)

 

비운의 천재 여류시인이 남긴 그녀의 명문 상량문 전문과 함께 일부 내용을 자서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 楚姬) 작(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

述夫。寶蓋懸空。雲輧超色相之界。銀樓耀日。霞楹出迷塵之壺。雖復仙螺運機。幻作璧瓦之殿。翠蜃吹霧。噓成玉樹之宮。靑城丈人。玉帳之術斯殫。碧海王子。金櫝之方畢施。自天作之。非人力也

이르기를 보배로운 일산(日傘)이 하늘에 드리워지니 구름 수레가 색상의 경계를 넘었고, 은빛 누각이 해에 비치니 노을 난간이 미혹된 티끌 세상을 벗어났다. 신선의 나팔이 기틀을 움직여서 구슬기와 궁전을 짓고, 푸른 이무기가 안개를 불어서 구슬나무 궁전을 지었다. 청성장인(靑城丈人)은 옥 휘장의 도술을 다하고, 벽해왕자도 금궤짝의 묘방을 다 베풀었다. 이는 하늘이 지은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

 

主人名編瑤籍。職綴瓊班。乘龍太淸。朝發蓬萊暮宿方丈。駕鶴三島。左挹浮丘右拍洪厓。千年玄圃之棲遲。一夢人間之塵土。黃庭誤讀。謫下無央之宮。赤繩結緣。悔入有窮之室

주인의 이름은 신선 명부에 오르고, 벼슬도 신선 반열에 들어 있어서, 태청궁에서 용을 타고 아침에 봉래산을 떠나 저녁에 방장산에 묵으며 학을 타고 삼신산을 향할 적에 왼쪽에 신선 부구(浮丘 : 고대의 선인(仙人)으로, ‘부구공(浮丘公)’을 가리킴)를 붙잡고, 오른쪽에는 신선 홍애(洪崖)를 거느렸다. 천년 동안 현포(玄圃)에서 살다가 한번 꿈에 인간 티끌 세상에 내려와 황정경(黃庭經)을 잘못 읽어 무앙궁에 귀양 왔다. 적승(赤繩 : 연을 맺는 붉은 끈, 부부의 인연을 뜻) 노파가 인연을 맺어주어, 다함이 있는 집에 들어온 것을 뉘우쳤다.

 

壺中靈藥。纔下指於玄砂。脚底銀蟾。遽逃形於桂字。咲脫紅埃赤日。重披紫府丹霞。鸞笙鳳管之神遊。喜續舊會。錦幕銀屛之孀宿。悔過今宵。胡爲日宮之思綸。俾掌月殿之牋奏。

병 속의 신령스러운 약을 잠시 현사(玄砂)에 내리자, 발아래의 달이 문득 계수나무 궁전으로 몸을 숨겼다. 웃으면서 붉은 티끌과 붉은 해를 벗어나 자미궁의 붉은 노을을 거듭 헤치며, 난새와 봉황이 피리 부는 신령스러운 놀이의 옛 모임을 즐겁게 계속하였다. 비단 장막과 은병풍에 홀로 자는 과부는 오늘 밤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니, 어찌 일궁(日宮)의 은혜로운 명령을 월전(月殿)에까지 아뢰게 할 수 있으랴.

 

官曹淸切。足踐八霞之司。地望崇高。名壓五雲之閣。寒生玉斧。樹下之吳質無眠。樂奏霓裳。欄邊之素娥呈舞。玲瓏霞佩。振霞錦於仙衣。熠燿星冠。點星珠於人勝。

벼슬 맡은 무리들은 몹시 깨끗해서 그 발로 팔색 노을의 관청을 밟으며, 지위와 명망이 드높으니 그 이름이 오색구름의 전각을 짓눌렀다. 옥도끼에서 차가운 기운이 나니, 계수나무 밑에서 오질(吳質)이 잠들 수가 없었다.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연주하자, 난간 가에 있던 소아(素娥)가 춤을 추어 올렸다. 영롱한 노을빛 노리개와 노을빛 비단이 신선의 옷자락에서 떨쳐지고, 반짝이는 성관(星冠)은 별빛 구슬로 머리꾸미개를 꾸몄다.

