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진주성 촉석루(晋州城 矗石樓)

전 주(前 週) 지리산 뱀사골에서 만추가경(晩秋佳景)과 와운(臥雲)마을의 천년송을 눈에 담고 오후에는 진주에 들러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보루(堡壘) 삼아 촉석루(矗石樓)를 감싸고 있는 진주성(晋州城)을 30년 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예전의 진주성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감회에 젖어 발길을 멈추고 한동안 머물며 명사(名士)들의 영화(榮華)와 치열하고 참혹했던 임진외란(壬辰外亂)의 현장에 서서 스쳐간 영웅들을 고금사를 남강에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졌다.

 

진주성(晋州城)은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석성(石城)으로, 기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삼국시대로부터 기원했음을 밝힐 뿐이며,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성 안에는 진주 촉석루(矗石樓), 의기사(義妓祠),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북장대(北將臺), 서장대, 창열사(彰烈祠), 호국사(護國寺),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이 있고, 1984년에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국립진주박물관이 개장을 하였다.

진주성 내의 촉석루(矗石樓)는 1604년부터는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의 병영이었고, 1895년 5월부터는 경상도관찰사부(慶尙道觀察使府)가 경남관찰사부(慶南觀察使府), 경북관찰사부로 나뉘면서 경상남도관찰사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촉석루와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 평양 부벽루(平壤 浮碧樓)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누각이다.

 

촉석루 하면 작자미상의 시조가 떠오른다.

 

촉석루 밝은 달이 논낭자(論娘子)의 넋이로다

향국(向國)한 일편단심 천만년에 비치오니

아마도 여중충의(女中忠義)는 이뿐인가 하노라.

 

촉석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으로, 고려 말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이다.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하였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修築) 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밀양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현재의 건물은6·25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누(樓) 또는 누각(樓閣)이란 건물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여 지은 집으로 보통 강학, 집회, 지휘소 또는 휴식공간으로 쓰인다.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진주성에서 마음껏 누리며 촉석루 현판에 9개의 시가 걸려있는데 내용과 함께 그중 한 편의 시를 자서(自書) 해 보며 진주성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진주성과 촉석루)

진주성 주변으로 잔디가 가을색으로 변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비림(碑林)은 벼슬아치들의 공덕, 선정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진주성 북장대
진주성 안에 있는 월영산 호국사
진주성을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남강
촉석루
촉석루
강쪽의 ‘촉석루’ 편액 글씨는 유당(惟堂) 정현복(鄭鉉福 1909~1973)의 작품
강가 반대편 ‘촉석루’ 편액은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 글씨다.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한 의기사
논개(論介, 1574년 ~ 1593년) 영정 : 본 영정은 충남대학교 석천(石川) 윤여환(尹 汝煥) 교수의 작품으로  조선시대 전통 영정기법으로 제작 되었다.

 

논개(論介)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

사랑보다도 강하다.

,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 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卞榮魯, 1898 ~ 1961)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동아일보 기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등을 역임한 영문학자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변영복(卞榮福)이었으나, 나중에는 영로(榮魯)라는 이름을 주로 썼고, 61세가 되던 1958년이 되어서야 변영로로 정식 개명하였다. 호는 수주(樹州)이다.

의암(義巖)은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촉석루 아래에 남강변에 있는 경상 누층군 진주층 바위로, 제2차 진주성 전투 직후 1593년 7월 29일 논개(論介)가 왜장 기다 마고베를 껴안고 남강에 빠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다. 주변 물결이 거세어 위험하다는 뜻의 위암(危巖)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2001년 9월 27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35호 의암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
‘남장대(南將臺)’현판은 은초(隱樵) 정명수(1909~2001)의 글씨다. 그는 진주에서 태어나 부친이 건립한 ‘비봉루(飛鳳樓)’의 현판을 쓰기 위해 서예에 입문했다 한다. 평생을 서예에 매진하면서 진주를 벗어나지 않고 작품 활동과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였으며, 부친이 건립한 비봉루에서 활동하다가 별세했다. 서예에 입문할 당시 진주의 비봉산 자락의 의곡사에 머물고 있던 추사체의 대가 성파(星坡) 하동주(1865~1943)에게 체계적으로 서예를 배워 그맥을 이었다.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현판은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峰 1908~1991)의 글씨다. 경북 김천출신으로 해방 이후 청남묵연회대표, 동명서예원장 등을 역임한 근대 서예가다.

