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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죽천 김진규 시 3수 야경, 주면, 견화유사(竹泉 金鎭圭 詩 3首 夜景, 晝眠, 見花有思)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 1658∼1716).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보(達甫),호는 죽천(竹泉). 김반(金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익겸(金益謙)이고,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이며, 어머니는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다. 누이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2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686년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던 중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지평으로 기용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어지자, 1695년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에 의해 척신(戚臣)으로 월권 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에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명목으로 윤증(尹拯)을 공박하였다.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副提學)·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13년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임명되었다. 그 밖에 홍문관의 여러 관직과 사인(舍人)·빈객(賓客)·이조참판·병조참판·공조판서·좌참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병조참판으로 재직 중일 때 소론에 의해 유배당했다가 2년 후 풀려나왔다.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頒敎文)·교서·서계(書啓 : 국왕의 명을 받은 관리가 임무를 완수하고 보고하는 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다. 또한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 능해 신사임당(申師任堂)의 그림이나 송시열의 글씨에 대한 해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대헌심의겸비(大憲沈義謙碑)·증지평이령비(贈持平李翎碑)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표적인 노론 정객으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처지를 충실히 지켰다.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영조가 1766년 치제(致祭 : 국가에서 왕족(王族)이나 대신(大臣), 국가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제문(祭文)과 제물(祭物)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祭祀))했으며, 1773년 문집 간행에 재물을 하사하고 서문을 몸소 지었다. 문집으로 죽천집(竹泉集), 편서로 여문집성(儷文集成)이 전한다.

 

죽천 김진규 선생은 나의 자랑스런 선조이시다. 그가 거제 유배지에서 남긴 시 3수는 황혼무렵 달관의 경지에서 뿜어 나오는 품격을 갖추고 있어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야경(夜景 : 밤의 정취) - 김진규(金鎭圭)

輕雲華月吐(경운화월토) 엷은 구름에서 화사한 달 들어내고,

芳樹澹煙沈(방수담연침) 꽃다운 나무는 맑은 안개에 잠기네,

夜久孤村靜(야구고촌정) 밤 깊은 외딴 마을은 고요한데,

淸泉響竹林(청천향죽림) 맑은 샘물소리 대숲에 울려 퍼지네.

 

주면(晝眠 : 낮잠)

卯酒餘醺午睡濃(묘주여훈오수농) 아침술에 취기가 남아 낮잠을 달게 자는데

離離簷影落窓櫳(이이첨영낙창롱) 드리운 처마 그림자, 격자무늬 창에 떨어진다.

一聲山鳥驚幽夢(일성산조경유몽) 한 가락 산새 소리가 그윽한 꿈을 깨워,

起看西峯夕照紅(기간서봉석조홍) 일어나 바라본 서산 봉우리, 저녁노을 붉었으랴

 

견화유사(見花有思 : 꽃을 보니 생각떠올라)

梅花半落杏花開(매화반락행화개) 매화꽃 반쯤 지니 살구꽃 피고

海外春光客裏催(해외춘광객이최) 바다 멀리 봄빛은 나그네 마음 재촉하네.

遙憶故園墻北角(요억고원장북각) 멀리 고향의 우리 집 담 북쪽 모퉁이

數株芳樹手曾栽(수주방수수증재) 내가 심은 몇 그루 나무도 꽃 피어났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