 

仍思列仙之來會。尙乏上界之樓居。靑鸞引玉妃之車。羽葆前路。白虎駕朝元之使。金綅後塵。劉安轉經。拔雙龍於案上。姬滿逐日。駐八風於山阿。

여러 신선들이 모여들 것을 생각해 보니, 상계에 거처하던 누각이 오히려 비좁게 느껴졌다. 푸른 난새가 옥비(玉妃)의 수레를 끄는데 깃으로 만든 일산이 앞서고, 백호가 조회에 참석하는 사신을 태웠는데 황금 수실이 그 뒤의 먼지를 따랐다. 유안(劉安)이 경전을 옮겨 전하자 두 용이 책상 위에서 태어나고, 희만(姬滿)이 해를 쫓아가자 팔방의 바람이 산비탈에 머물렀다.

 

宵迎上元。綠髮散三角之髻。晝接帝女。金梭織九紋之綃。瑤池衆眞會南峯。玉京群帝集北斗。

새벽에 상원부인을 맞아들이자 푸른 머리는 세 갈래 쪽이 흩어졌고, 낮에 상제의 따님을 만났더니 황금 북으로 아홉 무늬 비단을 짜고 있었다. 요지(瑤池)의 여러 신선들은 남쪽 봉우리에 모였고, 백옥경의 여러 임금들은 북두칠성에 모였다.

 

唐宗踏公遠之杖。得羽衣於三章。水帝對火仙之棋。賭寰宇於一局。不有紅樓之高構。何安絳節之來朝。

당종(唐宗)은 공원(公遠)의 지팡이를 밟아 우의(羽衣)를 삼장(三章)에서 얻었고, 수제(手帝)는 화선(火仙)과 바둑을 두며 온 누리를 한 판에 걸었다. 붉은 누각이 높게 지어지지 않았더라면 어찌 편하게 붉은 깃발을 세우고 조회에 참례할 수 있었으랴.

 

於是。移章十洲。馳檄九海。囚匠星於屋底。木宿掄材。壓鐵山於楹間。金精動色。坤靈揮鑿。騁巧思於般倕。大冶鎔鑪。運奇智於錘範。

이에 십주(十洲)에 통문을 보내고 구해(九海)에 격문을 급히 보내어, 집 밑에 장인(匠人)의 별을 가두어 놓게 하였다. 목성이 재목을 가려 쓰고 철산(鐵山)을 난간 사이에 눌러 놓으니, 황금의 정기가 빛을 내고 땅의 신령이 끌을 휘둘렀다. 노반(魯般)과 공수에게서 교묘한 계획을 얻어내어 큰 풀무와 용광로를 쓰고, 기이한 재주를 도가니에 부리기로 했다.

 

靑赮垂尾。雙虹飮星宿之河。赤霓昂頭。六鼇戴蓬萊之島。璇題燭日。出彤閣於煙中。綺綴流星。架翠廊於雲表。

푸르고 붉은 꼬리를 드리우자 쌍무지개가 별자리의 강물을 들여 마시고, 붉은 무지개가 머리를 들자 여섯 마리 자라가 봉래섬을 머리에 이었다. 구슬 추녀는 햇빛에 빛나고, 붉은 누각이 아지랑이 속에 우뚝했다. 비단 창가에는 유성이 이어지고, 푸른 행랑을 구름 너머에 꾸몄다.

 

魚緝鱗於玉瓦。雁列齒於瑤階。微連捧旂。下月節於重霧。鳧伯樹纛。設蘭幄於三辰。金繩結綺戶之流蘇。珠網護雕欄之阿閣。

옥기와는 물고기 비늘같이 이어졌고, 구슬계단은 기러기같이 줄을 지었다. 미련(微連)이 깃대를 받드니 월절(月節)이 자욱한 안갯속에 내리고, 부백鳧伯이 깃대를 세우자 난초 장막이 삼진(三辰)에 펼쳐졌다. 비단 창문의 수술을 황금 노끈으로 매듭짓고, 아로새긴 난간의 아름다운 누각을 구슬 그물로 보호하였다.