 

경제 하연(敬齋 河演)

高城絶壑大江頭(고성절학대강두) 높은 성 깎은 벼랑 큰 강 머리 임한 곳에

冬栢梅花矗石樓(동백매화촉석루) 동백 매화 우거진 곳에 촉석루 서 있구나.

若也登臨留勝跡(약야등임유승적) 만약에 여기 올라 좋은 정취 남기려면

請題佳句記吾州(청제가구기오주) 아름다운 글을 청하여 우리 고을에 기록하리.

 

경제 하연(敬齋 河演 1376 ~ 1453)은 고려 말기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 신희옹(新稀翁) · 신희재(新稀齋)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부는 대사헌 하윤원(河允源), 부친은 부윤 하자종(河自宗)이며, 모친은 판서 정우(鄭寓)의 딸 진주정씨(晉州鄭氏)이다. 개성윤(開城尹) 이존성(李存性)의 딸인 성산이씨(星山李氏)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시 · 서 · 화 삼절로 일컬어졌던 하응임(河應臨)의 5대조이다.

1396년 생원 · 진사시에 합격하고, 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1397년 봉상시 녹사 · 직예문관을 역임하고, 이후 춘추관 수찬관 · 문하주서 등을 거쳐, 1402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예조좌랑 · 병조좌랑 · 형조좌랑 · 이조정랑 · 병조정랑을 거쳐 1406년 이조정랑 겸지제교가 되었다. 태종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하였다고 한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예조판서 ·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 병조참판 · 형조참판 · 경상도 도관찰출척사를 거쳤다. 1423년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7 종파를 선 · 교 양종,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받았다.

1425년 경상감영 제명기(題名記)에 서를 지었고, 왕명으로 『경상도지리지』를 편찬하였으며, 『사서오경대전』 및 『성리대전』 등의 책을 간행하였다. 이후 이조참판 · 예조참판 · 병조참판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1438년 좌참찬이 된 이후 우찬성 · 좌찬성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고, 1445년 우의정이 되어 70세로서 궤장을 받았다. 1447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부사가 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재차 물러가기를 청하였다가 윤허받지 못하였다. 1451년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1453년에 사망하였다. 1454년에 문효(文孝)의 시호가 내려지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463년 강희맹이 행장을 짓고, 충효문이 세워졌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성품이 간결하고 온화하였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독서와 시 읊기를 좋아했다. 하성은 유교사상으로 기강의 확립을 꾀했고, 관리들의 정직 · 청렴을 격려했으며, 농가(農歌)를 지어 농사를 장려하는 한편 곳곳에 영춘정(迎春亭) · 편월정(片月亭) · 대수정(大樹亭) · 어약정(魚躍亭) 등을 지어 농부들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과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고, 1447년 안평대군과의 친분으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에 찬시를 썼다.

편서로는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진양연고(晋陽聯藁)』가 있다. 글씨에 능하였으며, 남아있는 필적으로 행초서가 있는데, 당시 유행하였던 송설체와 안평체의 필의가 있으나 송설체의 연미함에서 벗어나 필력이 준엄하고 힘차며, 치밀한 장법과 결구가 돋보인다.

 

태계 하진(台溪 河溍)

滿目兵塵暗九區(만목병진암구구) 병진이 눈에 가득 온 세상이 어두운데

一聲長笛獨憑樓(일성장적독빙루) 긴 피리 한 소리에 홀로 누각에 기대었네.

孤城返照紅將斂(고성반조홍장렴) 외로운 성에 낙조도 붉은빛을 거두고

近市晴嵐翠欲浮(근시청람취욕부) 저잣거리에는 맑고 푸른 기운 떠 있네.

富貴百年雲北去(부귀백년운북거) 평생의 부귀영화 구름처럼 떠가고

廢興千古水東流(폐흥천고수동류) 천고의 흥망성쇠는 물과 같이 흘러가네.

當時冠盖今蕭索(당시관개금소색) 당시의 고관대작 이제는 적막한데

誰道人才半在州(수도인재반재주) 그 누가 인재의 반이 진주에 있다던가.

 

태계 하진(台溪 河溍 1597 ~ 165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진백(晉伯), 호는 태계(台溪). 대사간 하결(河潔)의 7세손이며, 하기곤(河起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공조참의 하한(河瀚)이고, 아버지는 하공효(河公孝)이며, 어머니는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윤기(尹起)의 딸이다.

