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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촌은 유희경 산중추우, 강정, 월계도중(村隱 劉希慶 山中秋雨, 江亭, 月溪途中)

추야장장(秋夜長長) 말처럼 하루가 다르게 가을밤이 길어지며 깊어간다. 습관처럼 몸에 배어진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늦은 저녁시간에 붓을 잡고 마음에 새겨둔 글씨를 쓰는 것이다. 글의 소재는 선조들이 남긴 기록의 유산을 찾아보면 무한대에 가깝다. 그들이 남긴 시 한 수 한 수 마다 간과할 수 없는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그때 시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화선지(주로 반절지 송지(松紙)를 사용)에 붓에 먹물을 묻혀 사전 고민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자연스레 써내려 가는 것이기에 힘들거나 거추장스러움이 전혀 없다. 어쩌다 오자나 탈자가 나타나면 다시 쓰면 되긴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부끄러운 글씨라도 지나간 나의 흔적이며 글씨보다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내용중심으로 함께 배운다는 의미에서 공유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 시 산중추우(山中秋雨) 외 2수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산중추우는 약 400여년전 백로(白露)가 지난 이맘때쯤 지은 시로 촌은 선생의 격조 높은 시의 세계를 느껴보고자 한다. 앞서 소개한 중국의 육유(陸游)와 당완(唐琓)의 애절한 사랑의 시 채두봉(釵頭鳳)과 함께 유희경과 부안(扶安)의 기생 이매창(李梅窓)과의 사랑이야기는 차제에 시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산중추우(山中秋雨 : 산속의 가을비)

白露下秋空(백로하추공) 백로가 지나니 가을하늘 더욱 높고

山中桂花發(산중계화발) 산속에는 활짝 핀 계수나무 꽃무리

折得最高枝(절득최고지) 가장 높이 핀 꽃다지를 꺾어 들고

歸來伴明月(귀래반명월) 밝은 달 벗 삼아 함께 돌아온다

 

강정(江亭 : 강가 정자에서)

綠綠門前柳(녹록문전류) 푸르구나, 문 앞 버드나무

微凉檻外風(미량함외풍) 서늘하여라, 정자 난간 밖 바람

乾坤分上下(건곤분상하) 하늘과 땅은 위아래로 나눠있고

日月見東西(일월견동서) 해와 달은 동쪽과 서쪽에서 뜨고 진다

萬象孤吟裏(만상고음리) 만상을 마음속으로 혼자 읊는데

千山一望中(천산일망중) 많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漁樵生計足(어초생계족) 어부와 나무꾼도 자기 생계에 만족하는데

愧我枕流翁(괴아침류옹) 오기로 퇴락한 늙은이, 내 삶이 부끄럽구나

 

월계도중(月溪途中 : *월계로 가는 도중에)

山含雨氣水生煙(산함우기수생연) 산이 비를 머금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데

靑草湖邊白鷺眠(청초호변백로면) 푸른 풀 호반에서 백로가 조네

路入海棠花下轉(로입해당화하전) 길은 해당화 아래로 돌아드는데

滿枝香雪落揮鞭(만지향설낙휘편) 가지에 가득한 꽃 향기 채찍에 흩어지네  

 

*월계(月溪) : 남한강 하류 팔당과 양수리 일대를 부르던 옛 지명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 1545 ~1636)의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아버지는 종 7품인 계공랑(啓功郎)주1 유업동(劉業仝)이고 어머니는 배씨(裴氏)이다.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宣祖)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또 중국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戶曹)의 비용을 모두 쓰게 되자 그가 계책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 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내쫓아 서인(庶人)주2으로 강등시키려고 그에게 상소(上疏)를 올리라 협박했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른 뒤에 그 절의를 높이 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

그는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 · 정치(鄭致) · 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했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던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장례의식에 특히 밝았으므로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가의 장례를 예법에 맞게 치르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 : 조선시대 문신·문인 허균이 우리나라 역대의 시를 시사적(詩史的)인 관점에서 평가한 평론집. 시평집)』를 살펴보면, 유희경을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

천민 출신이나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했으며 자기 집 뒤의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枕流臺)’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유명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했다. 그때에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3권이 전하며 그 밖의 저서로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아들 유일민(劉逸民)의 원종(原從: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으로 인하여 자헌대부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