 

仙人在棟。氣吹彩鳳之香臺。玉女臨窓。水溢雙鸞之鏡匣。翡翠簾雲母屛靑玉案。瑞靄宵凝。芙蓉帳孔雀扇白銀床。祥蜺晝鎖。爰設鳳儀之宴。俾展燕賀之誠。旁招百靈。廣延千聖。

신선이 기둥에 있어 오색 봉황의 향기로운 누대에서는 기운이 불어 나오고, 선녀가 창가에 있어 쌍 난새의 거울 갑에서는 향수가 넘쳐흐른다. 비취 발과 운모 병풍과 청옥 책상에는 상서로운 아지랑이가 서리고, 연꽃 휘장과 공작 부채와 백은 평상에는 대낮에도 상서로운 무지개가 둘러쌌다. 이에 봉황이 춤추는 잔치를 베풀고, 제비가 하례하는 정성을 펼치게 하였으며, 널리 백여 신령을 초대하고, 널리 천여 성인을 맞이하였다.

 

邀王母於北海。斑麟踏花。接老子於西關。靑牛臥草。瑤軒張錦紋之幕。寶簷低霞色之帷。獻蜜蜂王。紛飛炊玉之室。含果雁帝。出入薦瓊之廚。

서왕모를 북해에서 맞아들이니 얼룩무늬 기린이 꽃을 밟았고, 노자를 함곡관에서 영접하자 푸른 소가 풀밭에 누웠다. 구슬 난간에는 비단무늬 장막을 펼쳤고, 보배로운 처마에는 노을빛 휘장이 나직하게 드리웠다. 꿀을 바치는 왕벌은 옥을 달이는 집에 어지럽게 날고, 과일을 머금은 안제(鴈帝)는 구슬을 바치는 부엌에 드나들었다.

 

雙成鈿管晏香銀箏。合鈞天之雅曲。婉華淸歌飛瓊巧舞。雜駭空之靈音。龍頭瀉鳳髓之醪。鶴背捧麟脯之饌。琳筵玉席。光搖九枝之燈。碧藕氷桃。盤盛八海之影。獨恨瓊楣之乏句。

쌍성의 나전(羅鈿) 피리와 안향晏香의 은쟁(銀箏)은 균천(鈞天)의 우아한 곡조에 맞추고, 완화(婉華)의 청아한 노래와 비경(飛瓊)의 아름다운 춤은 하늘의 신령스러운 소리에 얽혔다. 용머리 주전자로 봉황의 골수로 빚은 술을 따르고, 학의 등에 탄 신선은 기린의 육포 안주를 바쳤다. 구슬 돛자리와 옥방석의 빛은 아홉 갈래의 등불에 흔들리고, 푸른 연과 하얀 복숭아 소반에는 여덟 바다의 그림자가 담겼다. 구슬 상인방에 글이 없는 것만이 한스러웠다.

 

繄致上仙之興嗟。淸平進詞。太白醉鯨背之已久。玉臺摛。長吉咲蛇神之太多。新宮勒銘。山玄卿之雕琢。上界鐫壁。蔡眞人之寂寥。

그래서 신선들에게 노래를 바치게 하였지만, <청평조(淸平調)>를 지어 올렸던 이백(李白)은 술에 취해서 고래 등을 탄지 오래이고, 옥대(玉臺)에서 시를 짓던 이하(李賀)는 사신(蛇神)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새로운 궁전에 명(銘)을 새긴 것은 산현경(山玄卿)의 문장 솜씨인데, 상계에 구슬을 아로새길 채진인(蔡眞人)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自慙三生之墮塵。誤登九皇之辟剡。江郞才盡。夢退五色之花。梁客詩催。鉢徹三聲之響。徐援彤管。咲展紅牋。河懸泉湧。不必覆于安之衾。句麗文遒。未應頮謫仙之面。

스스로 삼생(三生)의 티끌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운데, 어쩌다 잘못되어 구황(九皇)의 서슬 푸른 소환장에 이름이 올랐다. 강랑(江郞)의 재주가 다해서 꿈에 오색찬란한 꽃이 시들었고, 양객(梁客)이 시를 재촉하니 바리에 삼성(三聲)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붉은 붓대를 천천히 잡고 웃으며, 붉은 종이를 펼치자, 강물이 내달리듯, 샘물이 솟아나듯 글이 지어졌다. 자안(子安)의 이불을 덮을 필요도 없었다. 구절이 아름다운데다 문장도 굳세니, 이백의 얼굴을 대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立進錦囊之神語。留作瑤宮之盛觀。置諸雙樑。資於六偉。

그 자리에서 비단 주머니 속에 있던 신령스러운 글을 지어 올리고, (백옥루에) 두어서 선궁(仙宮)의 장관을 이루게 하였다. 쌍 대들보에 걸어 두고서 육위(六偉)의 자료로 삼는다.

