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은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 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1585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춘추관원에 뽑히면서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으로 승진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되었고,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가 되었다. 47세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다.
1616년 인목대비의 폐비 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晴窓軟談)·구정록(求正錄)·야언(野言) 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우의정에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사망했다.
1651년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 되었다. 63권 2222 책 분량의 방대한 상촌집(象村集)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소개하고자 하는 상촌 선생의 작시로 전해지는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 매일생한불매향(桐千年老恒藏曲)은 서화전시회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으로 자연이 들려주는 변함없는 진리의 묘미를 담고 있다. 또 한 편의 시 대설(大雪)을 통해 상촌선생의 정취를 느껴보고자 행서로 자서해 보았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함없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백번을 꺾여도 새가지가 돋아난다.
大雪(대설)
塡壑埋山極目同(전학매산극목동) 골 메우고 산 덮어 눈길 닿는 곳 같으니
瓊瑤世界水晶宮(경요세계수정궁) 온 세계는 구슬이요 수정궁이 되었네
人間畵史知無數(인간화사지무수) 인간세상 화가는 셀 수 없이 많지만
難寫陰陽變化功(난사음양변화공) 음양의 변화 공덕(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은 그려내기 어렵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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