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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대둔산 가을산행

출근길 가로수가 연초록으로 옷을 입어가던 실록의 계절이 어제 같은데 벌써 붉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마지막 겨울채비를 하고 있다. 참으로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다. 곧 낙엽이 되어 내년을 기약하며 뿌리로 돌아가 양분이 되기 위한 엽락귀근(葉落歸根)의 순환을 맞이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바라보는 고운 색 단풍은 식물들은 엽록소라는 물질에 의해서 잎 색깔을 결정하는데 가을이 깊어지면 일조량이 작아서 광합성 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식물의 엽록소의 합성이 멈추게 된다. 노란색 단풍은 엽록소가 쇠퇴하여 분해되어 엽록소의 색깔이 사라지고 남아있는 카로틴과 크산토필만이 남아 노랗게 변하고 빨간 잎 단풍은 안토시안이라는 물질이 생겨나서 이 안토시안의 색깔인 붉은색 때문에 그렇게 보이게 되는 것이라는데 이는 가을이 되면 수분과 일조량이 부족하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자 겨울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으로 나무를 통하여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은 감나무 잎인데 곱게 불든 잎을 바라보면 적,청,황,녹색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잎을 따다가 책갈피에 오래 보관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납니다.

앞서 소개한 "대둔산 등정(大芚山 登頂)"은 지난 5월 초에 올랐던 신록에 물든 대둔산에 올라 풍경을 바라보며 가을이 되면 반드시 다시 한번 찾아오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11월 초 이른 아침에 등정을 하였는데 “아뿔싸” 절정기에 한발 늦어 아쉬움이 남지만 편한 케이블카를 마다하고 가파르고 힘든 길을 올라 수려하기 그지없는 대둔산을 오르며 눈에 펼쳐진 풍광을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내년에 기회가 되면 대둔산의 가을 단풍의 절정인 10월 20일 전후에 다시 한번 찾아오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해본다. 말미에 가을이 내려 앉은 그림같은 산을 비단으로 감싸고자 했던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의 추산(秋山) 시를 자서와 함께 올려보았다.

 

대둔산의 가을풍경

대둔산숲속휴게소에서 바라본 대둔산 전경
추천 등산코스로 대둔산의 전경을 만날 수 있다. (약 6.5Km 구간으로 4~5시간 소요)
등산 초입에서 바라본 정상
가파르고 험한 돌계단 등산로
초입에서 40여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동심바위
동심바위 계곡에서 바라본 수직암벽의 위용
금강구름다리
금강구름다리
케이블카 운행전 이른 아침이라 등산객이 없다.
금강구름다리에서 바라보는 풍광
구름다리에서 삼선계단까지 10여분 걸린다
좌측 멀리 보이는 산이 천둥산(707m)이다
가파른 삼선계단(경사가 51도)
기암괴석으로 조화를 이룬 명산 대둔산
삼선계단에서 바라본 경관
대둔산 정상(878.9m) 마천대 개척탑
정상에서 바라본 운해( 雲海)
낙조대 방향 칠성봉(855m)
정상에서 허둥봉 방향으로 펼쳐진 풍광
비래석( 飛來石 )처럼 안정적인 위치에 자리잡은 바위위에 소나무 한그루가 눈길을 멈추게 한다
운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산이 서대산(904m)이다
대둔산의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봉
좌측 낙조대 아래 낙조산장이 자리잡고 있다
용문골로 향하는 계곡
용문굴은 당나라 정관(貞觀 : 중국 당 (唐) 태종(太宗)의 연호) 12년 선도대사(善導大師)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용이 이 바위문을 열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용문굴 전망대에서 바라본 칠성봉(용문골에서 용이 승천하기 직전 일곱개의 별이 이곳에 떨어졌다하여 붙혀진 이름)
칠성봉( 七星峰)은 대둔산을 대표하는 절경으로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나오게 하는 명소이다
수려함의 극치라고 칭송 받을 만한 칠성봉의 자태
하산길 붉게 물든 단풍
주차장에서 바라본 대둔산 전경

 

추산(秋山 : 가을 산)   - 沖止(충지)

秋深林壑盡爛斑(추심임학진란반) 가을 깊은 숲 골짜기는 온통 울긋불긋

散步徑行畵障間(산보경행화장간) 그림 같은 산 지름길을 유유히 걷는다

恰似錢王歸故里(흡사전왕귀고리) 흡사 돈 많은 부자가 고향으로 돌아가

都將錦繡裹溪山(도장금수과계산) 장차 비단으로 계곡과 산을 에워쌀 듯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1292)는 고려시대 선승(禪僧)이자 수성사(修禪社) 제6세(世)손이다. 성은 위(魏)씨. 속명은 원개(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 자호는 복암(宓庵). 전라남도 장흥출신.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호소(號紹)이며,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巡歷)하였는데, 이는 항상 도를 얻고자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華嚴經) 속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1266년(원종 7) 여름에 원오국사의 교유(敎諭)와 조지(朝旨)로 인하여 부득이 경상남도 김해군의 감로사(甘露寺)의 주지가 되었다. 1269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로사를 떠나 승주군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보조국사(普照國師)로부터 시작된 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선(禪)보다는 교(敎)에 치중하였다.

 

1283년 11월에는 대중을 거느리고 조계산을 출발하여 원오국사가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거란본대 장경을 도중에 맞이하여 나누어 지고 왔고, <단본대장경경찬소(丹本大藏經慶 讚疏)>와 시를 지었다. 1284년 수선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옮겨 선정을 닦고 있던 중 1286년 2월에 원오국사(圓悟國師)가 그를 수선사의 사주 (社主)로 추천하는 장문(狀聞)을 왕에게 올리고 입적하였다. 장문을 받은 충렬왕(忠烈王)은 원외시랑(員外侍郞) 김호담(金浩淡)을 시켜 그로 하여금 6월 16일에 개당(開堂)하게 함에 따라 수선사의 제6세가 되었다.

 

불교의 삼장(三藏)에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사림(詞林)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과 시는 당대의 유림에서도 추앙을 받았다. 도를 닦음에 있어서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오조(五祖) 홍인(弘忍)에게서 법을 인가 받은 파강이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였지만, 수선사 제1세였던 지눌(知訥)의 순수 선시대와는 달리 유학사상과 상교(相交)하는 선풍(禪風)을 풍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유사(儒士)들처럼 천명을 믿고 운명에 안주하는 유선조화(儒禪調和)의 사상조류를 보였고, 상제상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하여 유도이교(儒道二敎)를 불교속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止)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다.

 

1292년 1월 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 (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說本無說)'이라 설하고, 문인들이 청하는 바에 따라 "돌아보니 세상살이 67년인데, 오늘 아침 모든 일을 마쳤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탄연하여 평탄하고, 노두(路頭)가 분명하니 어찌 길을 잃으랴. 손에는 겨우 하나의 대지팡이뿐이지만,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 한 기뻐라.(閱過行年六十七 及到今朝萬事畢 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未曾失 手中裳有一枝 且喜途中脚不倦)."라는 게송(偈頌)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법랍 39세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