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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제사란 무엇인가?

 

입춘과 함께 민속 최대 명절인 설 쇤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연일 차가운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차례를 지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은근히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 또한 5대 장손으로서 제사를 모신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명절 차례는 서울에서 모신 후 울산에 계신 부모님께 새해 인사차 내려가 며칠 지내다 온다. 일반적으로 제사(祭祀)의 종류는 기제(忌祭), 차례(茶禮), 묘제(墓祭)의 세 가지로 나눈다. 기제는 해마다 돌아가신 날 지내는 제사이고, 차례는 음력 설날과 추석에 지내는 제사이다. 묘제는 한식과 추석 때 또는 음력 10월 이후 산소에 찾아가 음식을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과거에. 비해서 다소 간소화되었다 하더라도 명절 전날 하루 종일 제수(祭需)준비에 고생하는 아내를 바라보면 미안함 감이 크다. 기껏 해야 도라지, 나물 다듬기 정도 도와줄 뿐이지만 장손으로 피할 수 없는 제사(忌祭 와 墓祭)에 대하여 한번 논의코자 한다.

 

기제(忌祭)

기제 또는 기제사는 조상의 죽음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유교의례(儒敎儀禮)로서, 조상이 돌아가신 날 가장 이른 시각에 지내는 제사로 중국 고대에는 기제사(忌祭祀)를 지내는 풍속이 없었고, 망자의 기일이 되면 살아있는 그 자손이 상(喪)을 당한 것처럼 예를 행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비로소 기제사의 예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종신지우(終身之憂 : 내 몸 다할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할 숙명 같은 근심)라는 말처럼, 기일이 되면 상을 당했을 때의 마음으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다는 정신으로 만든 의례이다. 유교에서 제사는 ‘기복행사(祈福行事)’로서 조상으로부터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지만, 기일에 지내는 제사는 상례(喪禮)와 같아 흉례(凶禮)에 속한다. 따라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수록된 기제사에는 상례의 연장선에서 초헌(初獻)을 한 다음 “주인 이하는 곡(哭)을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주자가례에 의거하였으나 “대부(大夫) 이상은 3대를 제사 지내고, 6품관 이상은 2대를, 7품관 이하 평민들은 부모 제사를 지내도록”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둔 규정을 법령으로 제정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사대 봉사(四代奉祀)를 하게 되자, 고조부모까지도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여 기제사가 정착되었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을 ‘기일(忌日)’ 또는 ‘휘일(諱日)’이라고도 한다. 기제사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의 전날인 입제일(入祭日)에 제물을 준비하여 돌아가신 날인 파제일(罷祭日)의 가장 이른 시각에 지낸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짜에 기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조상이 돌아가신 슬픈 일이 생겨 추모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파제 일의 가장 이른 시각인 자시(子時)는 전통적으로 새로운 날짜가 시작되는 시간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각에 제사를 지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조상이 돌아가신 날짜의 가장 이른 시간에 조상 제사를 지냄으로써, 다른 모든 일보다 더 우선해서 조상을 받들어 모신다는 것이다. 둘째, 조상신이 활동하는 데 가장 좋은 시간대가 심야의 조용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인구의 도시 집중이 심화되면서 자손들이 파제 일자 시에 기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렵게 되자 파제 일의 저녁 시간에 제사를 지내는 사례가 많아졌다.

 

일부 제사날자를 돌아가시기 전날을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시(子時 : 24시의 첫째 시. 곧 오후 11시 반부터 오전 0시 반까지의 시간)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돌아가시기 전날 11시 반을 제사일로 정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으로 자정(子正 : 0시 30분)에 지내야 한다는 의미는 돌아가신 날에 지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불교에서도 고인에 대한 재(齋)는 돌아가신 당일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나 성당도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당일에 추도식을 올린다.

다시 말하자면 제삿날은 돌아가신 당일 편리한 시간에 지내면 되는 것이다. 

