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의 요청에 의해 “청무성”이란 필명으로 시작한 블로그 “고전과 전원” 이 8년째가 되었다. 초창기 특용작물을 위주로 귀농, 귀촌을 꿈꾸고 있는 분들께 새로운 소득원을 함께 찾아보고 제배 경험을 공유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나 소재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고소득 작물도 우리나라에서는 1년 만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희소성과 특화가 사라져 안정적 수입원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데, 그 대표적 작물이 아로니아, 불루베리, 열매마 등이 이에 속한다. “빠른 것이 이긴다”는 명제는 한시적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모든 것이 빠른 우리나라에서는 통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고전적 요소는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선조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과 문인의 발자취를 찾다 보면 소제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한시는 고려 초 최대의 시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남긴 시만해도 약 6,000 여수에 이른다. 이처럼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업적을 찾아 구고심론(求古深論)의 자세로 그 당시의 감흥을 공유하고 느껴보는 것 또한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옛 것을 지금에 이르러 새롭게 조명해 보며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생애와 문집을 살펴보고자 한시 중심으로 소제를 정한 연유이기도 하다.
제 블로그에 기재된 붓글씨는 약 1천여 점에 이르며, 시작단계의 초기 글씨를 마주하며 졸필에 우매(愚昧)한 내용과 해설로 블로그를 내리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만 그 또한 나의 발자취이기 때문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유지를 하고 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오산 차천로 문인은 짧은 시간 내 4~5,000 여수를 시를 짓고 하룻밤에 한시 600운(韻)을 지어 수응(酬應 : 요구에 응함)하여 뛰어난 문재(文才)로서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송도삼절(松都三絶)로 글씨 또한 명필로 당대를 풍미했던 선생은 연안 차씨(延安 車氏)의 자긍심을 높여준 인물로 그가 남긴 한시 몇 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 1556 ~ 1615) 조선 중기의 봉상시판관(封山寺判官), 교리(校理), 봉상시첨정(封山寺僉正)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이다. 송도(松都 : 개성) 출신으로 고려의 간의대부(諫議大夫) 차원부(車原頫)의 6대손이며, 차계생(車繼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차광운(車廣運)이다. 아버지는 차식(車軾)이며, 어머니는 이계천(李繼天)의 딸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6년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장원급제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1588년 문재(文才)가 있다는 이유로 용서되었다.
이듬해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 때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4,000∼5,000수의 시를 지어 일인(日人)들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명사(明使 : 명나라 사신)들이 문장의 속작(速作)을 실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 : 요구에 응함)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으며, 또한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 그의 뛰어난 문명(文名)은 명나라로 부터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벼슬에 큰 뜻을 두지 않은 오산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다가, 1601년 교리(校理)로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하고, 광해군 때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내고 세상을 떠났다.
한호(韓濩)·권필(權韠)·김현성(金玄成)과 더불어 서격사한(書檄詞翰)이라 하였다. 특히 시에 능한 오산, 한호(韓石峯)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아버지 식,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3소(三蘇)’라 불렸다. 가사(歌辭)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오산집(五山集)·오산설림(五山說林), 작품으로 강촌별곡(江村別曲) 등이 있다.
