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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홍세태 야국(洪世泰 野菊)

홍세태(洪世泰,1653~1725)는 조선 후기의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 유하(柳下). 중인 신분으로 경사(經史)와 시(詩)에 능통하여 사대부 들과 친하게 지내며 중인들과 낙사(洛社)라는 시사(詩社)를 만들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그는 문학적 재능은 뛰어났으나 평생을 궁핍하게 살았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광좌(李光佐)의 도움으로 말년에는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제술관·남양감목관 등을 지내기도 했다. 1712년 위항시인 48명의 시작품을 모아 (해동유주 海東遺珠)라는 시선집을 편찬하는 등 위항문학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31년  문인들에 의해 시문집인(유하집) 14권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 야국을 예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들국화(野菊)                                       - 홍세태(洪世泰)   

 

野菊本無主(야국본무주) 들국화는 본래 임자가 없는데

寒花開爲誰(한화개위수) 차가운 꽃 누굴 위해 피었을까

行人來自折(행인래자절) 길가는 나그네가 꺽어

馬上有新詩(마상유신시) 말 위에서 새로운 시 읊어 본다네

 

이른 봄 핀 꽃이 매화라면 국화는 늦은 가을에 피는 꽃이다.

입추가 한참 지났지만 가을 하면 국화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계절을 대표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차화개진갱무화(此花開盡更無花 : 이 꽃이 피어 시들면 다시 꽃 볼일 없다)처럼 한해를 보내며 문인묵객들이 수많은 시에서 국화를 소재로 삼고 있다. 

송대 소동파는 “연꽃은 지고나면 비를 받칠 덮개가 없지만,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를 이겨내는 가지가 있다.(荷盡已無擎雨蓋,菊殘猶有傲霜枝)”고 상찬했다. 

이와 같이 여러사람들이 시문에 국화를 주제로 얼마나 국화를 아끼면서 관찰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시문과 서화를 통해 국화가 지닌 인고와 절개의 성정를 본받고, 수양과 양생의 문화로까지 승화시켰다.   

이 시를 통하여 들판에 핀 들국화를 보면서 길가는 나그네가 말에서 내려 두어 송이 꺾어 그윽한 들국화 향기에 취하면서 새로운 시상에 잠길만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