 

기제사의 방식으로는, 신주(神主) 또는 지방(紙榜)을 제상 앞에 모시는 방식에 따라 기일을 맞이한 조상만 모시는 ‘단설(單設)’ 기일을 맞은 조상을 기준으로 당사자와 그 배우자, 즉 고위(考位 : 돌아가신 아버지와 각 대의 할아버지의 위패(位牌))와 비위(妣位 :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그 윗대 할머니들의 위패))를 함께 모시는 ‘합설(合設)이 있다. 그리고 합설을 하더라도 고위와 비위의 상을 각각 차리는 ‘각설(各設)’도 있다. 기제사의 본디 뜻을 생각해 볼 때, 조상이 죽었기 때문에 지내는 제사이므로 고위와 비위가 같은 날짜에 죽지 않았다면 단설이 맞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의 기제도(忌祭圖)를 보면, 단설과 합설이 공존하고 있다. 퇴계 이황(李滉)은 이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禮)로 보면 단설이 맞지만, 정(情)으로 합설도 무방하다.”라고 하였다. 합설을 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평소에 남편이 밥을 먹을 때면 부인도 함께 먹는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한편, 대략대략 1990년대부터는 고위(考位 : 돌아가신 아버지와  대의 할아버지의 위패(牌))와 비위(妣位 :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윗대 할머니들의 ())의 기일에 모두 제사를 지내지 않고 동시에 한 번만 지내는 ‘합사(合祀)’의 방식이 나타난다. 합사 하는 경우, 보통 고위의 제사 때 비위도 함께 모셔와 제사 지내고, 비위의 기일에는 따로 제사 지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4대에 걸친 여러 조상을 특정한 날을 정해서 한꺼번에 합사 하는 방식도 있다. 기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대청이나 안방이다. 반가(班家 : 양반의 집안)의 전통이 남아있는 종가와 고택 등에서는 대청에서 기제사를 지내고, 여염집(閭閻집 : 일반 백성의 살림에서는 안방 집)에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러 가옥의 규모가 크고 유서 깊은 종가에서는 제사 전용의 제청(祭廳)이 별도로 있지만, 그 경우에도 일반 기제사는 안대청에서 지내고,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 : 큰 공훈이 있는 이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락하여 지내는 제사)만 제청에서 지낸다. 자시(子時)가. 다가오면 제물을 진설할 준비를 하고 축문을 미리 써두는데, 요즈음의 기제사에서는 축문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당이 없어 신주를 모시지 않는 집에서는 지방을 미리 써둔다. 기제사에 참여하는 제관과 참사자들은 직계 자손과 당내(堂內)의 친인척으로 구성된다. 제관과 참사자들이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모두 마친 후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기제사 절차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제수진설법(祭需陳設法)은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라 차려진다.

①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일은 동쪽(오른쪽)에 흰색 과일은 서쪽(왼쪽)에 놓는다.

② 조율시이(棗栗枾梨) : 왼쪽부터 대추, 밤, 감, 배의 순서로 놓는다.

③ 생동숙서(生東熟西) : 김치는 동쪽에 나물은 서쪽에 놓는다.

④ 좌포우혜(左脯右醯) : 포 종류는 왼쪽에 놓고 식혜와 젖깔류는 오른쪽에 놓는다.

⑤ 어동육서(魚東肉西) : 생선은 동쪽에 육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⑥ 두동미서(頭東尾西) :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⑦ 건좌습우(乾左濕右) : 마른 것은 왼쪽에 젖은 것은 오른쪽에 놓는다.

⑧ 접동잔서(楪東盞西) :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⑨ 우반좌갱(右飯左羹) : 밥은 오른쪽에 놓고 국은 왼쪽에 놓는다.

⑩ 남좌여우(男左女右) : 제사상의 왼쪽에 남자가 오른쪽에 여자가 앉는다.

⑪ 좌면우병(左麵右餠) : 좌는 국수, 우는 떡을 놓는다.

⑫ 적전중앙(炙奠中央) : 적은 중앙에 놓는다.