강촌별곡은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속에 은거하며 안빈한적(安貧閑適) 하는 삶을 노래한 낙빈가(樂貧歌) 계열의 작품으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어 경기도 과천역에 강촌별곡 머릿부문이 새겨진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이처럼 문재(文才)에 뛰어난 오산선생께서 남긴 시 몇 수를 자서(自書)와 함께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추회(秋懷 : 가을을 회상하며)
春山非必勝秋山(춘산비필승추산) 봄 산이 가을산보다 꼭 낫지는 않으니
擺落生成覺未閒(파락생성각미한) 떨어지고 돋아나고 한가한 때 없겠네
舊綠如曾留木末(구록여증류목말) 묵은 잎이 여태도 나무 끝에 달렸다면
新紅安可着枝間(신홍안가착지간) 새 꽃잎 어이하여 가지 사이 피겠나
양화석조(楊花夕照 : 양화나루터에 지는 낙조)
楊花雪欲漫(양화설욕만) 버들 꽃은 눈처럼 흩날리고
桃花紅欲燒(도화홍욕소) 복사꽃 붉어서 불붙는 듯하구나
繡作暮江圖(수작모강도) 해 저문 강가 한 폭의 수놓은 그림
天西餘落照(천서여락조) 서쪽 하늘에는 낙조가 남아있네
강야(江夜 : 강가의 밤)
夜靜魚燈釣(야정어등조) 고요한 밤 고기잡이 등불만이 깜박이고
波淺月滿舟(파천월만주) 잔잔한 물결에 달빛만 배에 가득하다
一聲南去雁(일서남거안) 남쪽으로 날아가는 외로운 기러기 소리
啼送海山秋(제송해산추) 가을 짙은 바다와 산을 울며 가는가
이 시는 분위기로 보아 전원에 한가로이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오언절구로 우(尤) 운이다. 오산속집(五山續集 卷1)에는 승구의 “얕다(淺)”가 “깊다(深)”로 되었다. 고요한 가을 달밤에 기러기 울음소리가 산천에 울리는 느낌을 붙잡아 내었다. 기구(起句)는 강에서 밤낚시하는 상황이다. 고요한 밤과 낚시에 걸려 요동치는 물고기의 움직임이 대비되어 있다. 승구는 달빛 비치는 뱃전이다. 물결이 잔잔하여 배는 가만히 흔들리고 가을 달빛이 뱃전 가득히 비치고 있다. 지극히 고요한 분위기다. 전구는 기러기의 등장이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가 높은 울음소리를 한번 내지른다. 그 소리는 달빛에 밝게 비친 고요한 강 풍경을 휘저어 놓을 것이다. 결구는 그러한 기러기 울음소리에 대한 의미부여다. 그것은 산과 물에 깊어 가는 가을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기에 그 가을을 울어 보내는 아쉬움의 소리라는 것이다. 담담하게 풍경을 묘사하고 그 속에 숨어있는 아쉬움의 정서를 잘 표현하였다고 하겠다.
우음(偶吟 : 우연히 읊다)
蝸角爭名戰未休(와각쟁명전미휴) 달팽이 뿔에서 이름 다투기 끝나지 않아
幾人談笑覓封侯(기인담소멱봉후) 몇 사람이나 공신되어 웃고 말할까
劍頭螘血流千里(검두의혈유천리) 칼끝에 개미 피는 천리에 흐르고
甲外鯨波沒十洲(갑외경파몰십주) 갑옷 밖에 고래 파도는 모래섬 열 개를 삼켰네
莫問是非身後定(막문시비신후정) 시비는 죽은 뒤에 정해진다고 하지 마라
從知勝敗掌中收(종지승패당중수) 승패는 손바닥 안에서 결정되는 것이니
若敎畫像麒麟閣(약교화상기린각) 만약 기린각에 초상을 그린다면
上將奇功在伐謀(상장기공재벌모) 상장군의 기이한 공은 적의 계책을 이긴 데 있네
(大東詩選 卷9)
이 시는 전쟁에서 무장들이 공을 다투는 임란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한 칠언율시로 우(尤) 운이다. 그는 문장 재주는 인정받았지만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이라 벼슬이 높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공명에 골몰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수련(首聯 : 한시의 율시에서 첫째 구와 둘째 구를 이르는 말)은 장자(莊子) 칙양편(則陽篇)의 말을 끌어와 공신되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겠다고 날뛰는 꼴은 큰 안목에서 보면 달팽이 뿔 위에서 전쟁을 벌여 공을 세우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거기에서 몇 사람이나 공을 세우겠느냐고 했다. 함련은 전쟁 상황에 대한 냉소적 태도다. 전쟁터에서 적을 무찌른 전공을 일러 마치 개미떼를 칼로 베고 모래섬을 삼키는 파도와 같은 허풍으로 간주하고 있다. 아마 지나친 전공 다툼에 대한 일침이라고 생각된다. 경련(頸聯 : 한시의 율시에서 다섯째 구와 여섯째 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은 시비와 승패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그의 말인 즉 옳고 그름은 사람이 죽은 뒤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며, 이기고 지는 것도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비와 승패를 다루는 것은 오직 조정과 임금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뜻인 듯하다. 미련은 진정한 공은 계책으로 적을 무찌른 데 있다고 하여 전쟁터에서의 활약보다 지휘부의 계책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아마도 전장의 노고보다도 조정의 책략을 높이 평가한 당시 조정을 풍자한 의미일 것이다.
