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아침마다 오르는 영종도 백운산(255m) 정상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장관이다. 경이로운 대자연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힘차고 알차게 보내기 위한 자신과의 다짐과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의 태양을 떠오르는 희망찬 모습을 기대하며 오르고 내리는 산행 길 옆으로 진달래가 무수히 피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진달래꽃 색깔은 분홍색, 진분홍색, 흰색 자주분홍색 등 색깔이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연하고 짙은 보라색 속에 밝고 화사한 느낌을 주는 색과 조금은 쓸쓸하고 우울한 느낌을 주는 색 등 느낌 또한 다양하다.
우리나라 금수강산(錦繡江山)에 어디서나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반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 민족 정서와 가장 어울리는 꽃으로 먼 조상들로부터 애환(哀歡)을 함께한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달래꽃을 두견화(杜鵑花)라고 한다. 꽃을 먹을 수 있고 약에도 쓸 수 있어서 참꽃이라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술과 시로 널리 알려진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진달래로 술을 담가 마셨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또한 두견주(杜鵑酒)를 만드는 법은 1800년대에 간행된 조리서(調理書)인 규합총서(閨閤叢書), 시의전서(是議全書) 등에 기록되어 있다. 만드는 방법은 찹쌀과 가루누룩으로 청주를 빚어 술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에 진달래꽃의 꽃술을 제거하고 넣어 만든다고 하며, 진달래꽃잎을 그늘에 말려서 찹쌀떡에 버무려 우물물로 100일간 걸려 빚어내는 술을 두견주라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방에서는 영산홍(迎山紅)이라하여 진달래꽃을 약재로 사용하여 요통 진통 해열 해수. 기관지염 두통감기 류머티즘 치료에 쓴다고 한다.
함께 살펴볼 진달래(두견화) 관련 한시는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두견(杜鵑),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의 초견두견화(初見杜鵑花) 2 수를 자서(自書)와 함께 산행 길에 찍은 영상을 올려보았다.
두견(杜鵑 : 진달래) - 최치원(崔致遠)
石罅根危葉易乾(석하근위섭역건) 나무 틈새 뿌리는 위태로워 잎이 쉽게 말라서
風霜偏覺見摧殘(풍상편각견최잔) 바람과 서리에 꺾이고 잘린 것으로 잘못 보았네.
已饒野菊誇秋艶(이요야국과추염) 이미 들국화 가득 피어 가을의 풍요 자랑하나
應羨巖松保歲寒(응선암송보세한) 바위 소나무 겨울 추위 견딤을 응당 부러워 하리.
可惜含芳臨碧海(가석함방림벽해) 부른 바닷가에 향기 품은 두견화 애석하니
誰能移植到朱欄(수능이식도주난) 누가 능히 붉은 난간으로 옮겨 심을 수 있으랴.
與凡草木還殊品(여범초목환수품) 무릇 초목과 더불어 특별한 품격을 지녔으니
只恐樵夫一例看(지공초부일례간) 단지 나무꾼이 그냥 스쳐보며 지날까 두렵다네.
초견두견화(初見杜鵑花 : 처음 핀 진달래를 보고) - 소세양(蘇世讓)
際曉紅蒸海上霞(제효홍증해상하) 새벽녘 바다 위로 노을이 붉게 타오르듯
石崖沙岸任欹斜(석안사안임의사) 바위 절벽 모래 언덕에 비스듬히 기울었네.
杜鵑也報春消息(두견야보춘소식) 진달래꽃 또한 봄소식을 알리고 싶어
先放東風一樹花(선방동풍일수화) 봄바람에 먼저 한 그루 꽃을 피웠네.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 1486 ~ 1562)은 조선 전기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중군사정(中軍司正) 소희(蘇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소효식(蘇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소자파(蘇自坡)이다.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왕석주(王碩珠)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防備)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謄寫),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文名)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로는 양곡집(陽谷集) 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楊州)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 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주변에 핀 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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