 

조율이시(棗栗梨枾) : 배와 감의 순서를 바꿔 놓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대추는 씨가 하나이므로 왕을 상징하고, 밤은 세 톨로 구성되므로 삼정승(三政丞), 배는 5쪽이나 씨앗은 5~10개로 구성되어 육조판서(六曹判書), 감은 씨앗이 8개이므로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를 뜻하는 의미로 과일로서 최고의 예를 갖추는 한편 후손들이 고관대작을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기도 하다. 여기서 동쪽이란 제사상을 앞에서 봤을 때 오른쪽을 말하고, 복숭아, 꽁치, 삼치, 갈치, 고추, 마늘 등은 상에 올리지 않으며 식혜, 탕, 면 종류는 건더기만 사용한다.

 

기제사 지내는 순서를 살펴보면

① 설위(設位) : 신위(신주 또는 지방)를 모시는 자리를 마련한다.

② 진기(陳器) : 제사에 사용되는 기물을 늘어놓는 절차로, 이때 축문이나 지방을 작성한다.

③ 진설(陳設) : 설소과(設蔬果)라고도 하는데, 포·잔·수저·실과·채소처럼 식어도 되는 제수(祭需)를 미리 진설한다.

④ 출주(出主) : 신주를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곳으로 모셔오는 것인데, 지방을 붙이고 지내는 제사의 경우에는 이때 지방을 부착한다.

⑤ 참신(參神) : 참사자 전원이 신위에 재배한다.

⑥ 강신(降神) : 주인主人이 분향하고 술을 모사기(茅沙器)에 세 번 따른 다음 빈 잔을 원래의 자리에 올린다. 간혹 분향 이후에 재배하는 사례도 있다. 신주를 모셨으면 참신을 먼저 하고, 지방을 써 붙였으면 강신을 먼저 한다.

⑦ 진찬(進饌) : 진설에서 차리지 않은 나머지 제수를 진설한다.

⑧ 초헌(初獻) : 주인이 신위에 첫 번째 잔을 올린다. 이때 적(炙)을 올리고 밥의 뚜껑을 연 다음, 축관이 주인의 서쪽에 앉아서 축문을 읽는다. 이어서 주인이 재배한다.

⑨ 아헌(亞獻) : 신위에 두 번째 잔을 올린다. 『주자가례』에는 주부가 아헌을 하도록 되어 있으나, 집안의 연장자나 주인의 동생이 하기도 한다.

⑩ 종헌(終獻) : 신위에 세 번째 잔을 올린다. 보통 귀한 손님이나 사위, 연장자 등이 한다.

⑪ 유식(侑食) : 주인이 종헌에서 다 채우지 않은 잔에 술을 가득 채우는 첨작(添酌)을 한 다음, 메에 숟가락을 꽂고 적이나 편에 젓가락을 올리는 삽시정저(插匙正箸)를 한다. 가정에 따라 계반삽시(啓飯插匙 : 밥뚜껑을 열고 밥에 숟가락을 꽂는 것)를 하기도 하고 주인은 재배, 주부는 4배를 하기도 한다.

⑫ 합문(闔門) : 조상이 음식을 드시도록 기다리는 절차이다. 제상 앞에 병풍을 친 후 참사자들은 부복하여 조상이 수저를 아홉 번 뜨는 시간만큼 기다린다.

⑬ 계문(啓門) : 합문의 문을 연 다음 갱을 물로 바꾸고, 메 세 숟가락을 푸는 헌다(獻茶)를 진행한다. 물에 메를 푸는 것은 숭늉을 의미한다. 이후 조상신이 후식을 먹을 수 있도록 참사자는 선 자세로 묵념하는 국궁(鞠躬 : 윗사람이나 위패(位牌) 앞에서 존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힘)을 한다. 국궁이 끝나면 집사자가 수저를 거두고, 메 등의 뚜껑을 닫는 철시복반(撤匙覆飯 : 수저를 걷고 메의 뚜껑을 덮는다)을 행한다.

⑭ 사신(辭神) : 참사자 전원이 재배하는 것으로, 신을 돌려보내드린다.

