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환성지안 선시 유음,심등 2수(喚惺志安 禪詩 幽吟, 心燈 2首)

조선 후기 화음강사(華嚴講師)인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은 선교겸수(禪敎兼修)하며 경전 연구로 당대 화엄 대가를 이룬 환성 지안은 임제종의 선지(禪旨)를 굳건히 주장한 선사로서, 편양파(鞭羊派) 월담 설제(月潭雪齊, 1632~1704)의 제자이다. 한편 조선 후기 화엄과 선(禪)의 일치를 주장한 환성파(喚惺派)의 시조로서 대흥사 13대 종사(宗師) 가운데 6대 선지식이다. 지안은 성이 정(鄭) 씨, 호는 환성(喚惺), 자가 삼낙(三諾)이다.

 

지안이 대흥사에 머물 때, 부처님께 공양올렸는데 공중에서 스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려 지안이 세 번 답했다. 이로 인해 자를 ‘삼락(三諾)’이라 하고 법호를 ‘환성(喚惺)’이라 불렀다. 지안은 춘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단정했으며, 15세 때 미지산 용문사로 출가해 상봉 정원(霜峰淨原, 1627~1709)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의 골상은 맑고 엄하며(淸嚴), 목소리는 낭랑하고, 말은 간단명료하며, 얼굴빛이 화락하다는 기록이 전한다. 17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화엄학의 대가인 풍담 의심(風潭義諶)의 직계인 월담 설제(月潭雪霽)에게 법을 받았다.

 

이후 지안은 춘천 청평사에서 선(禪)과 교(敎)를 겸비해 수행하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은 이후 전국을 행각 하며 화엄학 강의를 하였는데 지안의 강연은 “머리 가르마 타듯 명쾌하고, 넓고 밝음이 강과 하천을 구분하는 것과 같아서 대중들이 활연히 개오하게 되니, 종풍이 크게 드날리었다”라고 한다. 예지(豫知)와 대중성 법석(法席)이 확산되자 조정과 고을 관리들이 긴장하게 되었고 무고와 반대파의 모함으로 제주도로 유배 8일 만에 병을 얻어 입적했다.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는 임종게를 남겼다. 법랍 51년, 세납 66세이다. 선사가 유배를 당해 문도들과 제자들이 비를 세우지 못하다가 100년이 지나 선사의 억울함이 밝혀져 해남 대흥사에 비가 세워졌다. 비문을 지은 이조판서 홍계희(1703~1771)는 비문 끝에 “훌륭한 대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배 보내 입적케 한 일은 조선의 비극임을 극렬히 통탄한다”라고 했다.

 

지안의 법맥은 휴정(休靜)-언기(彦機)-풍담의심(風潭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體淨)-연담(蓮潭)ㆍ상언(尙彦) 등이다.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喚醒詩集) 1권이 있다.

 

이처럼 당대 화엄사상의 대가로서 밝고 명쾌한 강연과 야단법석(野壇法席)으로 종풍(宗風)을 크게 일으키며 추앙을 받았던 선사가 남긴 선시 2수를 예서체와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幽吟(유음 : 유유하게 살며 읊음)

 

盡日忘機坐(진일망기좌) 온종일 무심히 앉아만 있으니

春來不識春(춘래불식춘) 봄이 와도 봄 온 줄 알지 못하네

鳥嫌僧入定(조협승입정) 새는 산승이 선정에 드는 것을 싫어해

窓外喚山人(창외환산인) 창밖에서 산승을 부르고 있네

 

心燈(심등 : 마음의 등불)

 

歷劫傳之無盡燈(역겁전지무진등) 오랜 세월 전해오는 무진한 등불이여

不曾挑剔鎭長明(불증도척진장명) 일찍이 심지를 돋우지 않아 영원토록 밝다네

任他雨灑兼風亂(임타우쇄겸풍난) 비 뿌리고 바람 몰아쳐도

漏屋虛窓影自淸(누옥허창영자청) 허물어진 빈 창에 그림자마저 청정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