 

拋梁東。曉騎仙鳳入珠宮。平明日出扶桑底。萬縷丹霞射海紅

어영차 떡을 들보 동쪽에 던지노니

새벽에 봉황을 타고 요궁(瑤宮)에 들어갔더니

날이 밝으면서 해가 부상(扶桑 : 해가 뜨는 동방에 있다고 하는 신목(神木)을 뜻함) 밑에서 솟아올라

붉은 노을 일만 올이 바다를 붉게 비추네.

 

拋梁南。玉龍無事飮珠潭。銀床睡起花陰午。咲喚瑤姬脫碧衫。

어영차 떡을 들보 남쪽에 던지노니

옥룡이 아무 일 없어 연못 물이나 마시니

은평상 꽃그늘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

웃으며 요희(瑤姬)를 불러 푸른 적삼을 벗기게 하네.

 

拋梁西。碧花零露彩鸞啼。春羅玉字邀王母。鶴馭催歸日已低。

어영차 떡을 들보 서쪽에 던지노니

푸른 꽃에 이슬이 떨어지고 오색 난새가 우는데

옥자玉字를 수놓은 비단옷 입고 서왕모를 맞아

학을 타고 돌아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네.

 

拋梁北。溟海茫洋浸斗極。鵬翼擊天風力掀。九霄雲垂雨氣黑。

어영차 떡을 들보 북쪽에 던지노니

북해가 아득해서 북극성이 잠기고

봉새의 깃이 하늘을 치니 그 바람에 물이 치솟네.

구만리 하늘에 구름이 드리워 빗기운이 어둑하네.

 

拋樑上。曙色微明雲錦帳。仙夢初回白玉床。臥聞北斗廻杓響。

어영차 떡을 들보 위에 던지노니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단 장막을 밝히고

신선의 꿈이 백옥 평상에 처음으로 감도는데

북두칠성의 국자 돌아가는 소리를 누워서 듣네.

 

拋樑下。八垓雲黑知昏夜。侍兒報道水晶寒。曉霜已結鴛鴦瓦。伏願上樑之後。

어영차 떡을 들보 아래에 던지노니

팔방에 구름이 어두워 날 저문 것을 알고

시녀들이 수정궁이 춥다고 아뢰네.

새벽 서리가 벌써 원앙 기와에 맺혔네.

 

琪花不老。瑤草長春。曦舒凋光。御鸞輿而猶戲。陸海變色。駕飆輪而尙存。銀窓壓霞。下視九萬里依微世界。璧戶臨海。咲看三千年淸淺桑田。手回三霄日星。身遊九天風露

엎드려 바라오니, 이 대들보를 올린 뒤에 계수나무 꽃은 시들지 말고, 아름다운 풀도 사철 꽃다워지이다. 해가 퍼져 빛을 잃어도 난새 수레를 어거하여 더욱 즐거움 누리시고, 땅과 바다의 빛이 바뀌어도 회오리 수레를 타고 더욱 길이 사소서. 은빛 창문이 노을을 누르면 아래로 구만리 미미한 세계를 내려다보시고, 구슬문이 바다에 다다르면 삼천 년 동안 맑고 맑은 뽕나무 밭을 웃으며 바라보소서. 손으로 세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시고, 몸은 구천의 바람과 이슬 속을 노닐게 하여지이다.