⑮ 납주(納主) : 신위를 사당으로 다시 모셔드린다. 지방으로 제사를 지낸 경우에는 지방을 태운다.

 

다음은,  분축(焚祝) : 축문을 태우고, 철(撤) : 제수를 모두 거두어들이며, 준(餕) : 제관과 참사자들이 음복주와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을 한다. 원래 기제사에는 음복 절차가 없으나 관행적으로 행한다.

 

묘제(墓祭)

한식(寒食) 또는 10월에 5대조 이상의 묘소(墓所)에서 정기적으로 묘제(墓祭)를 지낸다고 하여 시사(時祀), 시향(時享), 시제(時祭)이라고도 한다. 이는 5대 이상의 조상을 모시는 묘제(墓祭)를 가리키며, 4대친(四代親)에 대한 묘제를 사산제(私山祭)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래서 묘사(墓祀), 묘전제사(墓前祭祀)라고 하며, 일년에 한 번 제사를 모신다고 하여 세일제(歲一祭), 세일사(歲一祀)라고도 한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원래가 예가 아니라 하였으나, 3월 상순에 날짜를 정하여 묘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묘제를 중시하여 설, 한식, 단오, 추석 등의 명절에 묘제를 지냈고, 한식 또는 3월, 10월에 묘제를 지냈다. 오늘날에는 서울 인근의 경기 지역이나 경북 안동 퇴계 종가에서는 재실에서 묘제를 지내거나, 지방(紙榜)으로 합동 묘제를 지내기도 한다. 우리 집안의 경우는 기제사(통상 2대조) 외 3대조 이상은 추석 전 벌초와 묘제를 같은 날자에 지내고 있다. 몇 년이 지나면 묘제도 점점 사라질 것이며, 묘제를 지낸다 해도 소박한 제수차림과 조상제위(祖上諸位)에 대한 합동재배(合同再拜)의 단헌무축(單獻無祝 : 술은 한잔만 올리고 축문은 읽지 않는다) 절차를 밟을 것이다.

 

명절 차례(名節茶禮)

설날 또는 추석날 아침에 4대 조상까지 한정하여 세찬(歲饌,), 세주(歲酒), 떡국, 송편 등을 진설하고 지내는 제사로서 명절 차례는‘속절(俗節) 제사’라고 불리던 것으로 예서에도 전례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설은 이미 고대국가 때부터 있었다.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에 “신라인들은 정월 초하루에 사람들끼리 치하하고 일월 신에게 절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곧 하늘에 제사 지냈음을 말한다. 이를 통해 나아가서는 조상에게도 예를 갖추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차를 올렸다는 기록은 없다.

주자가례(朱子家禮) 사당조(祠堂條)에서는 보름의 참례에 차를 올린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차례가 유래했을 것 같다. 차례는 원래 ‘차를 올리는 예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차 대신 술을 올린다.

명절 차례는 원래 차를 올리는 예에서 유래하였으므로, 기제사보다 더 간소하게 지낸다. 축문을 읽지 않고 술도 한 잔만 올린다. 그리고 명절에 올리는 제사에는 해당 명절에 먹는 특별한 계절 음식을 올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가정에 따라서 밥과 국 대신 떡국이나 송편을 올린다.

명절 아침에 각 가정에서 조상의 신주나 지방 또는 사진을 모시고 지낸다. 그 대상은 기제사를 지내는 조상과 같다. 기제사와 마찬가지로 장손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명절 차례를 치르고, 묘소에 성묘를 가기도 한다.

메와 갱 대신 떡국을 올리고 그밖에 삼색 실과, 산자, 탕, 포 등을 차린다. 그 순서는 먼저 참신한 후 강신하며 이어 헌작하는데, 차례 때에는 단헌무축(單獻無祝)이다. 그런 다음 삽시(插匙)한다. 유식의 절차는 별도로 없으며 이어 철시한 다음 사신 재배하고 철상한다. 차례를 지낸 후 조상의 묘소에 성묘를 가는데, 이때 별다른 제물은 가져가지 않으며 묘소에 절만 올리고 온다. 가정에 따라서는 주・과・포를 간단히 가지고 가서 상석에 올려놓고 성묘한다.