세상에서 송도삼절(松都三絶)하면, 중종 때의 학자 화담(花潭)과 황진이(黃眞伊) 그리고 박연폭포를 들지만, 이것은 황진이를 내세우기 위하여 지어낸 것이고, 진짜 송도삼절은 차천로(車天輅)의 한시(漢詩), 한호(韓濩 : 한석봉)의 글씨, 그리고 최립(崔岦)의 문장을 말한다.
오산이 어렸을 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였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한 뒤 형과 밥을 먹는데, 다리에 묻은 흙도 깨끗이 닦지 않고 밥상 앞에 앉았다고 형에게 꾸중을 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부인이 밤이 되자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주며 말하기를, 10년 기약으로 공부를 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한 후 집으로 돌아올 것을 약조하세요. 만약 그 안에 출세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죽음으로 맞이할 것이요. 하였다. 한양에 올라온 오산은 성균관 집사를 통하여 어렵게 성균관에 들어 가 공부를 하였다. 부인과의 약속 때문에 설날이 되어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혼자 성균관에 남아 글공부만 하고 있는데, 하루는 임금이 미복잠행(微服潛行)하여 성균관에 들리니 한 선비가 열심히 글을 읽고 있어 자신을 남산골샌님’이라 속인 뒤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 몇 번 더 오산을 만나 인품과 재주를 시험한 임금은 하루는 병풍을 건네며 그곳에다 시를 한 수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오산은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시를 써서 주었다. 시를 받은 ‘남산골샌님’은 이번에 과거 시험이 있을 것이니 꼭 함께 응시하자고 다짐하였다. 오산이 알성시(謁聖試) 과장(科場)에 나갔으나 만나기로 한 ‘남산골샌님’이 보이지 않아 혼자서 과장(科場)에 들어갔는데, 다행스럽게도 과제(科題)가 ‘병풍’이어서 예전 ‘남산골샌님’에게 써 준 시를 다시 써 제일 먼저 제출하였다. 드디어 급제자를 알리는 방(榜)이 나붙어 오산은 병과(丙科)에 합격하니 곧 임금을 알현하게 되었다. 멋 모르고 임금을 뵈니 ‘남산골샌님’이 바로 임금인지라 오산은 그동안의 무례함을 충심으로 빌었다. 그러나 임금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오산의 손을 잡고 칭찬하였으며, 그 뒤 오산은 어사화를 쓰고 금의환향하였다.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도 한 번 지은 문장은 고치지 않았고, 아무리 어지럽게 쓴 원고일지라도 지은 뒤에는 광주리에 던져두고 꺼내 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이어 벽제관에서 패한 뒤 그 해 가을 명나라로 돌아가며 여러 문사(文士)에게 이별 시를 구하였다. 이때 율시 100수(首)는 2일 만에 짓고, 배율시(排律詩) 100운은 한나절만에 지어 주었는데, 그 시재가 풍부하고 심오하여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 한다.
