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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소동파 오도송(蘇東坡 悟道頌)

송나라 때 문장가로 유명한 소동파(蘇東坡. 1036~1101). 그의 재주는 시문은 물론 그림, 글씨, 의학, 심지어 요리 연구에도 있었다. 미식(美食) 사랑이 지극해 ‘동파주경(東坡酒經)’이란 요리책까지 남겼으며, 그 재능과 천재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 만큼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칭송을 받고 있다. 소동파에 대한 소개는 앞에서 언급하였기에 생략토록 하겠다.

 

소개하고자 하는 게송은 그가 불교에 대한 오도의 경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내용으로 심오함이 함축되어 있다. 약 2,800여 편의 시중 오도송 관련 회자되는 2수를 自書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여산연우(廬山煙雨 : 여산의 안개비)     - 소동파(蘇東坡)

廬山煙雨浙江潮(여산연우절강조)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 이여

未到千般恨不消(미도천반한불소) 와보지 못했을 땐 온갖 한이 남더니만

到得還來無別事(도득환래무별사) 와서 보니 도리어 별다른 것은 없고

廬山煙雨浙江潮(여산연우절강조)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 이었네

 

여산은 중국 강서성 남강부에 있는 유명한 산이다. 동진시대부터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지역으로 동림사 서림사를 위시해서 70여 개의 사찰이 있어 강남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수려한 산봉우리와 산세의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나 역대의 문인 명사들이 이곳을 찾아 글을 짓거나 그림을 그렸다. 소동파가 지은 이 시는 여산의 안개비 내리는 풍경과 절강의 물을 읊은 시인데 오도송이라 할 만큼 품격 높은 선시로 평가받는다.. 선을 참구 하여 체험한 도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했는데 가보고 싶어 할 땐 가보지 못한 것을 탄식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별것 아니더라는 내용으로 불교와 선종의 많은 종파에서 인용하는 선리시(禪理詩 : 선의 이치를 함축하여 표현한 시)로 깨우침에 이른 경지와 이르지 못한 경지를 매우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동파 오도송(蘇東坡 悟道頌)

溪聲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 개울 물소리는 장광설 이요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 산 빛이 어찌 청정한 몸 이 아니랴

夜來八萬四千偈(야래팔만사천게) 어젯밤 다가온 무량한 이 소식을

他日如何擧似人(타일여하거사인) 어떻게 그대에게 설명할 수 있으랴

 

오도과정을 살펴보면 소동파가 아직 크게 깨닫기 전, 어떤 선사보다도 더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만심에 차 있었는데, 한 번은 호북성(湖北省) 형남(荊南)에서 태수를 할 때 시골 선비 차림으로 당시 명성이 자자하던 옥천사라는 절의 승호 선사를 찾아가 실력을 검증하려다가 제대로 임자를 만난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승호(承皓).선사께서 물었습니다. “대인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 소동파(蘇軾)가로되, “나의 성은 ‘칭(秤)’이요.”라고 하고는 곧이어, “천하에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을 달아보는 사람이란 말 이외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호 선사께서 ‘악!’하고 벽력같이 할(喝)을 하고 나서 가로되, “악! 하는 이 소리는 그 무게가 얼마나 나가겠습니까?” 여기에 이르자 소동파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후 소동파는 임제종의 동림상총(東林常總. 1025-1091) 선사를 만나게 되는데, 상총선사께서 “그대는 어찌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有情說法)만 들으려고 하느냐?”는 말을 처음 들은 지라 의문을 품은 채 집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녘 온 마음을 기울여 선사가 던진 말을 참구 하다가 마침내 폭포 앞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의 경치 그대로가 부처님의 법신이로다’라는 오도송을 남겼다고 한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이란? 한때 선가에서 유행됐던 말이다. 사람이 아닌 무정물이 법을 설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산하대지의 온 자연계에서 불법이 설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남양혜충(南陽慧忠) 국사의 공안에 무정설법이란 말이 나온다. 조동종(曹洞宗)을 창시한 동산양개(洞山良介) 선사가 이 공안을 참구했다. 동산이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스님의 회상에 있다 운암담성(雲巖曇晟)의 회상으로 갔다. 동산(洞山)이 운암에게 물었다. “무정(無情)의 설법을 어떤 사람이 듣습니까?” “무정이 듣지.”“스님께서도 듣습니까?” “내가 만약 듣는다면 그대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 “저는 어째서 듣지 못합니까?” 운암이 불자를 똑바로 세우고서 말했다. “들었는가?” “못 들었습니다.” “내가 설법하는 것도 듣지 못하거늘 어찌 무정의 설법을 들을 수 있겠는가?” “무정의 설법은 어떤 경전의 가르침에 들어 있습니까? ”아미타경에 ‘흐르는 물과 새들 그리고 수목들이 모두 염불을 하고 법을 설한다’는 말을 모르는가? 이때 동산이 깨달은 것이 있어 이렇게 말했다. “대단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무정의 설법은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도다. 만약 귀로 들으려면 끝내 들을 수 없고 눈으로 들어야 비로소 알 수 있으리라.” 여기서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눈으로 듣는다는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