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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정몽주 춘흥(鄭夢周 春興)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1세 때인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3등으로 합격하고, 1360년 예부시(禮部試) 을과(乙科)에 장원하였다.

1362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화주(和州), 함주(咸州), 정주(定州)에서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136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내어 놓고 3년 시묘(侍墓) 살이를 하자 나라에서 정표를 하기도 하였다.

1367년 성균관 박사를 겸임할 때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강론이 뛰어나서 모두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李穡)은 그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평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영립 하여, 이듬해 충의군(忠義君)에 봉군 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고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는 이들을 제거하려 하던 중,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다가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피살되었다.

 

정몽주의 시는 호일(豪逸 :예절이나 사소한 일에 매임이 없이 호방함.)하면서 아건(雅健 : 시가나 산문이 품위가 있고 기운참.)하고, 웅심(雄深 : 글이나 사람의 뜻이 크고 깊음.)하면서 화후(和厚 :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함)하여 시가 지녀야 할 이상적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호일(豪逸)하다는 평은 후대 여러 시화집 등에서 그의 시 풍격을 드러내는 평어로 자주 사용된다. 정몽주의 시는 당시(唐詩)의 풍격과 송시(宋詩)의 풍격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사물에 대한 관찰과 이치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체득하려 했다는 것을 여러 시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시로는 호중관어(湖中觀魚), 복주관중정(復州館中井), 중추월(中秋月), 석정전다(石鼎煎茶), 동지음(冬至吟) 등이 있다.

그리고 증승(贈僧), *환암권자(幻庵卷子) 등의 시는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의 공(空) 사상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시 춘흥(春興) 또는 춘우(春雨)는 포은집(圃隱集) 2권, 동문선, 대동시선 등에 실려 있다. 

며칠 전 봄을 재촉하는 비가 제법 내렸다. 봄비는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데, 정몽주는 이러한 현상에서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를 감지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작가의 내밀한 감흥을 잘 드러낸 시라고 하겠다.

 

春雨(춘우 : 봄비)

春雨細不滴(춘우세부적) 봄비 가늘게 내려 방울지지 않더니

夜中微有聲(야중미유성) 밤 되니 희미한 빗소리 들리네

雪盡南溪漲(설진남계창) 눈 녹아 남쪽 시냇물이 불어나니

草芽多小生(초아다소생)  봄풀의 싹이 얼마나 많이 돋아 났을까

 

*환암권자는 포은이 고승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 국사에게 족자 형태로 써준 시나 글로서 불교를 진리를 찾는 방법이나 교리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들어낸 내용이다.

권자(卷子)란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서 소장할 수 있도록 족자형태로 된 글이나 시를 권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