명절 차례는 기제사나 시제와 달리 약식 제사라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술잔을 한 번 올리고 축문도 없다(단헌무축). 새해 첫날에 지내는 설 제사는 새로운 1년을 돌아가신 조상과 함께 맞는다는 의미도 있다. 또한 추석 제사는 서양의 추수감사절과 같이 풍성환 결실을 조상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감사의 인사라는 의미가 있다.

명절 차례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주변에서도 추석차례를 지내지 않은 경우가 많고 설 차례도 점차 가족단위의 모임이나 여행을 떠나는 휴일개념으로 변화될 것이다.

 

시제(時祭), 기제(忌祭)는 진설 방법이나 순서 등은 집안마다 각각 다르게 변천하다 보니 어느 것이 옳고 정석이라 하기 어렵다. 앞으로 10년 후 어떻게 변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20여 년이 지나면 묘제도 거의 없어지고 기제 또한 같은 변화를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남아선호에 대한 인식 변화, 인구감소, 의식의 변화와 함께 농경문화의 산물에 기인한 요소가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자연스레 다가오지만 언론의 역할도 지대하다고 본다.

지금은 장례는 매장보다 화장이 절대적이다. 제사를 모시는 것 또한 매장에 따른 유골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격히 말하자면 유골을 태워 화장을 한 경우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몇 해 전 송호근 교수의 칼럼에 대하여 크게 감명받은 요소가 있어 다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래와 같이 칼럼을 덧붙여 본다. 제사란 제수를 많이 차리고 복잡한 절차를 엄수하는 것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사를 모시는 제주와 참사자들의 마음가짐과 정성이다. 정성에는 소박함과 제수준비에 고생한 분, 조상에 대한 고마움이 바탕되어야 한다.

 

제사를 회상함  [송호근 칼럼]