선조 때 명(明) 나라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의 뛰어난 문사(文詞)와 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지라, 조선에서도 시문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그를 접대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은 당시 문장으로 이름 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접반사(接伴使)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을 연위사(延慰使)로 뽑아 그를 맞이하였다. 사신 일행이 평양에 이르고 저녁이 되자 주지번은 송도(松都)를 회고하며 오언율시 1 백운(韻)을 보내어 날이 새기 전에 시를 지어 올리라 하였다. 이에 월사(月沙)가 여러 사람과 의논하니 어떤 자는 밤이 짧다고 하고, 어떤 자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짓자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나누어 시를 지을 경우 빨리 지을 수 있으나 문맥이 서로 통하지 않을 것이니 진퇴양난이었다. 그러자 혼자서 그 많은 시를 지을 수 사람은 오직 오산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월사는 곧 오산을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다. 그러자 오산이 말하기를, 한동이의 술과 큰 병풍 한 개, 그리고 한석봉(韓石峰)이 없으면 불가합니다. 하였다. 월사가 그대로 준비를 하여 주자, 오산은 마루에 병풍을 치고 이어 술을 십여 잔 마시고는 병풍 안으로 들어갔다. 병풍 밖에서 한석봉이 종이와 붓을 준비하자, 오산은 서진(書鎭)으로 장단을 맞추며 이르기를, 내가 소리를 부를 것이니 경홍(景洪 : 韓石峯)은 받아 적으라 말한 뒤 한쪽에서는 부르는 소리가 진동하고 한쪽에서는 일필휘지로 받아 적어 날이 새기도 전에 1 백운(韻)의 시를 모두 완성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주지번은 촛불을 밝히고 오산이 지은 시를 읽다가, 너무 흥에 겨운 나머지 반도 채 읽기 전에 장단을 맞추던 쥘부채가 부서졌으며, 읊는 소리가 대문 밖까지 울려 퍼졌다 한다.
야교귀승(野橋歸僧 : 들판 다리로 돌아가는 스님)
晴川芳草望迢迢(청천방초망초초) 맑은 시내 아름다운 풀을 바라보니 까마득하고
何處孤僧錫杖遙(하처고승석장요) 어느 곳 외로운 스님 석장을 짚고 멀리 가네
寺在白雲爭落日(사재백운쟁락일) 절에 있는 흰 구름은 떨어지는 해와 다투고
路分荒野入長橋(로분황야입장교) 길은 나누어져 거친 들녘의 긴 다리에 드는구나
鏡中過影遊魚戱(경중과영유어희) 거울 속 그림자가 지나가듯 물고기는 놀며 즐기고
山外歸心倦鳥搖(산외귀심권조요) 산 밖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고달픈 새들을 흔드네
若遣龍眠成活畫(약견용민성활화) 만약 용민(*李公麟)을 보내 생생하게 그리게 한다면
芒鞋留著彩虹腰(망혜류저채홍요) 짚신을 무지개 허리에 머물도록 나타나게 하리라
*이공린(李公麟. 1049 ~ 1106) 중국 북송 후기 사대부 화가. 자는 백시(伯時), 호는 용민거사(龍眼居士).
추사(秋思 : 가을 생각)
燕塞霜寒鴈度遼(연새상한안도요) 연나라 변방의 찬 서리에 기러기는 요동을 건너고
碧雲四望海天遙(벽운사망해천요) 푸른 구름에 사방을 바라보니 바다와 하늘은 아득한데.
愁人只結相思夢(수인지결상사몽) 시름겨운 사람은 오직 맺고자 꿈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며
月在虛窓夜寂寥(월재허창야적료) 공허한 창에서 달을 보니 밤은 적적하고 쓸쓸하네
정야사(靜夜思 : 고요한 밤 생각에 잠겨)
相思無路莫相思(상사무로막상사) 서로 그리움엔 길이 없으니 그 맘 잃지 말고
暮雨朝雲只暫時(모우조운지잠시) 아침의 구름과 저녁 비의 만남도 잠깐 이어리.
孤夢不知關塞遠(고몽부지관새원) 외로운 꿈속에도 변방의 요새가 먼 줄 모르니
夜隨明月到天涯(야수명월도천애) 이 밤에도 밝은 달빛 따라 하늘 끝에 이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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