이각(李殼)의 문인이다. 어렸을 때 덕천서원(德川書院)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624년(인조 2) 생원·진사의 양시에 합격하고, 163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봉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상주에 이르렀다가 아버지의 상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상을 마친 뒤 병조낭관·헌납·지평을 역임하다가 신병과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다시 지평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가 사은 한 다음 김자점(金自點)의 전횡을 탄핵하고 즉시 사임, 귀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장령·사간·집의로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관후한 성품으로 직언을 잘하였다.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 『태계문집』 4책이 있다.

 

우곡 정이오(愚谷 鄭以吾)

興廢相尋直待今(흥폐상심직대금) 흥망이 돌고 돌아 지금을 기다렸나

層巓高閣半空臨(층전고각반공임) 층암절벽 높은 누대 하늘 끝에 다다랐네.

山從野外連還斷(산종야외련환단) 들판 건너 산줄기는 이어졌다 끊어지고

江到樓前闊復深(강도루전활복심) 누각 앞에 이른 강은 넓어지고 깊어지네.

白雪陽春仙妓唱(백설양춘선기창) 백설양춘(白雪陽春)은 선기녀(仙妓女)의 노래요

光風霽月使君心(광풍제월사군심)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사군(使君)의 심사로다.

當時古事無人識(당시고사무인식) 당시의 옛 일을 아는 사람 없는데

倦客歸來空獨吟(권객귀래공독음) 고달픈 객 돌아와 속절없이 읊조리네.

 

우곡 정이오(愚谷 鄭以吾 1347~1434) 고려후기 조선전기 문무관인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이다. 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아들은 정분(鄭苯)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에 예문관 검열이 되고, 공조와 예조의 정랑, 전교부령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 1398년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 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1400년(정종 2)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이 되었으며, 병조 의랑(兵曹議郎), 예문관 직제학, 예문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03년(태종 3) 대사성으로 승진하였고, 1405년 3월에 김과(金科)와 함께 생원시를 관장하였다. 1409년 병서 습독 제조(兵書習讀提調)를 거쳐 동지춘추관사를 겸임,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13년 『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 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1418년 72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정이오는 시(詩)에 재능이 뛰어났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 태종의 명으로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13년에 예문관 대제학과 지공거를 겸했으며, 세종 때에 성균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다.

 

한사 강대수(寒沙 姜大遂)

戰場無恙只名區(전장무양지명구) 전장에서 별 탈 없기 오직 이곳 명구런가

人世虧成百尺樓(인세휴성백척루) 무너지고 다시 세운 백 척의 누각이라.

納納乾坤遙峀立(납납건곤요수립) 천지에 휩싸 안겨 먼 산은 솟아 있고

溶溶今古大江流(용용고금대강류) 고금에 넘실넘실 큰 강은 흐르네.

船橫官渡隨緣在(선횡관도주연재) 나루터 가장자리 배는 가로 놓여 있고

鷗占烟波得意浮(구점연파득의부) 물안개 피는 파도에 뜻을 실은 갈매기 떠다니네.

景物有餘佳況少(경물유여가황소) 사물에 펼쳐진 경치는 괜찮은데 좋은 일은 적으니

詩情寥落晉康州(시정요락진강주) 진양이라 강주는 시인의 마음도 쓸쓸하구나.

 

한사 강대수(寒沙 姜大遂 1591 ~ 165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강대진(姜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강인수(姜仁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세탁(姜世倬)이고, 아버지는 사간 강익문(姜翼文),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이후신(李後臣)의 딸이다. 여러 대에 걸쳐 합천에서 살았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10년(광해군 2) 생원·진사시를 거쳐 1612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사서(司書)를 역임한 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14년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정온(鄭蘊)이 간언 하다가 유배된 일이 발생하였다.

정온을 구하는 소를 올렸다가 평소에 반목하던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삭직 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영변부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 호조좌랑·예조정랑에 올랐다. 다음 해 사헌부 정언·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를 따라서 영남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3월에 청나라와 화친하자 돌아와 사간·주부를 지냈다. 1628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31년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 되고, 이어 수찬·부교리 겸 경연시독관·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1637년 부응교를 지내고 1639년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1641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진주에서 살다가 1644년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고, 이어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 전주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관도에 오르지 않았다.

생시에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었으며, 또 유학자들을 위해 이연서원(伊淵書院)과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 되었다.

 

농포 정문부(農圃 鄭文孚)

龍歲兵焚捲八區(용세병분권팔구) 임진년 전화(戰火)가 팔도를 휩쓸 적에

魚殃最慘此城樓(어영최참차성루) 무고한 재앙 이 성루에 가장 처참하였어라.