설을 잘 쇠셨는지, 오랜만에 친인척들을 만나 화기애애한 기억을 갖고 돌아오셨을 터, 이참에 오백 년 전통에 항거한 무용담 한 토막을 들려드리고 싶다. 필자가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조상도 모르는 놈!’이 된 사연을 말이다. 부친은 이 말을 달고 사셨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안동과 자웅을 겨루느라 제례를 과도하게 발전시킨 영주(榮州) 출신이라 더욱 그랬다. 부친은 호를 아예 효응(孝應)이라 지으셨다. 효로 조상 은덕에 응하면서 사시는 신조는 탓할 바 아니나 그 실행 의무가 베이비부머인 장남에게 온통 실린다는 게 문제였다. 유교 문화의 막내 세대, 그것도 충효사상에 세뇌된 베이비부머에게 부모의 신념과 조상숭배는 종교였다. 그러니 종교혁명을 일으키지 않고는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사는 그냥 넘어가면 양속이고, 따지면 불화다. 오십 줄까지 효응 선생의 신조에 착실히 응하던 중 불경스러운 회의가 들었다. 이 많은 음식, 투여한 노동, 친인척의 출석, 그리고 총총히 흩어진 뒤의 허망함은 도대체 뭐지? 제사 후 느긋하게 음복하시던 효응 선생의 표정과는 달리 장남의 지식창고에는 반란이 싹텄던 거다. 반란은 곧 기획연구로 이어졌는데 제례를 창안한 조선 유교의 비밀을 기어이 밝혀냈다. 그것은 통치 이데올로기의 실행 방식이었다. 성리학을 개국 이념으로 택한 조선의 건국 세력은 불교 탄압과 함께 민간의 주술 신앙과 음사(淫祀)를 엄격히 금지했다. 소격서를 세워 무당과 무격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상과 하늘을 들어앉혔다.. 제례(祭禮)와 제천(祭天)이 그것이다. 경복궁 좌측에 종묘를 지어 조상숭배의 기초를 마련하고,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곡식신과 토지신에 길운과 풍년을 빌었다. 조선법전인 『경국대전』에 제사 규칙을 정해 반포했다.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먹을 게 없던 시절,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했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랐다. 그런데 가문과 문벌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조선 후기 봉제사는 문중 대사, 가족의 최대 행사로 변질됐다. 1년 20회 정도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신분 향상을 열망했던 서민들도 제례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설 제사를 정중하게 지낸 후 필자는 연구결과를 조심스럽게 발표했다. 유교가 종교 기능을 벌써 상실했고, 한말(韓末)을 기준으로 친가, 외가, 처가에 벼슬한 사람이 없는 한족(寒族) 서민이 분명하므로 이제 제사는 무용하다는 주장을 폈다. 조선이 역사에 묻힌 마당에 통치수단인 제례의 의미는 소멸됐음을 부가했다. 주자학 선조 안향 선생을 배향한 소수서원에서 반경 백리 안에서 사셨던 효응 선생의 표정은 곧 험악해졌고, 베이비부머의 반란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그 최후통첩에 결국 무릎을 꿇는 게 오륜(五倫)의 도리였지만 어리석게도 그만 베이비부머의 합리성을 발동하고야 말았다. ‘저의 앎과 지식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쯤 되면 세대 간 전선에는 화염이 인다. “조상도 모르는 놈들!” 철저한 사전 모의에도 불구하고 이 호통 하나로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성곽으로 투항했고, 장남에게도 얼른 항복하라는 묵언의 신호를 보냈다. 필자는 제사 간소화론으로 타협에 나섰지만 효응 선생은 분노에 치를 떨며 노구를 끌고 귀가했다. 협상은 깨졌다. 필자는 연구결과를 칼럼에 썼다. 며칠이 지나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동 태생의 70대, 명문대 출신 공무원이었다고 밝힌 노신사의 질문은 이랬다. “사실 나도 제사를 고민 중인데, 송 교수가 주장한 논리의 역사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아주 소상하게 기획연구의 경로를 말했고, ‘예법에 사로잡힌 제례’의 폐지를 주장했다. 온갖 제물을 폐하는 대신 밥, 국, 북어포, 냉수에 술 한잔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음-.” 저쪽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요량으로 나는 부가 설명에 들어갔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는 간소화를 주장해 네발짐승의 고기를 금하고, 국, 밥, 나물 정도만 권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아예 청수(淸水)만 올리도록 했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을 중시했다는 점을 말이다. 조금 뜸을 들인 뒤 그가 투항했다. “나도 그렇게 하렵니다!”‘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결렬된 협상의 작은 전리품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불안한 평화다. 그러니 ‘조상도 모르는 놈!’을 되뇌고 계실 효응 선생이 걸린다. 설은 잘 쇠셨는지, 일가친지들과 재회의 기쁨을 갖고 돌아오셨는지, 귀성객들이 보낸 고향의 설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출처 : 중앙일보 2013.02.12.송호근 : 서울대 교수. 사회학)

*추로지향 :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말함

 

작년 서울의 매화 소식은 3월3 중순에 들려왔다. 하지만 때 늦은 한파로 꽃이 시드는 바람에 결실을 하지 못했다. 울산은 서울보다 4040여 일 이르게 매화가 활짝 폈다. 지속되는 추위로 매화꽃이 시들까 홀로 탄식(獨嘆梅花廋) 해 보며, 금년 2월 6일 울산에서 찍은 매화사진과 함께 곧 다가올 봄을 맞이하고 싶다.

 

 

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에서의 제례(祭禮)는 기제사(忌祭祀)의 대상은 제주부터 2대조까지 지내며, 매년 조상이 사망한 날에 제주(祭主)의 가정에서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제수는 평상시의 간소한 반상 음식을 자연스럽게 차리며 성묘는 각자의 편의대로 하되 성묘제수(省墓祭需)는 마련하지 않거나 간소하게 한다. 우리 집안도 위와 같이 지내고 있으나 별도 성묘는 하지 않는다.