 

 

난설헌 허씨(蘭雪軒許氏, 1563년 ~ 1589년 3월 19일)는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 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許筠)이 그녀의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점차 널리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이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의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성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12년에는 취사원창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초당 허엽의 딸로 허봉의 여동생이자 교산 허균의 친누나이며,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다. 어의 허준은 그의 11촌 숙부뻘이었다. 손곡 이달(李達)의 문인이다. 강원도 출신이다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과 그의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호는 난설헌이다. 허성은 이복 오빠였고, 이복 언니 2명과, 친오빠 허봉(許篈)이 있었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許筠)은 그의 친 남동생이었다. 후일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고를 편찬할 때 기록되어 이름과 자가 전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명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허엽이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허성(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다시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을 재취로 삼아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허봉, 초희, 허균 3남매를 두었다.

 

그밖에 선조 때의 유명한 의관인 어의 허준이 그의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다.

 

일찍부터 그녀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허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은 서경덕과 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그녀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호를 난설헌 또는 난설재라 하였다.

 

1577년 15세 무렵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 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 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종 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 :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란 뜻으로,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뜻에서 기생을 말함.)의 풍류를 즐겼다.

 

남편 김성립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 중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전했다. 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詩)를 한 구절 써 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이는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 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편지를 본 김성립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

 

한번은 남편 김성립이 서당 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접(接)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

이 편지에서 오늘의 접(接)에는 재(才)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첩(妾,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에 직언했다 한다.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다.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년(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哭子곡자(아들 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러운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애애광능토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 비치네)

紙錢招汝魄지전소여백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 테지)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랑음황대사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곧 임신 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은 계속 밖으로 겉돌았다. 또한 어머니 김씨 역시 객사하였고, 동생 허균도 귀양 가고 말았다. 시 재주와 문명은 당대에도 알려졌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시 조차도 음란하다며 저평가받았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단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되었다.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 가고, 동생인 허균마저 귀양 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今年乃三九之數 / 금년이 바로 3·9수( 3 x 9 = 27세)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 /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또한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담채화, 난초화 등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그의 시와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에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다.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저서로는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후일 그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추증 예겸에 따라 증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 '빈녀음', '곡자', '망선요', '동선요', '견흥' 등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 '봉선화가' 등이 현재 전한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29의 5번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현 하남시로 이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1608년 동생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보인 뒤, 그 재주에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의 주선으로 비용을 지원받아 출간하여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알려지면서 격찬을 받았다. 한편 1711년에는 일본에도 소개되어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郎)가 그녀의 시를 간행, 한때 애송되기도 하였다.

 

고부 갈등과 남편과의 불화로 당대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영조, 정조 이후에 중인과 평민 등도 문학과 시조 작시 등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작품성과 천재성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허균이 광해군 말년 옥사 당하면서 잊혔다가, 1940년 무렵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그녀의 시와 작품성을 평가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 9월에는 그의 시작품 168편을 모아 청 만력 40년(1612년)에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 ≪취사원창≫(聚沙元倡)이 새롭게 발굴됐다. ≪취사원창≫은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출신 문인인 반지항(潘之恒, 1556~1622)의 문집 『긍사』(亘史)에 1 책으로 수록되어 들어있었다. 이 시집에는 허난설헌의 산문 글 1편도 들어있었는데, 당시 중국 난징대학교 박사과정 유학생인 김영숙이 처음 발견했고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순천향대 중문학과 교수 박현규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이던 이 소장품을 정밀분석해 한국 학계에 소개하여 알려졌다. 그동안 취사원창은 중국 학계에서도 호문해(胡文楷)가 1957년 간행한 『역대부녀저작고(歷代婦女著作考』라는 책에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실전된 상태였다.≪취사원창≫에 나타난 난설헌 시는 오언고시 14편, 칠언고시 11편, 오언율시 6편, 칠언율시 14편, 오언절구 20편, 칠언절구 103편이며 산문 1편은 그가 8세 때 지었다는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다.

 

처음 세운 비석은 실전되었으나 대한제국 멸망 이후 다시 세워졌다. 새 비석은 이숭녕(李崇寧) 등에 의해 오석으로 세웠으며, 전면에는 이숭녕이 지은 '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는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허난설헌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 29-5에 있다. 현재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문인석을 제외한 묘비·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상석·망주석·둘레석은 근래에 만들어졌다. 묘비의 비문은 이숭녕이 지은 것이며,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詩碑)가 서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1986년 5월 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