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한국불교(佛敎)는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쇠퇴기(衰退期)에 서 있는 느낌이다.
성철(性徹) 스님 이후 법을 전수받은 제자들도 서서히 자취를 잃어가고 있으며 인구감소와 함께 스님이 되겠다는 지원자도 현격하게 줄어 10여년 이후에는 빈 사찰이 점 점 늘어나게 될 것이다.
처절한 탐구와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대오(大悟)를 한 스님이 나타난다 해도 인가해 줄 도인(道人)이 없다면 하는 기우(杞憂)를 해본다.
중흥기(中興期)였던 신라, 고려시대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 전란을 겪으며 어려웠던 시기에 훌륭한 스님들이 대거 출현해 근대 불교를 이끌었던 고승(高僧)들은 발자취는 시간이 흐를수록 높은 선사로 재조명될 것이다.
불교에서 화두(話頭)를 공안·고칙(公案·古則)이라 하는데 스승이 제자에게 제시하는 깨침으로 가는 비밀 열쇄인 샘이다.
공안에는 천 칠백여 화두가 있는데 우선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가 가장 유명하다.
무자 화두는 어느 때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승(僧)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때 조주가 대답하기를 “없다(無)”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상 없다는 말은 무자(無字)를 풀이한 말이다. 조주선사는 풀이로 말한 것이 아니라 "무(無)!"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어찌하여 “무”라고 했을까의 의문을 간절하게 탐구하다 보면 한 순간 의문이 풀리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순간은 가슴속 밝음이 백, 천 개 해와 달 같아 시방세계(十方世界)를 한 생각으로 밝게 통달하되 한 털끝만큼도 분별심(分別心)이 없으니 비로소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 했다.
또한 화두를 참구하면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계를 지나 깨치게 된다고 했다.
달마불식(達磨不識)이라는 화두가 있다.
양나라의 무제(武帝)가 달마(達磨)에게 “불교의 근본 사상은 어떤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달마는 “끝없이 크고 넓어 거기에는 범인(凡人)도 성인(聖人)도 없소”라고 대답했다. 무제가 다시 “그래도 여기 성체제일의(聖諦第一義)를 전하려고 멀리 인도에서 온 성인(聖人)이 지금 내 앞에 있지 않소. 대체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이오?”하고 물었다. 그때 달마대사는 난 그런 것 모르겠소 "불식(不識)”하고 대답했다. 불식은 인식(認識)을 위한 또 다른 방편(方便)일까?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읊은 시 우음(偶吟)을 살펴보면 첫 구절에 불식(不識)의 문구가 떠오른다. 마치 선시 풍(禪詩 風)의 5언절구로 소 타는 것에 대한 즐거움은 말(馬)이 없는 까닭에 알게 되었다는 의미로 한 폭으로 그려지는 전원시(田園詩)로서도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이를 예서체(隸書體)로 자서(自書) 해 보았다.
우음(偶吟 : 우연히 읊다)
不識騎牛好(불식기우호) 소 타는 것이 이리 즐거울 줄은 몰랐는데,
今因無馬知(금인무마지) 나 다닐 말이 없는 까닭에 이제야 알았네.
夕陽芳草路(석양방초로) 해거름 저녁 무렵 풀 향기 가득한 들길,
春日共遲遲(춘일공지지) 나른한 봄날 저무는 해도 함께 느릿느릿.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은 조선 중기에, 교리, 정언, 용담현령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綾城)이다. 직장(直長 : 고려 시대에 둔 육품에서 구품까지의 하급 벼슬) 양사위(梁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양담(梁湛)이고, 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다.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 · 전랑(銓郞) ·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 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彦)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趙光祖) · 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 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削職)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 · 박세희(朴世熹) · 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 : 조선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신하. 조광조, 김식, 기준, 한충, 김구, 김정, 김안국, 김정국 등을 이른다.)들이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 해에세로 죽었다.
13세 때 송흠(宋欽)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 · 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 · 『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630년(인조 8)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 되었다.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學圃遺集)』2 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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