石非可轉仍成矗(석비가전잉성촉) 굴릴 수도 없는 돌 이내 촉석 이루었고

江亦何心自在流(강역하심자재류) 강은 또한 무슨 맘에 절로 절로 흐르는가.

起廢神將人共力(기폐신장인공력) 폐허를 일으킴에 신과 사람 힘 모으고

凌虛天與地同浮(준허천여지동부) 허공을 능지르니 천지가 함께 떴네.

須知幕府經營手(수지막부경영수) 모름지기 알리라 막부의 경영 솜씨

壯麗非徒鎭一州(장려비도진일주) 한 고을만 장려하게 진압할 뿐 아님을.

 

농포 정문부(農圃 鄭文孚 1565 ~ 162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65년(명종 20) 한성판윤을 지낸 정신의 아들로 한성(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 자허(子虛), 호 농포(農圃), 시호 충의(忠毅)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고, 한성부참군이라는 무관으로 첫 관직을 맡았다. 이후 홍문관 수찬, 시간원 정언을 거쳤고 1591년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무관직인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회복하여 다시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맡았다. 함경도 회령(會寧)에서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하자 의병대장이 되어 반란군이 점령한 경성(鏡城)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회령을 차지하고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과 정말수(鄭末秀)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또한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대치하여 혈전을 벌였으며 왜적 600여 명의 목을 베고 수많은 군장물을 획득하였다. 이를 길주 장덕산대첩(長德山大捷)이라 한다. 정문부는 길주 왜성을 포위하고 대치하였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 온 왜적 2만을 상대로 매복전을 펼쳤다. 왜군은 패전하여 관북지방에서 완전히 철군하여 남하했다. 이때의 승전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 기록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2005년에 다시 반환되어, 2006년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 위해 2006년 3월 1일 북한으로 전달되었다.)

1593년 영흥(永興)부사, 1597년 길주(吉州)목사가 되고, 1599년 호조참의, 160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임진왜란 공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1612년 형조참판, 1618년 창원부사를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대북파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창원부사로 재직할 때 초회왕(楚懷王)에 대하여 지은 시(詩)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1624년(인조 2) 고문받다가 사망했다. 그후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따라 신원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농포집(農圃集)》이 있다.

 

면재 정을보(勉齋 鄭乙輔)

黃鶴名樓彼一時(황학명루피일시) 황학이라 이름난 누(각) 저 한 때의 일인데

崔公好事爲留詩(최공호사위유시) *최공의 호사로 시에 남게 되었지.

登臨景物無增損(등임경물무증손) 올라 보니 경치는 변함이 없건마는

題詠風流有盛衰(제영풍류유성쇠) 시제를 떠올리며 풍류를 읊으니 성쇠가 보이누나.

牛壟魚磯秋草沒(우롱어기추초몰) 고기 낚고 소 매던 곳 가을 풀은 시들고

鶖梁鷺渚夕陽遲(추량노저석양지) 백로 물수리 놀던 물가 석양은 더디 지네.

靑山四面皆新畵(청산사면개신화) 사방의 푸른 산은 모두가 새로운 그림이요

紅粉三行唱古詞(홍분삼행창고사) 곱게 단장한 세 줄로 선 기생들 옛 노래를 부르네.

玉斝高飛山月上(옥가고비산월상) 옥 술잔 높이 드니 산에 달은 올라오고

珠簾半捲嶺雲垂(주렴반권령운수) 주렴을 반 걷으니 재넘어 구름 드리웠네.

倚欄回首乾坤小(의란회수건곤소) 난간에 기대어 둘러보니 천지도 작게 보이고

方信吾鄕特地奇(방신오향특지기) 우리 고을 특출 난 줄 이제 믿게 되누나.

*최공(崔公) : 최호(崔顥)를 말하며 고려전기 학자로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 : 副司) 등을 역임하였으며, 『예기정의(禮記正儀)』,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저술한 학자.

 

면재 정을보(勉齋 鄭乙輔 ? ~ ? )는 고려후기 정당문학, 찬성사, 광양감무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호는 면재(勉齋)이며, 평장사 정연(鄭椽)의 아들이다.