전통 유교와 농경문화의 산물인 조상 모시기는 시대의 흐름 속에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장손인 나 또한 미풍양속으로 지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후손들에게는 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에 평소 생각했던 기제사는 내 세대는 옛 법을 따르겠으나, 자손들이 이어가겠다고 한다면 부모의 기일과 생일 중 가장 좋은 날(좋은 날을 택하기 어려우면 청명, 한식 중) 하루를 택하여 가족들이 모여 화목한 시간을 갖되 별도 제수는 차릴 필요 없이 먹는 밥과 물 한 그릇 북어, 막걸리 한잔 곁에 차려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기쁨을 누리겠노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 집안의 墓祭祀(時祭)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추석 2주 전 벌초와 함께 지내고 있는데 2년 전 시제를 마친 후 종회의시(宗會議時) 일가 어른들 앞에서 내게 발언 기회가 주어져 나름 생각한 바를 얘기하게 되었는데 파격적이었을까?

 

발언 내용은 앞으로 20년 이어지기 힘든 시제를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잘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며, 산재되어 있는 묘는 이미 자연으로 돌아갔기에 이를 파묘(破墓)하거나 이장(移葬)없이 봉분의 흙 한 줌을 자져 와 이곳 선영(先塋)에 뿌림으로써 이장을 대신하고, 별도의 봉분을 만들거나, 상석이나 표식을 해서는 아니 되며, 우리 세대 또한 이와 같이 화장 후 골분만 여기에 묻힘으로써 후손들이 관리의 불편함을 덜어주고, 한 장소에 많은 조상의 흔적이 모임으로서 그나마 벌초할 후손이 생겨난 것이며, 종중(宗中)예산이 허락한다면 주차시설과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지나가는 길에 소풍 나오듯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가족공원 같은 장소가 되어야 하며, 또한 후손들이 명절에는 조상 모시기 의무감에서 벗어나 가족과 편안하게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 2년이 지난 지금 내 발언에 대한 공감대가 조금씩 확산되어가는 추세이다.

 

이와 같이 조상 모시기는 눈에 보일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것 또한 자식 된 도리로 당연히 이어져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이 애송하는 시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을 자서(自書) 해 보며, 부모로 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유자음(遊子吟 : 먼 길 떠나는 아들을 위해 읊다)    - 맹교(孟郊)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 자애로운 어머님 바느질감을 들고

遊子身上衣(유자신상의) 길 떠날 아들이 입을 옷에

臨行密密縫(임행밀밀봉) 떠나기 전에 꼼꼼히 꿰매시는 것은 

意恐遲遲歸(의공지지귀) 아들이 어쩌다 더디 올까 두려워서라

難將寸草心(난장촌초심) 누가 말하랴 저 조그만 풀 같은 마음이

報得三春暉(보덕삼춘휘) 따뜻한 봄빛 은혜 갚을 수 있을까 하고

 

맹교(孟郊. 751 ~ 814) 중당기(中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동야(東野), 시호(諡號) 정요선생(貞曜先生) 

이 시는 맹교가 인양현위로 있을 때인 54세 때 지은 작품으로, “어머니를 빨래하는 냇가에서 맞이하여 지었다.”라고 스스로 밝힌 주석이 있다고 하고, 또 ‘길손의 노래’로 길 떠나는 나그네가 자기를 생각하고 있을 어머니의 慈情(자정)을 느껴 지은 시라고도 한다. 아무튼 아주 단순한 내용을 묘하게 표현하여 자식 된 사람으로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짓게 하는 명작이다. ‘어머니는 멀리 떠나려는 자식에게 못 가도록 말리지는 못하고, 아들이 입고 갈 옷을 다시 한번 살피며 해진 곳을 다시 꼼꼼히 꿰매신다. 이렇게 꼼꼼히 손보는 것은 혹시라도 사랑하는 이 아들이 더디 돌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생각이 짧은 아들이야 어머니의 이 깊은 심중을 알기나 할까. 아마도 모를 것이 당연하나니 부모의 은혜를 모두 갚는 자식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있기까지 어머니…. 선조들 또한 한결같이 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