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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빛 바랜 옛 비문(碑文)

농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가을비가 주룩주룩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세종현장 옆에 위치한 제법 잘 가꿔진 한적하면서도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점심시간에 잠시 운동 삼아 걷는 공원인데 이름이 오가낭뜰 근린공원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라 찾아보니 순수한 우리나라 말로 이곳 예 옛 지명이 오가낭골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오가낭의 뜻은 잘 모르겠지만 한번 들으면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는 아름다운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가랑비 내리는 오가낭뜰공원을 동료들과 산책도중 나지막한 산기슭에 위치한 잘 조성된 묘(墓)가 있다.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오늘은 묘비명을 살펴보니 석질의 경도(硬度)가 약한 오래된 비석임에도 새긴 글의 마모가 심했지만 몇 자는 판독이 가능함에 따라 잠시 옛 비문을 해독해 보기로 하였는데 뜻 밖에 강순용(康舜龍)이라는 분의 묘였다.  
추사 김정희가 쓴 대련(對聯) 중에 好古有時搜斷碣(호고유시수단갈) 硏經婁日罷吟詩(연경누일파음시)이 있는데 해석하면 “옛것을 좋아하여 때로는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여러 날 시 읊기도 그만뒀다”는 뜻으로 옛 선조들이 남긴 흐릿한 흔적들을 찾아 연구하고 살펴보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강순용의 비석을 외형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수 십 년 이 지나면 비석에 새겨진 글자도 서서히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어 사라질 것이다.
올여름 집중호우로 묘 우측 부분이 허물어졌지만 신천강씨(信川康氏)의 후손들이 정성스레 묘를 잘 가꾸고 있기에 오늘날까지 비석은 안전하게 유존(遺存)되고 있다. 비문의 글씨체는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반듯한 해서체가 아닌 것으로 보아 당시 일족이 참화(慘禍)를 당한 후 조선 초 후손이 묘지를 조성하고 비문에 글을 쓰고 새긴 것으로 판단된다. 비 측면이나 후면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심한 마모로 인하여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잠시 시간을 내여 추사선생의 대련구(對聯句)처럼 빛바랜 옛비문을 즐거운 마음으로 판독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잘 조성된 분묘앞에 옛 비석 3기가 서있다
우측 비석 정면(글자가 새겨졌을 것으로 판단되나 마모되었거나, 글씨를 지운 것으로 보임)
우측비석 측면 (호패형 비석은 글자를 새기지 않은 경우도 있다.)
우측 비석 후면
중앙에 위치한 비석정면 글씨 : *평장재령백강순용O (平章載寧伯康舜龍O) 가부인권씨합장지묘(嘉夫人權氏合葬之墓) *평장사(平章事)는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2품 관직. O : 판독불가(永자로 추정)

측면 또는 후면 글자를 고의적으로 지운 것은  1차 왕자의 난(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인 동시에 정도전 일당과 방원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하다.)에 연루되어 일족이 참화를 당한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고의적으로 파서(破書)한 것으로 사료된다(私見). 평장(平章)은 관직(官職)이고 재령백(載寧伯)은 작호(爵號)이다.

중앙위치 비문 측면
중앙위치 비문 후면(슬픈 역사의 주인을 지키고 있는 비에 젖은 비석이 비통함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좌측위치 비문 정면
좌측위치 비문 측후면
좌측위치 비문 후면

강순용(康舜龍 ? ~ ?)은 고려시대 무신이자 이성계(李成桂)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오빠이다. 호는 화곡(化谷)이다.
강순룡의 본관(本貫)은 신천(信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우정승을 지낸 강숙재(康淑才), 할아버지는 상호군을 지낸 증상산부원군(贈象山府院君) 강서(康庶)이다. 아버지는 찬성사를 지낸 곡산군(谷山君) 강윤성(康允成)이다.
옛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고정리 신천강씨(信川康氏)는 곡산파(谷山派)로 통훈대부 행 아산현감 겸 청주진관병마절제도위(通訓大夫行牙山縣監兼淸州鎭管兵馬節制使)를 지낸 강혁(康赫)이 입향(入鄕) 한 것으로 전하여지는 가운데 강진경이 역모사건을 피하여 금남면 발산리로 이주하였다가 옛 남면 고정리 등지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강순룡은 고려에서 문무과에 장원한 후 원나라에 들어가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이 되었고, 몽골식 이름인 바얀티무르[伯顔帖木兒]로 고쳐 활동하였다. 1354년(공민왕 3)에 돌아와 강중상(姜仲祥)과 함께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그러나 1374년(공민왕 23) 오랑캐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 등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의 장수 나하추(納哈出)에게 달아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김의를 원나라로 보냈다는 혐의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한편 강순룡의 누이동생이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로, 이성계의 정변과 조선 건국 과정에서 유력한 협력 세력으로 작용하면서 조선 개국 이후 재령백(載寧伯)의 작호(爵號)를 받았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일족이 참화(慘禍 : 비참하고 끔찍한 재난이나 변고)를 당하였다.
강순룡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산울리 대비실 마을 동쪽 능선의 서쪽 비탈길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경기도 광주시 오금동에 있던 것을 1989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묘와 함께 비(碑)가 남아 있다. 호패형 비석으로 높이 120㎝, 너비 44㎝ 규모이다.
- 강순룡(康舜龍)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