1320년(충숙왕 7) 국자시(國子試)에서 고부(古賦)에 합격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4)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전민추쇄도감제조(田民推刷都監提調)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세력을 배경으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조일신은 공민왕을 수종한 공을 믿고 부당한 행위를 저질러 위기를 느끼자, 친원세력인 기씨(奇氏) 일파 등을 제거하고자 모의하였다. 이 반란은 6일 만에 평정되고 왕명에 의해 조일신이 주살되자 정을보는 조일신의 도당(徒黨)이었기 때문에 그 일파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광양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조은 한몽삼(釣隱 韓夢參)

天地初開別一區(천지초개별일구) 천지간에 처음으로 특별한 곳 열었으니

何年好事起斯樓(하년호사기사루) 어느 해 호사가가 이 누각을 세웠는가.

層軒遠接靑山影(층헌원접청산영) 높은 처마에 산 그림자 멀리서 드리우고

彩檻低搖碧水流(채함저요벽수류) 채색한 난간은 푸른 물에 나지막이 흔들린다.

斗覺登臨如羽化(두각등임여익화) 올라 보면 갑자기 날개라도 돋는 듯

却疑身世等萍浮(각의신제등평부) 한평생이 불현듯 부평처럼 느껴지네.

求封萬戶還非分(구봉만호환비분) 만호후(萬戶侯) 높은 벼슬 내 분수가 아니니

願夢三刀臥此州(원몽삼도화차주) 원컨데 영전하여 이 고을에 누워 잠들리라.

 

조은 한몽삼(釣隱 韓夢參 1589 ~ 1662)은 조선 중기 학자로 본관 청주(淸州). 자 자변(子變). 호 조은(釣隱). 참봉 계(誡)의 아들.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생. 1613년(광해군 5)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인조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지내고 벼슬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그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군사를 모았으나, 이듬해 1월 화의가 성립되자 해산하고 함안에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 학문이 깊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진주(晉州)의 임천사(臨川祠)에 제향 되었으며, 문집에 《조은집(釣隱集)》이 있다.

 

우당 박융(憂堂 朴融)

晉山形勝冠南區(진산형승관남구) 진산의 뛰어난 명승지 남쪽에서 으뜸인데

況復臨江有此樓(황복임강유차루) 하물며 강가에 이 누각이 있음에랴.

列峀層巖成活畵(열수층암성활화) 펼쳐진 산 층암절벽 살아있는 그림이요

茂林脩竹傍淸流(무림수죽방청류) 무성한 숲 긴 대나무 맑은 물 곁에 있네.

靑嵐髣髴屛間起(청람방불병간기) 푸르른 산 기운은 병풍 사이 이는 듯

白鳥依稀鏡裡浮(백조의희경리부) 흰 새는 어렴풋이 거울 속에 떠 있는 듯.

已識地靈生俊傑(이식지영생준걸) 땅이 영험스러워 영웅호걸 난 줄 알겠노니

盛朝相繼薛居州(성조상계설거주) 성조에 착한 신하 끊이잖고 나오네.

 

우당 박융(憂堂 朴融 ? ~ 1424) 조선전기 문인으로 본관 밀양(密陽). 자 유명(惟明). 호 우당(憂堂).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11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직무 태만으로 면직되었다가 뒤에 전한(典翰)에 기용되었다. 1423년(세종 5) 이조정랑으로 강원도경차관(敬差官)을 지낸 후 군수에 이르렀다. 문집 《우당집(憂堂集)》이 있다.

 

만송 강렴(晩松 姜濂)

南烽日警陷諸州(남봉일경함제주) 여러 고을 함락된다 봉화 날로 오르더니

劍語秋燈對白頭(검어추등대백두) 칼 이야기 등불 아래 흰머리를 마주하네.

安待良籌除海祲(안대양수제해침) 바다 요기(妖氣) 없앨 계책 어찌 기다릴 거나

君歌我酒更登樓(군가아주갱등루) 그대 노래 나의 술로 다시 누각에 오르리.

 

만송 강렴(晩松 姜濂 1544~1606)는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호는 만송(晩松)이고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인보(仁輔)이고, 17~18세(1560년~1561년)에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읽고, 산천재에서 남명(南冥)선생을 뵙고 경의(敬義)와 명성(明誠)의 가르침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쳐들어오자, 강렴은 말하기를 “지금이야말로 사생취의(捨生取義)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할 때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등과 함께 사재(私財)를 털어 군비를 조달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형세가 좋지 못하여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각재 하항(覺齋 河沆) 사호 오장(思湖 吳長) 등과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저술은 『효경연의(孝經衍義)』, 『사례요해(四禮要解)』, 『아동연원록(我東淵源錄)』 등을 남겼으나 소실되었으며, 『만송실기(晩松實紀)』 1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